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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눅 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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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의 일생을 그린 명화 '아마데우스'에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당대 최고의 음악도시였던 비엔나에 와 있던 모차르트는 오스트리아 황제가 상연금지령을 내렸던 '피가로의 결혼'이라는 프랑스 연극을 비밀리에 오페라로 작곡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늘 모차르트를 시기하고 있던 궁정음악가들이 그것을 알아내어서 황제에게 고발하자, 황제는 당장 모차르트를 왕궁으로 소환했습니다.
  황제가 궁정음악가들이 함께 앉아 있는 자리에서 모차르트를 향하여 "자네가 요즘 '피가로의 결혼'을 오페라로 만들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게 사실인가?"하고 추궁합니다.
  당황한 모차르트는 대뜸 "누가 그러던가요?"하고 반문을 합니다.
  그러자 황제는 "지금 자네는 질문을 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일세."라고 일축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섰을 때에도 그런 주객전도격의 질문만 먼저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의심하는 질문, 추궁하는 질문, 판단하는 질문 등, 마치 자기가 예수님보다 높은 사람인양 한없는 질문들만 일방적으로 던지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그런 질문에 일일이, 끝도 없이 대답만 해 주셔야 하는 분이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 앞에서도 그런 식으로 따지고 들다가 일침을 맞는 장면이 나옵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입니까? 어디서 왔습니까? 무엇하는 사람입니까?"라는 질문들을 당신을 향하여 끊임없이 해대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드디어 "이제 너희들은 더 이상 질문할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대답할 위치에 있다."라고 따끔하게 응수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을 맞이한 저와 여러분들은 이처럼 사람들에게 가까이 와 주셨던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이제 과연 우리 자신들이야말로 그 주님 앞에서 무슨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 위치에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질문만 할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이 그 대답을 양심을 따라 판단하고 신앙고백해야만 합니다.

  본문 1절부터 8절까지에 기록하기를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 대답하되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고난주간 첫날에 메시아로,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먼저 "강도의 굴혈"이 되어 있던 성전을 정화시키신 후 계속해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일을 매일 반복하셨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말하자면 일종의 진상조사위원 같은 자격으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기세도 당당하게 예수님께 추궁해 왔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내쫓았던 것, 또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시는 것에 대하여 과연 누가 그런 권위를 부여해 주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당신이 도대체 누구고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일들을 제멋대로 하고 있는 것이냐?"라고 따져왔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에 대답하시는 대신에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묻겠으니 먼저 대답해 보라"고 하시면서,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요한이 세례를 줄 때 그가 하늘로서 그 권위를 부여받고 한 것이냐 아니면 어떤 사람을 통하여 혹은 자기 혼자서 마음대로 한 것이냐?"라고 그들에게 반문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그런 예수님의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않고 "서로 의논했다"고 했습니다.
  간단한 대답도 그저 자기네들 마음에 있는 대로 솔직히 하지 못하고 함께 입을 맞추려고 사전토의를 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치밀한 정치꾼의 면모를 또 한 번 볼 수 있습니다.

  하여튼 그들이 서로 의논해 보니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실로 진퇴양난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례 줄 권리를 하늘로서 부여받았다'고 대답하면 '그러면 왜 너희들은 세례 요한을 인정하지 않았느냐?'라는 반문에 대답할 말이 없어질 것이고, 그렇다고 '그것은 사람에게서 난 것이다'라고 대답하면 세례요한을 선지자로 믿고 있는 대중들이 그들을 돌로 칠 것이 겁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은 분명히 요한의 세례가 신적 권위가 있는 것으로 믿지 않았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그저 자기 믿는 대로 대답한다면 지극히 간단할 것인데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그 대신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유리할까?'하고 이모저모 계산해 보았지만 어느 쪽으로 대답해도 난처한 입장에 몰리게 될 형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대답한다는 말이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하노라"였는데, 이것은 물론 대답이 아니라 회피일 뿐이었습니다.
  비록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말을 들으시고 아마 쓴 웃음 같은 것을 지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렇다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대답하셨던 것입니다.
