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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절망의 돌덩이 옮기기 (막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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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진 어깨, 총기를 잃은 눈, 두려워서 포기하고, 난 할수 없다고 부정하고, 움추려 들고, 깊이 숨어버린 가슴들을 언제 어디서나 만나기 쉬운 세상입니다. 우리들도 그 중에 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불러내어, 결정적으로 "다시 시작"을 말하는 것이 부활절입니다. 다시 용기를 주는 것이 부활하신 주님의 날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참 행복을 원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는 참 행복을 찾지 못하고 오히려 고통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고작 찾았다고 생각한 행복이 일시적인 쾌락이고 일시적인 즐거움에 불과했음을 깨닫는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행복대신에 감당하기 쉽지 않은 절망의 무게를 가진 돌덩어리들이 우리가 사는 인생사 속에 수 없이 많습니다. 가정의 문제, 건강의 문제, 경제의 문제, 직장의 문제, 학원의 문제, 군대의 문제, 장래문제, 정신문제, 환경문제 등으로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신과 의사는 현대인의 70%가 정신적으로 입원해야할 수준에 놓여 있다고 했습니다.

  누가 이 고통과 절망의 돌덩이를 들어올려 줄 수 있겠습니까?
물을 떠난 고기가 살 수 없는 것처럼, 흙을 떠난 나무가 생존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 없이는 결코 이 절망의 돌덩리가 들어올려지거나 옮겨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이 절망의 돌덩어리를 옮겨보려는 인간의 시도가 없지 않았습니다. 그런 시도는 끊임이 없었고 지금도 꽤나 진지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시도해온 이런 문제해결 방법엔 진정한 평안과 안식이 없었습니다. 하나의 문제는 해결될지 모르지만 또다른 문제로 인해서 휴유증에 시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최고의 지성이라고 하는 대학교에서 대학총장이 개학식에 삶은 돼지 머리에 절을 하고 고사를 지냅니다. 그리고 줄줄이 교수들과 학생들을 참여하도록 강요합니다. 현대기술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는 고급자동차를 사서는 길거리에 세워놓고 고사를 지냅니다. 최첨단 비행기를 수입해 와서는 사고 없이 해 달라고 돼지 머리 차려놓고 고사를 지냅니다. 그런다고 사고가 없어집니까? 귀신을 불러들였으니 오히려 더 사고가 끊이질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귀신은 영적 도적놈이여서 도적이 온 것은 빼앗고 죽이려고 온 것이지 결코 돕고자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신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고 풍성히 더 얻게 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은 무의미하며 허무하고 허탈하고 허망할 뿐입니다.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인 질병 그리고 영혼의 요동에 시달리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환경의 저주 속에서 방황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대안은 살리려고 오신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셔서 길과 진리와 생명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부활의식과 부활생명과 부활정신과 부활믿음과 부활능력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무덤을 막고 있는 절망의 돌덩이를 누가 옮겨줄 수 있을까? 걱정을 태산같이 하며 여인들이 안식 후 첫날 아침 일찍 사건 현장으로 그 암훌한 무덤으로 갔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절망의 돌덩이를 옮겨줄 자를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찾는 것이라고는 기껏 운명론적인 것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주 팔자, 우상, 귀신,  온갖 피조물을 신으로 섬기면서 찾습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께서 그 사망과 절망의 돌덩이를 옮겨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들을 통해서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말씀하신 것입니다.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무겁게 짓누르고 움츠러들면 들수록 우리가 분명하게 더듬어 생각해야 하는 대목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 주님이 하신다는 것, 성령님께서 하신다는 것
  하나님이 하십니다. 주님이 하십니다. 성령께서 하십니다.  믿습니까? 아멘입니까?

  오늘 우리는 이 부활절에 절망의 돌덩이를 들어올려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인간의 그 어떤 무거운 돌덩이도 능히 들어올려주실 부활의 주님을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다 거절하고 등돌리고 지레 포기의 못을 박는 것을 정당한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은 절망의 돌덩이쯤에 무릎을 꿇을 수는 없습니다.  그럴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도 살아나야 합니다.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닫히고 인봉한 무덤에서 절망의 돌덩이를 옮겨주셨습니다. 여인들이 걱정하고 근심하며 누가 저 사망과 절망의 무거운 돌덩이를 옮겨줄 것인가?했던 그 돌덩이를 하나님께서 옮겨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우리들의 절망의 돌덩이도 옮겨주시리라 약속셨하십니다. 너희가 절망의 돌덩이를 옮겨줄 것을 믿느냐 하실 때, 우리가 믿음으로 "예" 할 때 그것은 바로 우리의 현실이 됩니다. 포기하기 쉽고 악수하고 지레 물러서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문을 막고 있었던 그 돌덩이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옮겨진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무덤을 막고 있는 절망의 돌덩이를 누가 옮겨줄 수 있겠습니까? 바로 부활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아무리 무거운 절망의 돌덩이도 하나님이 옮기시지 못할 돌덩이는 없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기쁨의 부활주일에 "절망의 돌덩이 옮기기"가 가능하다는 긍정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맡겼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은 절망의 돌덩이를 아버지께서 옮기실 수 있다는 긍정이며, "예" 혹은 "아멘"의 언어였던 것입니다. 또박또박 분명하게 감추임없이 긍정의 말을 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은 포기하게 하는 절망의 바위를 들어올리는 능력인 것을 믿습니다. (송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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