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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왕의 입성 (마 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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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부활절 전 주일을 종려주일로 지킨다. 그렇다면 왜 부활절 한 주 전을 종려주일이라 부르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
1)유래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가실 때 따르는 무리들이 환호하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꺽어 가시는 길에 깔아 놓기도 하고 흔들기도 한데서 유래한다. 종려나무는 야자수과에 속하는 식물로 승리와 번영을 상징하는 나무였다.

2)의미 - 오늘 본문의 제목대로 “왕의 입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는 것을 “왕의 입성”이라고 부르는가? 그 이유는 두 가지 면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첫째는 예수님의 입성이 왕의 신분으로서의 입성이라는 것과 두 번째로는 장소적인 면에서 예수님의 사역의 궁극적 목적을 이뤄야 할 곳이기 때문이다.

당시에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로마의 속국이었고, 이방인인 헤롯이 유대의 왕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실권은 로마 황제 가이사나 헤롯이 쥐고 있었으나 유대인들은 그들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그들에게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가져다 줄 다윗과 같은 강력한 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 속에서 예수께서 유대땅 베들레헴에 탄생하셨다.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을 왕의 탄생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의 시작에서 왕의 족보를 소개하고 있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그 왕의 혈통을 타고 나신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오신 목적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했다.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그러나 왕의 입성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예수님은 어린 나귀에 타셨고, 환호하는 무리는 고관대작도 왕의 근위대원도 아닌 갈릴리 시골 사람들과 어린아이들이었다. 군악대의 팡파래도 없었고, 군중들의 함성도 없었다. 코미디의 한 장면과도 같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날의 입성은 하나님의 구원사적 입장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만약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없었다면 인류 구원의 역사도, 성경 예언의 성취도 이뤄질 수 없었을 것이다.

세례 요한 -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한 주간을 남겨 놓은 시점에서 예루살렘성으로의 입성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루살렘에서의 죽음에 대하여 이미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말씀하셨다.

마20:17-19,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인간적인 입장에서는 예루살렘성은 피하고 싶은 도성이다. 어느 누가 자기가 죽을 성을 향하여 자기 발로 찾아 들어가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을 이뤄야 할 사명이 있었기에 피하지 않으셨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입성 과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입성 과정은 그분이 다스릴 나라의 성격이 잘 드러나고 있다.


1.친히 준비하신 입성이었다(1-3, 6-7)
대통령 취임식을 하려면 정부는 대통령 취임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각 분과별로 계획하고 행사를 추진해 나간다. 취임식 당일날이 되면 대통령은 연미복을 입고 비서들의 인도를 받아 식장으로 가면 된다. 대통령이 자신이 탈 승용차를 걱정 않해도 된다.

오늘 본문에 보면 왕이신 예수께서 직접 입성하실 짐승을 준비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요즘 말로 하면 취임식장에 타고 갈 승용차를 직접 임대하는 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에쿠스나 체어맨과 같은 최고급 승용차가 아닌 구형 포니나 아니면 소형 티코로 취임식장에 가시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지구상에 지금껏 존재하고 있는 나라 중에 왕이 스스로 대관식을 준비하는 경우는 없다.

예수님께서는 입성을 위해 나귀를 얻으려고 제자들을 건너편 마을로 보내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건너편 마을로 갔을 때 나귀 주인은 순순히 나귀를 풀어 주었다. 나귀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하여 전혀 언급이 없다.

그러나 그의 작은 섬김이 주의 입성을 위한 위대한 사역에 쓰임 받은 것이다. 나귀 주인의 헌신을 통해서 일단 입성을 위한 준비는 끝이 났다. 만왕의 왕되신 예수님의 입성 준비가 이렇게 간단하고 손쉬웠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그분의 삶 자체였다

왕이신 예수님은 두 벌 옷도 없으셨고,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가난하지 않으셨다. 주의 뜻을 이루시고자 할 때는 헌신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나귀 주인은 두말 않고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실 때 풀어 놓았고, 마리아는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 옥합을 아낌 없이 깨뜨려 예수님의 장사를 예비하였고, 예루살렘 성에 사는 어떤 사람은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기 위해 자신의 다락방을 주저 없이 제공하였다.

입성을 위한 준비는 복잡하지도 무겁지도 않았다. 주께서 친히 주관하셨고 그 목적을 위해 제자들은 이유 불문하고 순종하였고, 나귀의 주인이 헌신하므로 은혜롭게 마치게 되었다.

