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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지고(至高)한 사랑 (롬 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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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본질은 사랑」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박애(博愛)정신을 강조하는 말일 수 있지만 맞는 말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서의 기자 가운데 사도 요한은 사랑을 가장 많이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역을 사랑이라는 대 주제로 엮어 내는 서사시(敍事詩)처럼 그려놓았습니다. 요한1서 4:16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속성이 사랑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사랑이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닙니다.

본질적인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일이나, 피조세계를 섭리하시며 다스리시는 근본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최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그의 구속사적인 계획도 본질적인 사랑의 표현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랑을 예찬하고 그것으로 얻는 행복을 추구하지만 가장 순수하고 가치 있는 사랑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요1서 4:10).

본문 말씀 8절에도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고난절을 앞 둔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가장 고상한 사랑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I. 최고의 가치를 지닌 사랑

사랑의 예찬론자인 솔로몬은 술람미와의 관계를 노래하면서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다”고 하였습니다(아 8:6). 곧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원형을 이렇게 소개하였습니다. 곧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3:4-7). 이렇게 고상하고 아름다운 사랑이야말로 모든 사람이 흠모하고 간직하고자 하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1) 이성적인 사랑입니다.

인간들이 그려놓은 예술이나 작품 가운데는 여자와 남자 곧 이성간에 이루어지는 사랑을 묘사한 부분이 가장 많을 것입니다.
소위 에로스(ἓρως)적인 사랑이라고 말하는데 이런 경우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면서 또 한편 뜨거운 열정과 감동을 지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남자와 여자가 연합하게 하셨고, 그 결정적인 매체는 사랑으로 이루어지게 하였습니다(창 2:20-25). 
솔로몬이 술람미를 연모하면서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노래한 것을 비추어 흔히 셰익스피어(Shakespeare)의 작품에 나오는 로미오와 줄리엣(Romea and Juliet) 같은 사랑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 외에도 영국 왕 에드워드 8세(Edward Ⅷ)같이 왕실의 법도를 어기고 신분이 낮은 여인과 사랑을 하기 위해 왕관을 벗어던진 경우를 두고 20세기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이라고 말을 합니다. 어떤 환경이나 조건 같은 것에 구애되지 않는 순수한 사랑이 아름답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2) 친구간의 우정입니다.

성경에는 간혹 사랑을 필리아(φίλια)라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요 21:16, 롬 12:10, 히 12:1). 이는 형제 또는 친구 간의 우정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된 사람끼리 하나님의 사랑을 공유하면서 서로 깊은 신뢰와 우정으로 사랑의 관계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였습니다(요 15:13).
구약시대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다윗과의 관계에서 목숨보다 더 소중한 친구의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어찌 보면 서로 정적이요 원수가 될 사람이지만 그것을 뛰어 넘어서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변치 않는 우정을 지켰습니다. 사무엘상 20:17에 보면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므로 그로 다시 맹세케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고 하였습니다.

(3) 혈육간의 사랑입니다.

희랍어로 스톨게(στρογή)라고 하는 말은 부모와 자식 또는 형제 동기간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중에도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크고 귀한 사랑입니다. 흔히 부모의 사랑, 또는 모성애를 말할 때 하늘같이 높고 바다같이 넓어 가이없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사랑을 빼고 나면 부모의 사랑을 능가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경에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할 때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비유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사야 49:15에는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Ⅱ. 모든 사랑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본문 말씀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속량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실을 두고 하나님 사랑의 극치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이 말한 하나님의 사랑, 곧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사랑(αγαπη)의 실제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확증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고난절을 맞이한 우리들은 예수 고난의 의미를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열쇠로 풀어나가야만 하겠습니다.

(1) 독생자를 보내신 성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이 성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향한 그의 섭리와 사랑은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하지만 그중에도 범죄한 인류를 속량하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신 사건이야말로 하나님 사랑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자연인의 출생과 같이 평범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여기에는 하나님의 세심한 계획과 신비로운 방법이 작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탄생하게 되는 것( Incarnation) 그 자체가 이적 중에 이적입니다. 이 사실을 두고 사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요 1:14).

