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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십자가의 의미 (요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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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명화가 기독교사에 놀라운 영향을 준 일이 있습니다. 스텐버그의 ‘십자가’라는 그림입니다.

성 제롬 대성당 위고 신부의 요청으로 스텐버그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텐버그가 그림을 그리다 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시간을 끌어 화료를 올리기 위한 속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텐버그는 이렇게 그림을 잠시 중단한 동안 집시 여자인 페피타를 모델로 다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화실에 와 있던 모델 페피타는 초안만 잡혀있는 예수상을 보고 스텐버그에게 십자가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랐습니다. 스텐버그는 너무나 흔한 이야기라 시간낭비라고 생각했지만 소녀의 간청에 못 이겨 점심시간에 대충 들려주었습니다. 하지만 페피타는 몹시 감동하였고, 소녀는 불쑥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죽었다는 이 훌륭한 사람을 선생님도 사랑하고 계시겠지요?” 라고 묻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한마디가 스텐버그의 가슴에 꽂혀 스텐버그를 몹시 괴롭히고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정말 이 예수를 사랑하는가?’ 곰곰이 생각하고 며칠 동안 깊은 묵상에 잠긴 후에야 스텐버그는 그림을 다시 그릴 수 있었습니다. 그림이 완성된 뒤에 화대도 사양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공작 진젤돌프가 젊었을 때,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고민하며 방황하던 어느 날 제롬 대성당에 걸려 있는 스텐버그의‘십자가’ 그림을 보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상의 예수님을 한참 바라보다가 진젤돌프는 마음속에 하나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 십자가를 위해 살아야겠다.’ 십자가 그림에 감화를 받은 진젤돌프는 전 재산을 바쳐 선교회를 창립하고 모라비안 교파를 형성했습니다.

진젤돌프는 영국을 무혈혁명으로 이끌었던 존 웨슬레에게 큰 영향을 미칩니다. 존 웨슬레가 미국 선교에 실패하고 대서양을 건너오던 중 풍랑을 만나 죽음의 두려움 앞에 있을 때, 모라비안 교도들이 모여서 찬송하는 모습, 그들에게 있는 평안을 보면서 큰 도전을 받게 됩니다. 존 웨슬레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뜨거운 신앙과 전도열에 자극되어 새사람이 되었고 영국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스텐버그와 진젤돌프 공작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삶에 대한 통찰과 회개의 계기를 마련해 준 십자가에는 어떤 의미가 있기에 이토록 사람의 내면을 흔들어 놓는단 말입니까? 이들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는 모든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힘이 어디서 나온단 말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현대를 일컬어 무감동, 무감각, 무표정의 시대라고 합니다. 너무나 바쁘게 돌아가는 나머지 변하는 상황에 따라 가다 어느새 자기를 잃고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현대인은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도 삶의 기쁨과 희열을 잃고 고통과 고난이 가득한 현실 속에서 절규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어떻게 살아야 아름답고 보람된 인생, 값진 인생을 살 수 있을까?’진젤돌프와 같이 고민하고 있다면, 십자가를 가만히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진젤돌프 공작을 변화시킨 십자가라면 오늘 분명 여러분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 때문에 진젤돌프 공작의 삶이 바뀌고 영국과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그의 삶이 드려졌다면 우리 삶도 하나님께 드려져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가 살펴볼 의미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너무 오랜 방황을 하지 않으면서 인생을 바르고 의미 있게 살려면 두 가지를 반드시 정립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 십자가에서 나를 발견해야 합니다.

사람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에서 내 진실하고 분명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가끔 강의나 세미나 중에 이런 질문을 하곤 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질문에 대한 답을 총 열 다섯 가지 정도 적게 하는데 반드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덧붙입니다. ‘자기가 누구인가를 적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잘 모르겠다는 분이 계십니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손을 듭니다. 평소에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조차 사실은 자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입니다. 

반면에 성경은 사람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사람까지 포함해서 모두를 말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인간의 실존입니다.

로마서 5:6-9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라고 말씀합니다. 죄로 인한 진노로 멸망당할 상황에 있는 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현실입니다. 

위의 두 말씀은 우리가 죄인임을 정확히 가르쳐 줍니다. 죄는 자기 자신과 인생을 보는 두 개의 시선을 가립니다.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게 할뿐 아니라, 우리를 구속시키고 자유를 빼앗습니다. 아름답고 존귀한 자로서의 신분에서 노예로 전락시킵니다. 죄는 우리를 나누고 분열하는 저주를 부릅니다. 불행의 원천이며 모든 악의 씨앗인 것입니다.