  자기 양심에 따라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말도 할 줄 못하는 자들에게는, 예수님 쪽에서도 역시 자신에 대하여 일일이 설명해 줄 가치조차 느끼지 않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이미 예수님께서는 평소의 가르치심과 더불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을 통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 되시며 메시야의 자격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만천하에 공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라는 질문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무슨 권세로 성전을 정화하고 성전에서 가르치시는가"라는 질문 역시 그들 스스로 양심에 따라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고 또한 스스로 대답했어야만 할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권위로 그런 일을 하시는지 아니면 스스로 혼자 만들어낸 사람의 권위로 그런 일을 하시는지, 이 질문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은 믿든지 안 믿든지 간에 각자 스스로가 자기 양심에 따라 대답할 때가 이미 도래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전히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같은 자세를 취하고들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질문을 자기 양심 속에서 스스로 대답해 보려 하지 않고, 항상 간접적인 자세로만 그 질문을 대하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질문은 그저 신학자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토론해야 할 제목인줄로만 생각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목사가 알아서 교인들에게 잘 설명해 주어야 하는 것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는 학자들이나 예술적으로 묘사하는 작가들이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연구하고 사색할 때나 쓰이는 주제로만 알고들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질문이야말로, 우리 각자가 평생에 꼭 한번은 스스로 대답해 보아야만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교인으로서, 직분자로서 체면을 세우기 위한 계산으로 나오는 것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저 세례받기 위해서 잠시 입으로만 한번 '아멘'하고 끝나는 것이 되어서는 결코 아니 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교회나 교단의 입장을 밝히는 표어나 헌법으로 대치될 수 있는 것도 또한 절대로 아닙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반드시 자신의 양심으로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사람의 양심이 판단해야 할 가장 중대한 일생일대의 문제입니다.
  사람의 양심이 도둑질하지 않고 교통법규를 어기지 않고 남에게 거짓말하지 않고 사는 정도로 그 기능을 제대로 다 발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우리의 양심이라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고 고백하는 이 인생 최대의 결단에 바로 사용되어져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바른 대답을 하게 만들 줄 모르는 양심이라는 것은, 그 밖의 그 어떤 선하고 의로운 판단들을 이끌어낸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화인 맞은 양심'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존경한다면서 한다는 말이 기껏 '위인'이라고, '성인'이라고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묻고 계십니다.
  이제 대답해야 할 쪽은 바로 우리 각 사람 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이 분이 정말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신가 아닌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더 이상 회피하거나 미루지 아니하고, 오직 자신의 양심을 따라서 분명하고도 정확한 신앙고백으로 대답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사람은 예수님을 판단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예수 신앙 여부에 의하여 심판받게 될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9절 이하 18절까지에 기록하기를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도 상하게 하고 내어 쫓은지라 / 포도원 주인이 가로되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가로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 /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던 중에 포도원 소출 중 얼마를 받기 위해서 한 종을 그들에게 보내었습니다.
  그것은 주인으로서는 실로 당연한 요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농부들은 세를 바치기는커녕 그 종을 때리고 빈손으로 돌려보내었습니다.
  주인이 둘째, 셋째 종을 계속 파견했지만, 갈수록 그 농부들의 횡포는 더욱 심해질 따름이었습니다.
  농부들의 이와 같은 행위는 도무지 일말의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고 그야말로 천인공노할 일일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인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인내심과 자비심을 발휘했습니다.
  그 포도원은 주인은 세 번째 종까지 그런 지경을 당하고 돌아오자 "어찌할꼬"하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보통 주인 같으면 고민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아예 첫 번째 종이 그처럼 당하고 돌아왔을 때 더 이상 볼 것도 없이 그 농부들을 결딴내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이 주인은 그런 비이성적인 비인간적인 농부들을 대하면서도 '어찌하면 이 농부들을 바로 잡고 자기네들의 마땅한 본분을 지키게 할 수 있을까?'하고 고민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인은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생각을 해 내었습니다.
  '내 아들을 보내면 저희들이 설마 그는 존중하겠지.'라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상외로 그 농부들의 악함은 끝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아들을 보자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이 포도원을 아예 우리 것으로 만들자"하고 그를 포도원 밖에 끌어내어 죽였던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에는 토지소유권 증명이 오늘날처럼 명백하지는 못했던 까닭에, 임자가 불분명한 땅에서 누가 삼년 이상 농사를 짓고 살면 그 땅은 그 농부의 것으로 인정되었었습니다.