(2) 희생의 제물이 되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막 10:45). 자기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희생이야말로 그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사랑의 실체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였습니다(요 15:13).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평소에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실 것과 대속의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셨지만 예사로 생각했거나 거기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마 16:21-23).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무덤에서 살아나신 부활을 목격한 다음 그들의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끌려가실 때 멀찍이 서서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는 오순절 이후 예루살렘 광장에 모인 무리들을 상대로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설명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36에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본문 말씀에서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3) 성령의 효과적인 사랑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 가운데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하신 일을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게 작용하십니다. 에베소서 1:4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7절에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13절에는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대로 성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의 사랑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고, 그 계획에 따라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우리를 죄에서 사유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그 사실을 확인하는 보증으로 인(印)을 치셨고 우리에게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하였습니다(고전 12:3). 지금도 성령은 우리 곁에서 사랑으로 항상 도우시며 보호해 주십니다. 로마서 8:26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Ⅲ.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사랑입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그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도리를 명시한 율법은 그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찾아온 유대인 랍비에게 율법의 강령을 말씀하시면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마 22:37).
오늘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동인(動因)이 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여기 대하여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 하였습니다(고후 5:14).

(1) 하나님께 대한 헌신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께 감사하고 보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로마서 12:1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내어주신 것으로 나타나졌으니 우리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헌신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것은 누가 권해서 하는 일이거나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일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사랑과 즐거움의 행위인 것입니다.

옛날 서머나 교회 감독 폴리캅(Policap)은 그를 결박하여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불을 지르기 전 ‘한 번이라도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 주겠다’는 형리의 말에 ‘내 나이 86세가 되도록 한 번도 나를 부인한 일이 없는 사랑하는 나의 주님을 내가 어찌 모른다고 하리요’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타오르는 화염 속에서도 감사의 기도를 하며 순교를 당했습니다.

(2) 이웃을 향한 봉사입니다.

요한1서 3:16에는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만찬을 베푸신 후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34-35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하였습니다. 요한1서 4:20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3) 헌신적 사랑의 행복입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많이 받는 것이 행복인줄 압니다. 물론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지고한 사랑, 곧 최고의 행복을 느끼게 하는 사랑은 받는 사랑보다 주는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여 모범을 보이셨습니다(막 10:45).

그리스도인 가운데 실제로 예수님의 삶을 따라서 섬기는 자의 길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행복의 의미를 알고 즐기는 사람입니다. 얼마 전 신문에는 「40년 봉사 접고 말없이 떠난 소록도 두 천사」의 이야기가 소개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마리안네 스퇴거(71세)와 마가레트 피사렉(70세) 두 수녀는 본국에서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각각 62년과 66년에 소록도 병원의 간호사로 와서 40년이 넘게 봉사하였습니다. 꽃다운 20대 나이에 문화와 환경이 열악한 우리나라로 찾아와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들 속에서 그들의 피고름을 만지며 상처에 약을 발라주는 등 환자들의 손과 발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곳으로부터 주겠다는 상이나, 인터뷰의 요청도 거절했으며 오스트리아 정부에서 주는 훈장까지 사양하면서 숨어서 봉사하는 손과 주님 밖에 모르는 베풂의 삶을 살았습니다. 더 이상 봉사할 수 없는 나이가 되어서 이곳을 떠날 때도 다른 사람에게 헤어지는 아픔을 주지 않기 위해 ‘부족한 외국인이 큰 사랑을 받았다’는 편지 한 장만 남겨 놓고 새벽에 몰래 떠났다고 합니다. 그들은 반세기 가깝도록 외로운 섬, 상처받은 사람들을 싸매어 주고 위로해 주면서 무한한 행복을 느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기에 그 지고한 사랑의 행복을 모든 사람과 공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손상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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