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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Well-dying (마 27:4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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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후 4세기에 마카리우스라는 사람이 이집트에 살았습니다. 그는 사막의 성자라고 불리우는 사람입니다. 한 번은 그가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예수님이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서 힘들게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마카리우스는 예수님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주여! 그 십자가를 제게 주십시오. 제가 그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아니하시고 그저 묵묵히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힘들게 앞을 향해서 계속해서 걸어가고 계셨습니다. 마카리우스는 계속해서 예수님께 졸랐습니다.
"오, 주여! 그 십자가를 제게 주십시오. 제가 지겠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마카리우스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네가 저야 할 십자가는 저기 있느니라. 가서 너의 십자가부터 먼저 지고 내게로 오너라. 그러면 내 십자가를 주겠노라."

거기에 가니까 그가 져야 할 십자가가 놓여 있었습니다. 마카리우스는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를 지고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런데 와 보니까 예수님의 어깨에 지어져 있던 십자가가 사라졌습니다. 마카리우스는 깜짝 놀라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오, 주여! 주님의 십자가를 누가 대신 졌습니까?"

그때 예수님은 미소를 띠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네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져야 할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는 것이 곧 나를 위한 길이란다. 나의 십자가를 네가 대신 져 주는 것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진한 주님의 사랑이 담긴 십자가를 우리는 사랑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십자가는 무서운 극형의 형벌이었습니다. 가장 극악무도한 죄인들이 받아야 할 형벌이 십자가형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형은 가장 무섭고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십자가를 사랑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한없는 위로와 평안을 얻습니다.

이유는 거기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피 흘려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죽으심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십자가 자체에는 아무런 능력도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셨습니다. 군중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마27장23절 “저희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나이다.”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겨주고 자기 손을 씻었습니다. 군병들은 예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침 뱉고 무릎꿇어 유대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조롱하며 예수의 머리를 때렸습니다.
희롱을 다 한 후 다시 홍포를 벗기고 예수의 옷으로 입힌 후에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갔습니다.

해골의 곳이라는 골고다에 십자가를 세우고 거기 예수를 못 박았습니다. 탕!탕!탕! 큰 대 못이 예수님의 손을 뚫고 발을 뚫고 들어가 나무에 박혔습니다. 피가 나무에까지 박혔습니다.
채찍에 맞아 터진 살에서 흐르던 피가 엉겨서 온 몸이 붉게 피로 덥혔고 못 박힌 손과 발에서는 선홍빛 뜨거운 피가 흘러내립니다.

지나가던 자들은 예수를 모욕하여 말하기를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 내려오라’고 조롱합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도 함께 희롱하여 말합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희롱합니다.
심지어는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예수님을 조롱하며 욕합니다.

온 세상이 캄캄해졌습니다. 그 어두움은 몇시간 계속되다가 제구시쯤 되어 예수께서 크게 소리를 지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엘리엘리 라마 사막다니”
그리고 예수님의 영혼이 떠나 숨을 거두시었습니다.

주님이 당하신 고난, 십자가의 죽으심은 무엇 때문입니까?
누구를 위한 고난입니까? 누구를 위한 십자가의 피 흘리심 입니까?

이사야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4-5)

오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주일입니다. 이번 주는 사순절의 가장 중요한 주간입니다. 예수님이 구체적으로 고난을 당하신 주간이며 죽으심과 무덤의 어두움을 지난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 고난주간 동안 더욱 주님의 당하신 고난을 묵상하며 주님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의 고난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지내는 한 주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보여주신 십자가의 희생과 헌신적인 사랑을 우리도 실천해보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고난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죄의 용서와 사함을 얻는 길은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의 삽자가의 길 밖에는 없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가 많아도 돈이 많아도 건강해도 존경받는 삶을 살아도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구원은 죄의 값을 치르는 속죄의 희생제물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주님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의 희생제물이 되어주셨습니다. 아무 죄도 없고 흠도 없는 그분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요 은혜입니다.

