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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주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눅 23:3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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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상황을 괴롭게 묘사하는 방법이 여럿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처럼 지독한 것도 드믑니다. 십자가에 세 사람이 못 박혀 있습니다. 대부분의 형틀은 사형수를 빨리 죽이게 고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렇지 않습니다. 죽기는 죽되 가능하면 그 고통이 오래 계속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저주의 형벌입니다.

두 사람은 행악자입니다. 온갖 악행을 다 했습니다. 도무지 세상에 살려둘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죽으면 다 끝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더 악했겠지요. 이런 사람들은 빨리 죽어서는 안 됩니다. 고통은 최고가 되고 죽음의 시간은 최대한이 되어야 합니다. 그 방법이 나무에 손발을 못 박아 두는 겁니다.

한 사람은 그 둘과 다릅니다. 세상에서 잘못한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재수가 없었나요? 높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나요? 그를 자세히 살펴보면 두 사람은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도 어떠한 상황에서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는 구원하기 위해 그 모습으로 오셨으니까요. 이 한 사람과 나머지 둘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 오늘의 주제입니다.

1. 한 강도

두 강도의 모습이 오늘날 모든 사람들을 대변합니다. 죄를 지어 고통 속에 서서히 죽어갑니다. 십자가 형틀은 아니라도 자기 운명이란 형틀에 갇혀 꼼짝 못합니다. 원하는 것을 할 수 없어요. 십자가에서 며칠 동안 또는 몇 시간 동안 경험할 고통을 늘려서 수십 년 동안에 합니다. 몸과 마음의 아픔은 형벌을 받는 것과 같아요.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못 박힌 사람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을까요? 수치와 모욕은 온 천지로부터 쏟아져옵니다. 완전히 벌거벗겨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너무도 고통이 심해서 정신을 차릴 수 없습니다. 뼈에다 못을 박아 몸을 매달았으니까요. 더 무서운 것은 지옥에 떨어져 더 큰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영원토록.

이 상황을 한 마디로 어떻게 묘사할까요? 절망입니다.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나아질 가능성이 없어요. 누구든 절망하고 있다면 아니 적어도 희망이 없다고 느낀다면 이 강도들과 같은 입장입니다. 그리고 절망을 느끼지 않아도 인간의 상황은 십자가의 강도입니다. 잘 모르기에 자신은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거짓 희망입니다.

좀 더 말해볼까요? 처녀총각이 애인을 만나면 희망이 일어납니다. 좋은 데 취직하고 돈이 벌리면 희망이 일어납니다. 앞으로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다 십자가입니다. 서서히 고통 속에 죽어갈 뿐이요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그리고 지옥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지옥은 벌써부터 사람들에게 불안의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여기에 함께 못 박힌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들처럼 죄를 짓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죄까지 다 짊어졌습니다. 그래서 가장 처참한 형벌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전혀 구세주의 모습이 아닙니다. 옆의 강도와 하나도 다를 바 없어요. 위엄이 전혀 없어요. 허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죄와 허약함을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겉모습만 보아서는 아무도 그를 구원자로 여길 수 없습니다. “우리의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사53:2) 그러니까 강도중 하나가 그 고통 속에서 모욕합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망하는 인간의 못된 짓입니다.

그는 옆의 허약한 모습의 예수가 누군지 모릅니다. 자신의 유일한 희망임을 모릅니다. 그러니까 절망 중에도 그렇게 빈정거립니다. 이것이 불신자의 모습인가요?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신자들도 이 강도와 다를 바가 없어요. 당신은 이 허약한 모습의 예수가 참 구원자임을 믿나요? 어떠한 문제든지 다 해결할 수 있나요? 그렇다면 왜 부탁하지 않나요?

“벌써 여러 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응답이 없어요.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갑니다. 강도보다 나은 게 없어요. 아침에도 밤에도 내 고통은 나를 죽입니다.” 이 대답이 무엇을 말하나요? 당신은 망하는 강도와 같은 입장입니다. 예수가 해결해 줄 것이라는 분명한 믿음이 있다면 벌써 소망이 넘칠 것입니다. 아픔도 다 극복할 수 있고요.

2. 다른 강도

옆의 또 다른 강도를 살펴봅시다. 그도 용서받지 못할 악인이었습니다. 다른 강도와 같은 입장입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역겨운 인간입니다. 평생 유익한 일 한 게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고통과 수치만 안겨준 인간쓰레기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괴롭힌 만큼의 대가를 받으면서 죽으라고 산 채로 못이 박힌 존재입니다. 당신은 그보다 나은가요?

그러나 그의 삶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열립니다. 그의 선택 때문입니다. 다른 강도에게 말합니다. “정신 차려라. 너나 나는 악한 놈들로서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이니 당연하다. 그러나 이 분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게 없었다.” 아마도 이 정도는 다른 강도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가 죄 없는 것은 다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 강도는 생의 방향을 바꿀 말을 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 이것이 기도입니다. 예수께 말하세요. 그러나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구세주요 하나님의 아들로 보고 하라는 말입니다. 다른 강도도 말했지만 그건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조롱이었어요. 믿음 없이 하는 기도는 전혀 기도가 아닙니다. 헛소리일 뿐이지요.

