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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은혜와 책임 & 쉼 (마 11: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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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하나님 나라를 거절하고 배척한 도시들에 대해 화를 선언하신 말씀과(20-24),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인생을 안식으로 초대하신 말씀(25-30)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특별히 많은 권능을 베푸신 도시들이 있었습니다. 갈릴리 북쪽 해변에 위치한 ‘고라신’과 ‘벳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 중심지였던 ‘가버나움’입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많은 이적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강하게 드러내셨습니다. 그 목적은 세상 백성으로 살아가던 삶에서 돌이켜 권능으로 임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도시들은 하나님 나라를 거절했습니다. 여전히 자신들의 죄악 된 방식대로 살기를 고집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회개치 아니”함을 보고 “책망”하시며 “화”를 선언하셨습니다. ‘화’라는 단어는 통곡하는 탄식을 말합니다. 이는 주님은 회개치 않은 그들을 심판으로 위협을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회개치 않고 스스로 멸망 가운데 빠지고 있는 그들을 보며,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탄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죄가 심각함을 구약의 세 도시에 비교하셨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구약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한 도시로 자주 언급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옥의 땔감’정도로 여기던 곳입니다. ‘소돔’은 온갖 폭력과 극심한 성범죄로 무법천지가 되어 하나님께서 유황불을 내려 멸망시켰던 도시입니다. 그런데 선택받은 백성들이었던 세 도시의 죄는, 교만과 불신앙의 중심지였던 두로와 시돈보다 그리고 사악한 범죄가 난무했던 소돔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21, 23)