생명을 드리는 희생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의 구원은 한 생명의 고귀한 희생으로 이루어진 선물입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으로 족합니다. 심판과 멸망에서 건져 생명을 얻게 해주셨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엇입니까? 생명을 얻은 것 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내게 없는 것을 보면서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은 것 때문에 속상해 하고 하나님을 불신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세상에 부수적인 것들 때문에 속상해하고 불평 원망하지 마십시오.
십자가의 그 사랑과 구원의 은총이 가장 큰 축복임을 다시금 고백하고 더욱 십자가의 사랑에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요즘 사람들은 웰빙을 위하여 많은 시간과 물질을 투자합니다. 잘 먹고 잘사는 법이 인기리에 방영되면서 사람들은 보다 질 높은 삶을 추구하며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웰빙의 바람이 이제는 웰다잉이라는 것으로 불고 있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웰빙을 넘어서서 웰 다잉을 말하고 있습니다. 참 바람직하고 좋은 현상입니다. 웰빙이 잘사는 것이라면 웰 다잉은 잘 죽는 것입니다.  언젠가 신문을 보다가 사설에 윌빙과 웰다잉에 대한 기사가 쓰여있는 것을 읽었습니다. 내용은 웰다잉이 진정 웰빙을 가능하게 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웰 다잉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죽음이 두려워하고 멀리해야할 것이 아니라 친숙하게 받아들이고 가까이 해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삶과 죽음은 같이 있는 것입니다.

깊은 영성의 사람 헨리 나우엔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어느 순간이고 죽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우리는 또한 어느 순간이고 살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보다 잘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죽을 때에는 인간적인 모든 조건들 돈 명예 지위 모두 땅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죽음이란 것은 우리에게 부질없는 것과 우리가 진정으로 찾아야 할 것들을 가르쳐주며 우리를 참된 것으로 되돌려 주는 기회입니다.
우리는 아직 그 철저한 죽음의 자리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내세워야 할 것들이 많고, 시시비비를 가려 저울질해야 할 것들이 많고, 아직 교만하여 자기를 꺾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웰 다잉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웰빙이나 웰 다잉은 모두 자기 중심적인 것입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들에게 말하려고 하는 웰다잉은 자기 중심적이지 않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웰빙과 웰다잉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세상이 말하는 것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독교적인 정신을 가지고 웰빙을 말하고 웰다잉을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이 너무 이기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자기만을 생각합니다. 나만 잘 먹고 잘살면 된다는 이기적인 생각이 세상을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문화는 모두 자기중심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세상의 이기주의적인 문화를 극복하고 기독교적인 문화를 세상에 펼쳐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웰다잉의 삶입니다. 잘 죽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기를 위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참 받아드리기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는가?
왜 무거운 짐을 자꾸 지우려는 것인가? 그리고 짜증스러워하고 불평하며 말합니다.

나를 위하지 않는 삶, not for self 이것은 기독교의 정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며 삶이었습니다.
돈벌어서 남 주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공부해서 남 주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삼류인생 싸구려 인생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지 않는 하나님을 위하는 삶, 교회를 위하는 삶, 이웃을 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웰 다잉입니다.

웰다잉의 구체적인 모델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도 그분이 걸었던 웰 다잉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죽고자하는 자는 살 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니라.”

기독교적인 웰다잉은 육체적인 죽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인 것과 믿음의 모든 것들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입니다.

내가 죽지 않아서 가정이 병들과 아내가 절망하고 자녀들이 어둠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죽지 않아서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목회자의 마음에 못을 박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입니다.
내가 죽지 않았기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의 교만이 죽고, 나의 아집이 죽고, 나의 이기심이 죽고, 나의 못난 자아가 죽어서 다른 사람들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잘 죽으면 잘 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웰다잉의 삶을 사셨던 예수님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이해하고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도 다 내가 죽으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죽지 않았기에 분을 품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신 것은 웰 다잉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가장 아름다운 죽음입니다.
자기를 죽임으로 모든 사람을 살리신 웰 다잉인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아직 우리에게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살아가야 할 날이 많이 있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이 길게 늘어져 있다고 생각하기에 정작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 꼭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거나 간과하고 지내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날이, 그 시간이 이제 며칠 아니 몇 시간 후로 임박했다고 생각했을 때 나에게 남은 이 짧은 시간에 내가 꼭 해야 할 일,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들입니다.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신 바울은 아예 자기 자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하고 자신의 죽음에 대해 임박한 의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죽음과 함께 하는 그의 삶은 그를 가장 치열하게 살게 만들고 가장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게 만들었습니다.

웰 다잉! 그것은 예수님의 삶이였고 사도 바울과 모든 제자들의 삶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웰다잉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계절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은 웰다잉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거하는 모든 자리에서 웰다잉을 실천하십시오.
웰다잉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웰빙이 이루어지도록 멋있는 예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6년 4월9일 주일낮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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