그 말을 듣는 예수께 대답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여기 “진실로”는 원어로 “아멘”입니다. 인간 말을 듣고 하나님 아들이 “아멘”하십니다. 그리고 낙원을 약속합니다. 놀랍지 않아요? 아직 구세주의 사역이 마쳐지지 않았는데도 구원은 주어졌어요.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었나요?

그 강도에게 무슨 선한 일이 있었나요? 그가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무엇을 했나요? 아무 것도 없어요. 세상에서도 가장 악한 인간이라고 십자가형을 받습니다. 그런데 평생 선한 일하고 성전에서 섬긴 제사장들에게 “아멘”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낙원을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그 강도에게 무슨 특별한 것이 있나요?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 강도는 예수를 구세주로 순수하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구원을 부탁합니다. 그것뿐입니다. 그것이 구세주의 “아멘”을 이끌어냈습니다. 기도는 응답이 되었습니다. 평생 악한 일만 했던 강도는 세상의 짐을 내려놓았습니다. 낙원으로 들려올라갔습니다. 그는 말했을 것입니다. “나는 의가 없습니다. 자격이 없습니다. 이 웬 놀라운 축복입니까!”

강도는 내세울 아무 공로가 없었습니다. 자기 문제 때문에 꼼짝 못합니다. 구세주를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도 못합니다. 강도는 염치가 없습니다. 창피하고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구세주는 공로가 없는 자들을 위해 세상에 왔습니다. 기도할 때 자신의 약함과 무능을 고백하세요. 구세주는 어떤 사람도 구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믿습니까? 이 허약한 예수께서 내게도 낙원을 주실 것을? 영원한 구원을 주실 수 있는 분이 현재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나요? 속히 내 눈 앞에서 답이 오지 않는다고 구세주의 능력을 의심해야 하나요? 아니면 내가 무엇을 좀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금식하고 매달리고 난리를 부려야 되리라고 생각해요? 강도처럼 그냥 부탁하세요.

3. 절망은 없다

말씀을 보고 믿기 바랍니다. 강도의 입장에서 강도처럼 기도하세요. 예수는 바로 옆에 영으로 계십니다. “예수님, 나에게 낙원을 약속하심을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낙원에 가기 전에 지금의 문제도 해결해 주세요.” 무슨 말을 하실까요? 마음으로 들으세요. “아멘, 내가 너의 문제를 해결하리라. 믿어라. 믿는 사람의 마음을 가져라.” 응답 받은 마음인가요?

이 강도가 해결 받은 것을 본다면 우리에게도 믿음이 일어납니다. 세상에 예수 앞에서 해결 받지 못할 문제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절망이 없습니다. 천하의 악한 강도도 간단히 해결을 봅니다. 하나님에게는 쉬운 문제 어려운 문제가 없습니다. 온 천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다 버리고 다시 만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강도는 구원의 약속을 받은 뒤에도 여러 시간을 십자가 위에 있었습니다. 찢어지는 아픔도 그대로요 상황도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나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픔보다 큰 소망이 그를 지배합니다. 그렇습니다. 소망을 가진 사람은 어떠한 고통도 어려움도 이겨나갑니다. 당신은 어떠합니까? 십자가에 달린 것처럼 삶이 힘들고 아프기만 합니까?

문제가 여전히 괴롭힙니까? 내게 짐 되는 사람, 미운 사람, 고통 주는 사람이 아픈 십자가인가요? 예수께 말하고 나서도 변함없이 그대로인가요? 그럴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강도만큼도 믿음이 없어서야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분명히 해결을 약속하시고 이길 능력도 주셨다고 하는 데 고통 속에 있다면 무엇을 믿나요?

우리에게는 소망이 넘칩니다. 십자가를 면한다는 소망인가요? 장래는 내 삶이 좋아진다는 소망인가요? 지금의 어려움이 나아질 거라는 소망인가요? 언제인가는 내 문제가 해결 될 거라고 희망하나요? 그것들은 소망의 잔가지들일뿐입니다. 그런 소원들은 다른 문제에 눌려 사라지고 맙니다. 진짜 소망은 변하지 않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내 소망입니다.

예수는 믿는 사람들에게 소망으로 오셨습니다. 이 소망은 그가 지금 분명히 내 문제를 해결한다고 약속하셨고 해결중이라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그가 소망의 도장을 찍어주시고 해결될 때까지 믿음으로 살 힘을 공급하고 계십니다. 우리 할 일은 단지 감사하며 신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소망들은 영원한 소망의 성취로 마쳐집니다.

아무리 삶이 힘들어도 여기 강도처럼 기뻐합시다. 그 감격은 십자가의 고통보다 강합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건 그 순간부터 승리자입니다. 우리는 이 소망의 능력을 받았습니다. 언제나 기도로 확인하세요. “예수여, 영원한 소망을 이루어주심을 감사합니다. 작은 소망들도 이루고 계시니 기뻐하며 기다리겠습니다. 그렇게 항상 낙원에 있겠습니다.”

QT를 위한 질문

1. 십자가에 달린 세 사람을 비교해 보세요.(서/1-3)
2. 당신은 예수를 어느 정도의 구원자로 보나요?(1/5-7)
3. 두 강도의 기도를 내 자신의 기도와 비교해 보세요.(2/3)
4. 한 강도는 무슨 일을 해서 구원 받았나요?(2/5-7)
5. 우리의 문제 해결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나요?(3/1,2)
6. 기도를 했는데도 상황이 변함없이 보이면 어떻게 하나요?(3/3,4,7)
(김기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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