죄인이 있어야 할 곳이 바로 저주의 십자가라는 형틀입니다. 십자가는 죄로 인해 저주 받고 버림받은 자를 심판하는 사형 틀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그 십자가의 고통과 저주는 죄인인 내가 져야 마땅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호산나’ 환영하며 맞이하다가 자기들의 기대와 요구에 맞지 않자 고개 돌리며 십자가에 못 박으라던 군중 속에서 나를 발견합니다. 죽음이 갈라놓기 전에는 영원히 떠나지 않고 머물겠노라 약속했건만, 죽음의 위협 앞에 다 흩어져 도망간 제자들 속에서도 역시 나를 발견합니다. 어린 계집아이가 한 말 한마디 앞에 자기 선생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던 베드로의 모습이 바로 내 모습임을 발견합니다.

이렇게 말씀으로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는데도 왜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소유와 신분과 가치관을 기준으로 자기 자신과 사람들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일부분일 뿐 전체는 아닙니다. 문화와 시대, 성격에 가려 죄인으로서 진정한 실체를 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나마 자신의 실체를 보게 되는 때는 고난당할 때입니다. 고난당하면서 그 동안 인격과 지식으로 위장했던 자신을 비교적 솔직하게 드러내게 됩니다. 그래서 인생의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수가 많은 것입니다.

십자가를 볼 때마다 자신의 실존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죄의 저주와 심판으로 십자가의 모진 고통과 대가를 치르고 사망으로 끝나버릴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본래 모습입니다. 십자가를 볼 때, 나를 볼 수 있습니다. 나를 볼 수 있는 사람만이 또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해야 합니다.

사랑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을 사랑하신 사랑이며, 사람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죄의 운명으로부터 건지신 사랑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사랑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의 질고와 슬픔을 대신 지고 가는 것, 우리 죄를 인하여 대신 채찍에 맞고 징계를 받는 것 등 한 장면 한 장면 모두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임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하나님께 버림받고 벌 받는다 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합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는 아들의 모습을 외면하면서까지 사랑하신 사랑인데도 말입니다.

에베소서 5장 2절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을 버리셨습니다. 그것도 가치 없는 나, 나도 포기한 나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생축으로 재물로 쪼개어지고 부서져 피를 흘리며 드려졌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1:7)”,즉 저주 받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유인이 된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구체적으로 오늘도 저와 여러분을 용서하고 또한 그 용서를 선포함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토마스 톰슨은 말합니다. ‘용서란 무엇인가? 용서는 열쇠로 문을 열고 죄수를 자유롭게 걸어 나가게 하는 것이다. 용서는 큰 글씨로 아무 빚도 없다고 쓰는 것이며, 용서는 법정에서 망치를 두드리며 무죄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용서는 너무나 높게 그리고 멀리 활을 쏘아 다시는 찾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용서는 온갖 쓰레기와 잡동사니를 밖에 버려 집을 깨끗하게 하고 정결하게 만드는 것이다. 용서는 배 안에 있는 게를 바다로 갈 수 있도록 풀어주는 것이며 정죄 받은 죄인에 대한 완전한 사면을 선언하는 것이다. 용서는 나와 씨름하고 있는 적수에 대해 목조르기를 풀어주는 것이며, 낙서가 적힌 벽을 깨끗하게 지워 완전히 새 벽으로 만드는 것이다.’

예수님이 베푸신 용서는 이러한 용서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포기할 수 없고 중단할 수 없습니다. 낙심의 자리에서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주저앉아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망연자실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인생의 궤도를 바꾸고 목표를 수정하며 의미를 분명하게 정립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죄인으로서 가치 없는 자에게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선물을 주시고자, 환산할 수 없는 값을 치르고 계신 주님을 발견하기에 그 사랑의 높이와 넓이와 깊이를 느낍니다. 십자가는 바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원래 내 모습입니다. 죄와 저주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깨닫게 해줍니다. 동시에 그 모든 것을 대신 짊어지시고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다시 결단할 수 있고,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도 믿을 수 있습니다. 수치와 조롱과 고통 그리고 억울함과 배신당함이 나를 위한 것이기에,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주간 다른 것 보지 마시고 십자가 앞에서 묵묵히 자신을 살펴보는 시간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무엇을 보기 원하십니까? 저 십자가와 나와는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질문하십시오.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의 실존을 볼 수 있도록, 그러한 자신을 사랑하셨던 하나님 사랑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낄 수 있도록 이 한 주간을 하나님 앞에 구별하여 드리지 않으시겠습니까? 

자기 실체와 하나님 사랑을 발견함으로 인생을 새로이 정립하며 하나님 역사에 큰 획을 그었던 진젤돌프처럼, 오늘 나를 하나님의 역사무대에 세우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초청을 받아들이며 십자가 앞에서 결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형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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