  그래서 그 농부들은 주인의 아들을 보자 주인이 그 포도원의 소유권을 이 아들에게 이양해 준 것으로 생각하고 그 아들만 죽여 버리면 그 포도원 자체를 자기네들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계산했던 것입니다.
  그 아들을 죽일 때 일부러 "포도원 밖"에서 죽인 것은, 포도원 안에서 살해할 경우 그 피로 인하여 포도원이 '부정'하게 되면 거기서 산출되는 포도 판매와 포도원의 부동산 가치가 떨어지게 될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라고 재차 질문하셨습니다.
  여러 차례 파송한 구약의 선지자들을 거부하며 박해한 그 유대인들을 두고도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어찌할꼬'하고 안타까워하시면서 결국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보내시면서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고 기대하셨습니다.
  선지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성자 하나님으로서 친히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쉽고도 확실하게 믿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보다 더 이상 표현될 길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주인께서 "마지막 날에 보내신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까지 거부하고 예루살렘 성 밖에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라고 물으셨는데, 과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대답은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리라," 즉 그 불신하는 유대인들을 심판하고 하나님의 교회운동은 '다른 사람' 즉 이방인을 중심으로 새로이 시작하시겠다는 이 주인의 처사는 그 누구의 눈에도 너무나도 정당한 것 아니었겠습니까?
  성자까지 보내셔서 어찌하든지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구원하고자 하시는 이 기가 막일 정도로 놀라운 사랑에 대하여 끝까지 거부하는 자들을 어찌 하나님께서 벌주지 않으실 수 있으며 어찌 사람들이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혹 그는 공경하리라'는 말씀은 '어쩌면 그는 공경할 수도 있겠지.'라는 뜻이 아니라 '설마 그는 공경하겠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실 때에는 더 이상 하나님 쪽에서 우리에게 베푸실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필요충분한 증거를 주셨고 당신이 우리를 위해 베푸실 수 있는 인내와 자비는 조금도 남기지 않고 다 동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실로 사람 편에서 볼 때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고 구원 얻는 일은 너무나도 쉽고도 간단한 일이 된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무슨 어려운 질문을 주신 것도 아니고 힘든 요구를 하신 것이 아니며, 우리는 이미 가르쳐주시고 보여주신 대로 그저 믿고 순종만 하면 됩니다.
  힌트 정도가 아니라 정답을 가르쳐 주셨으니 그저 받아쓰기만 하면 되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고 고백만 하면 되는 그 답을 쓰지 않으려 하는 사람, 그 답을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으시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지만 사람들의 악한 마음은 여기서도 또 한 번 고개를 쳐들게 됩니다.
  예수님의 그런 말씀을 듣고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얼마나 당연히 심판받아 마땅한 일인지는 생각지도 않고, 그저 자기네가 망하고 이방인이 구원받게 된다는 말만 듣기 싫어했던 것입니다.
  자기 죄는 인정하지 아니하고 그 대신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오히려 싫어하고 나쁜 것처럼 여기는 '가인의 속성'은 오늘날까지도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대로 유전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반발하는 자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일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고 단언하셨습니다.
  즉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그 예수님이 바로 인류 구원 역사의 '머릿돌'이 되는 일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라고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그 누구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에 대항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자 하나님 되심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에 맞서서 덤비려 하는 자들은 한 명도 예외가 없이 '깨어질'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위에 계란이 덤벼 부딪히면 자신이 깨어질 뿐인 것과 꼭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고 실로 무서운 선포를 하셨습니다.