기독교 2천년의 역사는 순종과 헌신의 역사다. 세상 어느 곳에서든지 아름다운 믿음의 역사를 이룬 곳에는 반드시 주를 따르는 성도들의 순종과 헌신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여러분을 만날 때마다 행복하다. 그리고 감사하다. 주변에 잘 지어진 교회들도 많은데 이 누추한 상가 2층에 주일이면 꾸역꾸역 모여들어 빈 자리를 다 채우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감사한 것이다. 일종의 섬김과 희생이라고 본다.

그러나 세상에서의 행사는 불필요한 것으로 가득차 있다. 초청인사도 많고, 이벤트도 많고, 순서는 복잡하다. 식전 행사, 식중 행사, 식후 행사등등. 또 그것으로 인해 말도 많고 탈도 많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신분과 인격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급스럽고 화려한 곳. 비싼 곳을 찾는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순 검소한 것이 성경적이다. 예수께서 그렇게 살았고, 사도 바울도 그렇게 살았고,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다. 그들은 부르심의 상을 위해서 달려가기 위해 복잡하고 얽매이기 쉬운 것들을 정리했다.

나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재물이나 재능이나 시간이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주께서 “쓰시겠다”고 요구하신다면 기꺼이 드릴 수 있는 용기 있는 성도들이 되기 바란다. 진정 주를 만난 사람들이라면 그런 일들로 인해 고민에 빠지진 않을 것이다. 도리어 큰 기쁨과 감사가 될 것이다.


2.겸손의 왕으로서의 입성이었다.
그는 어린 나귀를 타셨다. 왕은 어린 나귀를 타지 않는다. 그 이유를 마태는 선지자 스가랴의 글을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마1:4-5,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세상 나라에서 왕의 대관식은 화려하고 거창하다. 폭군이고 무능력한 왕일 수록 치장하고 꾸미는 일에 신경을 쓴다. 노대통령 취임 기간 중에 칭찬할 것이 하나 있다. 정관계의 권위주의적 자세를 깨뜨린 것이다. 힘 있는 자의 교만과 횡포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는가? 사람들은 변한다. 자기를 높이기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다. 많이 가지면 교만해지고 대접받으려고 한다.

어느 신학교의 존경받는 교수님이 제자의 선교사 파송식에 초대를 받았다, 자동차로 5시간 이상 먼거리의 도시의 파송식에 참석했으나 그 교수님에게 아무런 순서가 맡겨지지 않았다. 함께 간 제자들이 분노했다. 그 때 교수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같은 사람이 이 영광스러운 예배에 참석하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네.”

막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왕의 권위로 백성들을 누르고, 착취하는 권세자가 아니라 낮아지셔서 겸손히 섬기는 자로 오셨다. 섬기는 자는 나귀를 타는 것이 어울린다.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은 말을 탄다. 새끼 나귀를 타지 않는다. 세상의 군왕과 장군은 말을 타지만 섬김의 왕은 말을 타지 않는다. 나귀는 겸손과 평화의 상징이기 때문에 교만하고 대접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탈 수가 없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했던 이유도 세속적인 메시야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자신들의 메시야는 갈릴리 출신이어서는 안되고, 새끼 나귀를 탄 초라한 모습의 메시야가 되어서도 안되었다. 다윗과 같은 강력한 힘을 지닌 왕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실 구주로 보내신 왕은 본질적으로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셨다. 아무리 대단한 권능으로 기적을 베풀고, 감화력 있는 메시지로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해도 겸손하고 온유하지 않다면 그는 메시야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성도들도 역시 겸손해야 한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다 해도 자신의 몸을 희생해서 구제한다 해도 겸손치 않으면 주의 제자가 아니다.

약4:6,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겸손의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 그 분이 진정 인류의 참된 왕이 되신다.


3.그분의 입성은 말씀의 성취였다(4-5절).
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오늘 본문 4-5절에서 마태의 인용은 일부분이 누락되어 있는데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의 내용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1)왕이 오신다는 사실 - 누구에게 오시는가? 그의 백성 곧 이스라엘에게 임하실 것에 대하여 예언하였다.
2)왕의 정체에 대하여 - 그 왕은 어떤 왕인가? 공의로우시고,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한 분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예언하였다.
3)오시는 방법에 대하여 - 어떻게 오시는가? - 나귀 중에서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신다는 것에 대하여 예언하였다.