구약에 비하면 당시 갈릴리 사람들은 풍성한 은혜 속에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세 도시들에게 보여주었던 권능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음을 인정하고 회개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들은 선지자들이 희미하게 예언했던 그림자와 모형을 붙들고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실제로 보며 체험했습니다. 그것은 은혜이며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고 완악한 마음으로 배척하며 거절했습니다. 주어진 특권을 잘 감당하지 못했을 때, 그들은 특권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엄중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우리 시대는 갈릴리 도시들보다 훨씬 풍성한 하나님의 계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개혁교회의 후손인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보다 바르고 보다 일관성 있는 계시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 대열에 참여하게 된 것은 보다 선한 삶을 살았거나 더 똑똑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일방적인 주님의 은혜이며 축복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풍성한 만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반응해야 할 책임이 크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큰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많은 복을 누릴 수 있는 가능성과 동시에 바르게 반응하지 않을 때 훨씬 엄중한 심판을 받을 가능성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 핍박을 받는 신자들은 믿는 부모님의 기도 후원 속에 자라가는 사람들을 부러워합니다.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배우며 자란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잘 압니다. 또 완고한 불신 자녀로 인해 고통 받아본 사람이라면, 믿는 자녀를 두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잘 알 것입니다. 또 문제 많은 교회에서 상처 받아 본 사람이라면, 건전한 교회에서 성숙한 성도들과 교제하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잘 알 것입니다. 그들 모두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보다 풍성하게 누리는 은혜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풍성한 은혜만큼 책임도 막중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와 더불어 은혜에 합당하게 반응할 수 있는 삶의 태도 또한 함께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이제 25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이란 스스로 똑똑하게 여기며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장터의 아이들처럼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숨겨져 있습니다. 반면 ‘어린 아이들’은 단순하게 주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풍성히 맞봅니다. 앞 단락과 연관해서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현재적인 심판은 계시를 숨기는 것이며, 축복은 계시를 밝히 드러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힘을 다해 수고했는데도 결과가 변변찮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낙심합니다. 열심히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거나, 열심히 시험 준비 했는데 점수가 시시하면 불평하지 않기가 힘들지요. 그런데 성공주의적인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의 복음 사역은 철저한 실패였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방식은 선교본부였던 가버나움에서부터 그다지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열심히 사역한 결과로 오히려 많은 거절과 배척을 당하셨음에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셨습니다.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것은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하셨기 때문입니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26-27) 예수님의 감사는 자기 뜻대로 된 것에 대한 기쁨에서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노력과 땀의 결실로 인한 감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뜻대로 된 것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사회가 건강할수록 정직하게 땀 흘린 사람이 인정받고 이득을 봅니다. 반면 건강하지 못한 사회일수록 부정하고 편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출세하고 더 많은 소출을 거둡니다. 건강하지 못한 사회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려고 하다보면 노력에 상응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때가 분명 많은 것입니다. 그러한 때에 ‘결과 중심’으로 감사 제목을 찾으면 감사보다 불평이 생기기 쉽습니다. 우리는 ‘과정 중심’으로 감사 제목을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모두가 부정과 편법으로 살아갈 때에 하나님 뜻을 따라 정직하게 행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의 뜻을 따라 수고하고 헌신하며 손해 볼 수 있게 하신 것 자체를 감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결과가 현실적으로 아무리 실망스러울지라도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보다 풍성하게 계시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절과 배척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감사’의 자세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그러한 여건 속에서도 충만한 쉼을 누리고 계셨기에 당신님의 쉼으로 사람들을 초청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28) 넓게 생각하면 모든 인생이 죄의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사람을 향해 예수님은 쉼으로 초청하신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상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금 좁혀서 앞문맥과 연관해보면, 이는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과 대조된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을 향한 초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 백성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만든 율법적인 세부조항에 짓눌려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말씀 한구절로도 엄청난 양의 세부 조항들을 만들어냈습니다. 12장에서 확인하게 되겠지만, 안식일에 밀 이삭을 비벼먹어도 정죄와 비난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위배되는 세부 조항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소위 ‘지혜롭고 슬기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 많은 세칙에도 불구하고 교묘하게 율법을 피해 요령껏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반면 요령 없는 어린 아이 같은 일반 백성들은 많은 율법의 짐에 눌려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으로부터 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의 ‘율법주의’의 멍에로부터 자유케 하시려고 초청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29) 예수님의 초청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율법의 멍에를 벗고 예수님의 멍에를 메는 것을 말합니다. 스스로 어떤 세부조항을 잘 지켜냄으로서 의로워지고 구원을 얻고 쉼을 얻으려는 태도를 포기하고,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께 와서 그 분이 지워주시는 멍에와 짐만을 지고 배우는 것을 말합니다. 이 초청이 ‘율법 폐기’나 ‘율법 경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님은, 예수께서 새로운 ‘내 멍에’와 ‘내 짐’을 주신다는 것에서 분명하게 확인됩니다.

사실 산상보훈만 생각해보아도 예수이 요청하는 천국 백성의 삶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율법주의 멍에 아래 살아가던 사람들보다 훨씬 고차원적이고 훨씬 내면화 된 순종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구약 백성은 겉으로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으면 되었을지라도, 신약 백성은 형제를 보고 욕하거나 마음으로 간음하는 것마저 정죄됩니다. 그 엄청난 부담감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쉼’을 얻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30) 주님과의 관계성 회복에서 오는 기쁨과 즐거움에서 그런 삶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멍에는 두 마리 소가 함께 쟁기를 끌도록 묶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한 마리 소가 거칠고 완고하면 다른 소는 굉장히 힘들게 됩니다. 그것은 율법과 함께 멍에를 맨 어린 송아지의 처지와 같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전능하시지만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그래서 그 분과 함께 멍에를 메면 실상은 주님의 능력으로 쟁기를 다 끌어주시고 우리는 그냥 멍에만 걸치고 갈 뿐입니다. 은혜로 동행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과 바른 관계성 속에서 주님께서 가시는 대로 동행하면 율법의 세부항목을 잘 몰라도 저절로 율법이 지켜지게 됩니다. 그래서 쉼이 있습니다.

참 쉼은 인간 스스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잘 감당하며, 주님과의 바른 관계성 속에서 순종하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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