  마지막 날 이 머릿돌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신자들을 친히 심판하실 때에는 그야말로 '가루'가 되는 철저한 멸망이 있을 뿐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자기 신앙고백의 대상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자신의 종교적 사색의 대상, 자신의 철학적 판단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종교인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과연 신이신가, 그냥 현인이신가, 아니면 종교적 광신자였는가 하는 문제가 마치 자기의 신학적 연구와 판단에 달려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장차 심판주로 이 땅에 재림하실 주님을 자기가 먼저 판단하려는, 실로 기가 막히도록 교만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재판정에 서게 된 피고인이 오히려 판사를 향하여 "당신 진짜 판사요? 정말 사법고시 합격이나 했소?"하고 따지고 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판사 앞에 선 사람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무례한 태도이며 오직 자신이 받을 벌을 더 가중시킬 수밖에 없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은 마치 자기가 예수님을 제멋대로 연구하고 판단하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처럼 착각하지만, 실상은 정반대의 위치에 있을 뿐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더 이상 분명할 수 없는 정답, 더 이상 쉬울 수 없는 길을 '아들'을 통하여 이처럼 은혜롭게 보여주셨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 예수님을 두고서 이러니저러니 하고 제멋대로 판단하고 거부하고 핍박하고 있는 바로 그런 '악한 농부'들이야말로 확실히 '꺼지지 않을 불'로 심판받게 될 자들입니다.
  각 사람은 오직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믿느냐에 따라서 영생과 영벌로 나누어지는 백보좌 심판대 앞에 자신이 서게 될 순간만 남아 있는 것을 깨닫고, 이미 우리 눈앞에 화육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믿고 분명하게 고백함으로써 장차 심판주로 재림하실 주님 앞에 두려움 없이 서게 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수퍼스타 예수 그리스도 (Jesus Christ Super Star)'라는 유명한 뮤지컬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대신에 그저 '수퍼스타' 즉 하나의 유명인사 정도로 취급하면서 그 고난주간의 생애를 록뮤직으로 엮어놓은 것입니다.
  거기에 보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언행을 곁에서 가까이 관찰하면서 자기의 판단과 어긋나는 예수님의 말씀이나 자기가 보기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예수님의 행동에 대하여 부단히 의문을 제기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역으로 나타납니다.
  그 뮤지컬에서 가룟 유다를 통하여 제기되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 당신은 과연 누구인가?'라는 것입니다.
  제일 마지막에 피날레로 나오는 유명한 곡 역시 "Jesus Christ, super star, who are you? What have you sacrificed? Oh, tell me."(예수 그리스도, 수퍼스타여,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이 희생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오, 내게 말해 주시오.)라는 가사의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시절부터 시작해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순간까지 바로 이 질문을 가지고 스스로 고개를 흔들고 고민하고 갈등하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그 뮤지컬은 결국 그 질문만 던져 놓고는 그에 대한 아무 대답은 없는 가운데 끝나게 됩니다.

  '수퍼스타 예수 그리스도'는 실상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자세를 그대로 반영해 줍니다.
  이 인류 역사에 나타난 최고의 비범한 인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하면서, 그저 아무도 확실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와 대답할 수 없는 질문만 가득 남겨 놓고 떠난 사람인양 여기는 것이, 소위 오늘날의 좀 생각이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정말 그래서는 안 됩니다.
  "예수? 흠,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하고 고개를 갸웃하고 심각히 생각해 보는 폼만 잡으면서 제 딴에는 꽤 지적인척 하는 어정쩡하고도 회피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더 이상 예수님 앞에서 '당신이 누구냐'고,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냐'고, "Oh, tell me." 따위로 물어 볼 처지에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에 대하여 이미 분명한 대답을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편에는 벌써부터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나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더 이상 대답하실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명백하게 선포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마치 그런 예수님의 대답을 못 들은 사람처럼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 수퍼스타여,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만 끊임없이 계속하는 사람은 도대체 귀가 먹은 것입니까 아니면 듣고도 못 들은 체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이 질문은 더 이상 예수님께서 대답해 주실 질문이 아니라 이제 우리 각자에게 던져져 있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 질문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 질문에 대하여 자기 스스로 대답을 해야만 하는 위치에 있을 뿐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즉 공은 이미 우리 쪽으로 넘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양심을 가지고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대답하기 어렵거나 두려운 질문이 아닙니다.
  이미 정답은 가르쳐졌고 그저 그대로 고백하기만 하면 영생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이 질문에 대한 지극히 쉽고도 간단한 대답을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고백이야말로 죄인이 구원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대답입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라고 오늘도 질문하십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정확하게 찾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고 하시며 보내신 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자신의 진실한 양심으로써 언제든지 대답하고 고백하고 증거할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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