예수님의 입성은 이미 500년 전에 예언되었던 사건이고 그 예언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은 철저하게 말씀에 의존되어 있다. 임의로 행하시지도 않으시고, 말하시지도 않으신다. 그 분의 생애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분의 출생과 성장, 사역과 고난,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재림까지 철저하게 구약의 예언에 대한 성취로서의 삶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실 때도 항거하지 않으셨다. 검으로 대제사장 말고의 귀를 잘랐던 베드로를 책망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26:53-54,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우리의 구원도 그리스도의 말씀의 성취를 통해서 이뤄졌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나귀 새끼를 타신 모습을 생각하면서 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세밀한 계획과 섭리하심에 감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철저하게 말씀에 의존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4.예루살렘 성을 소동케 하는 입성이었다(8-11절).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가난하고 무식한 무리들과 베다니에서 은혜를 입은 성도들은 예수님의 입성에 대하여 최고의 축하를 보내 드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가시는 길에 펴드렸고, 종려나뭇가지를 꺽어 길에 펴고 흔들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소리질러 “호산나”를 외쳤다. “호산나”라는 말은 “구원하소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무리들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를 구원자로 왕으로 인정하고 기뻐 소리질렀다.

그때 예루살렘 성은 유월절 명절을 지키기 위해 사방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인해 가득차 있었다. 무리들의 외치는 소리와 나귀를 탄 예수님의 이상한 모습을 보면서 관심이 집중되었다.
- 저 사람이 도대체 누구요? 무리가 대답하였다.
- 저 분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올시다!

이 이상한 행렬은 온 성에 소동을 일으킬 만큼 관심을 불러 일으켰지만 갈릴리 사람 나사렛 예수라는 말에 사람들은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았다. 예루살렘 성 안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들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예루살렘 사람들도 예수님에 대하여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느 설교자가 갈릴리 나사렛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나사렛에서는 선지자는 커녕 선지자 비서도 한 사람 나온 적이 없었다”라고 해서 한바탕 웃은 적이 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을 철저히 무시했었다. 그리고 갈릴리 사람들 조차도 자신들에 대하여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 예)나다나엘이 빌립에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요즘에 보면 포장과 내용물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세상의 것은 포장이 화려하나 내용물은 별 볼일 없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에서는 포장은 시원찮아도 내용물은 감격적이어야 한다.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이 따른다.

예수님을 따르며 환호하던 무리들의 믿음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다. 유대교 지도자들의 회유와 압력에 그들은 쉽게 동요되어 믿음의 길에서 떠나갔다. 그들은 며칠 뒤 예수님을 못박으라고 외치던 군중에 섞여 있었다. 물론 오순절 성령강림사건 이후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의 환호가 일회성에 그쳐서는 안된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 뿐만아니라 그들을 복음의 능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담대한 믿음과 믿음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
확실하고 견고한 믿음은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나의 왕, 나의 주로 모시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예루살렘을 소동케 했던 무리들이 “구원자”로 오신 예수를 환호하는데는 성공했으나, 그 분을 왕으로 주로 모셔들이는데는 실패했다.

오늘날도 성도들이 영적생활에서 자주 넘어지고 시험에 드는 이유는 “구원자”로 오신 예수는 환호하지만 구원받은 후 “주님”, “주”로 모시는데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내가 주인의 위치에 있으면 실패한다. 예수 믿는다고 소란하지만 능력이 없어서 냄세만 피울 뿐이다. 세상을 움직이고 흔들 수 있는 확실한 증거는 그리스도가 나의 주가 되어야 한다.

종려주일의 환호가 며칠 만에 변질되는 연약한 성도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주께서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 약속의 말씀을 의지해야 한다.

요16:3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입성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요약해보면,
1)솔선수범의 모범을 보이셨고,
2)겸손의 왕이심을 보이셨고,
3)철저히 말씀에 의존하신 입성이었다.

예수님의 섬김과 겸손과 희생을 통해 구원이 우리에게 이르렀다. 구원에 대한 감사와 함께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분을 우리의 왕으로 모셔야 한다. 겸손과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던 것처럼 우리 각 자의 심령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왕이 되셔야 한다.

“나의 주, 나의 왕이 되셔서 나를 다스려 주소서. 그리고 주의 뜻을 이루는데 나를 사용해 주소서.”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요 기도가 될 수 있기 바란다. (원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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