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부활주일] 예수님의 부활 나의 부활 (고전 15:20-34)

  • 잡초 잡초
  • 685
  • 0

첨부 1


들어가는 말

기독교의 특성중 대표적인 요소가 바로 “신비롭다” 는 것입니다.
그 신비로운 대표적인 주제가 바로 부활입니다. 사람이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세상의 상식과 과학적인 지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상식과 지식과 모든 인간경험을 초월하여 죽음을 이기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2천년전에 오셔서 죽음을 이기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그 부활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우리는 해마다 부활절을 구별하여 감사하며 축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이 오늘 나에게는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분명히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그 믿음으로 나와 예수님은 신비로운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임이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됩니다. 예수님의 승천과 승리가 나의 장래의 소망이 됩니다. 예수님의 적용이 나의 적용이 됩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 살아있는 우리의 입장에서 죽음 그 너머의 부활을 말하는 것은 굉장히 현실성이 없는 말처럼 들려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죽음은 저 멀리 있는 나와 관련없는 주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바로 죽음 앞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일도 우리는 기약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 미래는 나의 것이 아닙니다. 그 죽음이 나의 죽음도 될 수 있습니다.

얼마전에 46살의 인기코메디언이 운동을 하다가 졸지에 죽었습니다. 본인이 몸이 너무 뚱뚱하여 살을 빼기 위해서 운동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운동을 하여서 살도 빼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인생을 더욱 멋있게 도전하다가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여러분 그 죽음 앞에서 우리에게 의미있는 주제가 무엇일까요? 바로 부활의 소망입니다.
오늘 내가 죽어도 내가 부활하여 주와 같은 영생의 복을 살 수 있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확신과 소망이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될 수 있습니까?

1.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20절 “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라고 합니다.

먼저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선포하고 강조합니다.
정말 예수님이 부활하셨는가? 그 역사의 사실유무의 가장 중요한 근거는 증인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정말 본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바울은 먼저 15장 5-8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본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먼저 게바 베드로에게 부이셨고 후에 12명의 제자에게 보이셨고 그후에 500여명의 형제에게 보였습니다. 그중에는 태반이나 그때까지 살아 있었습니다. 그후에 야고보에게 그리고 나중에 바울에게까지 부활하신 예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바울은 언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까?

사도행전 9장에 보면 바울이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는 내용입니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데리고오려고 갑니다. 그때 사울이 다메섹이 가까이 올때 홀연히 하늘로서 소리가 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십니다. 바울이 “뉘시옵니까“ 그러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합니다. 사울이 교회를 핍박하는 것을 예수님은 자신을 핍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때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소리를 듣고 주님의 빛으로 나타나심을 보고 나서 사흘동안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이때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이렇게 직접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직접 나타나심으로 분명히 부활하셨음을 증거하셨습니다.

물론 이렇게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나타나셨음에도 불구하고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제자들 중에서 도마같은 제자는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듣고 나서도 “설마 어떻게 부활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의심하고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직접 도마에게 나타나시어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시간 먼저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때 중요한 주제가 바로 부활입니다. 고전15:3-4 보십시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시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 살아나사“라고 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특히 부활입니다. 만약에 복음 속에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고전 15장 16절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엇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가운데 있을 터이요“라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집트에 가면 큰 피라미드가 있습니다. 이 피라미드는 왕과 그 후손들의 무덤입니다.
그피라미드는 모두 돌로 만들었습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피라미드 중에 가장 큰 것은 쿠프왕의 피라미드인데 거기에 들어간 돌이 235만여개 이상입니다. 돌 하나의 무게가 2-5톤이상이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돌을 이용해서 높이가 무려 147미터가 되도록 쌓는 것입니다. 무려 한개의 피라미드를 완성하기까지 20여년이 걸리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들은 이 무덤을 신성시합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의 돌에 불과합니다. 저는 그 밑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이 돌을 이용해서 무덤을 만들다 얼마나 만은 사람들이 고통의 눈물을 흘리고 죽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왜 그렇게 거대한 무덤을 만들까요? 그들은 그 왕이 태양의 아들이기 때문에 살아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피라미드를 만들어 시체를 썩지 않게 보호하고 높게 탑을 쌓아서 하늘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거기서 살아난 왕은 없습니다 . 여러분 이집트뿐만 아니라 중국에 가도 그렇고 우리나라 경주에 가도 그렇고 사람들이 자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덤을 자랑합니다.
지금도 세상 사람들은 무덤을 자랑합니다. 무덤을 크게 꾸미고 비석을 세우고 장식을 합니다. 더 좋은 명당자리라고 하여서 좋은 곳을 찾아서 무덤을 꾸밉니다.그러나 기독교는 무덤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없습니다. 바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아무도 사람들은 살아날 수 없을까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은 누구나 죄값으로 한번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십니다.죄없으신 예수님은 죄를 이기시고 사망을 이기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을때 죄를 이깁니다.예수님을 믿을때 사망을 이깁니다. 예수님을 믿을때 죄를 이기시고 사망을 이기신 부활의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은 부활의 첫열매가 되십니다.

20절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가 되셧도다”라고 합니다.
여기 예수님은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가 되었다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열매가 되셧다는 것은 뒤에 일어날 모든 부활의 대표성을 책임지게 되는 것입니다.“첫열매”는 바로 둘쨰,세쨰 열매가 그렇게 열릴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본래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첫열매를 하나님꼐 바쳤습니다.
그것은 바로 수확한 모든 곡식이 바로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렘23:10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때에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
잠3:9“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첫 째”는 나머지 모든 것의 대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도 그와 같이 부활할 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예수님같이 육체를 입고 반드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예수님같이 신령한 몸을 입고 영체로 부활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 부활의 첫열매가 되셔야 합니까?
왜 예수님께서 번거롭게 죽으시고 부활의 첫열매가 되셔야 하는가? 그 이유를 물을 수있습니다. 21절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라고 합니다. 22절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여기에 보면 대표성의 원리입니다.
우리에게 사망이 왔습니다.
인간에게 사망은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한번 반드시 죽습니다. 그런데 내가 왜 죽어야 합니까? 여기서 바울은 “죽음”이란 것도 “사람”으로 말미암았다고 합니다.
여기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22절에서 밝힙니다. 아담입니다. 인류최초의 조상이 바로 아담입니다. 우리에게 죽음,사망이 온 것은 바로 아담 때문입니다.
본래 인간은 죽음없이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부족할 것없는 에덴동산에서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그리고 죄를 지은 대가를 치루게 된 것입니다.
그 죄의 대가로 아담에게 내려진 벌이 바로 죽음입니다.
아담안에서 우리에게 죽음이 찾아온 것입니다.그런데 하나님은 여기서 아담 한 사람이 지은 죄로 모든 인류에게 죽음이 찾아오게 하는 대표의 원리를 적용합니다.이 대표의 원리가 우리가 보기에는 불합리한 것같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제2아담되신 예수님으로 구원의 계획하심을 이미 전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담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에게 “죄가 전가”되어 사망이 찾아온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죽는 것은 바로 하나님꼐서 그렇게 하시는 행동의 증거인 것입니다.

아담안에서 인생이 지은 죄값을 지불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의 피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죄를 정하게 하기 위해서는 죄없는 피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죄없는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피를 흘리셨습니다.그리고 죽은지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아담 안에서 죽음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부활이 있다는 사실도 사실임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대표성 원리를 강조하면서 부활의 대표성 원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첫열매가 되심은 이제 우리가 예수님같이 부활할 수 있습니다.
에수님의 부활은 어떤 모습입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을때에 분명히 육체를 갖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직접 그 손을 만지고 그 몸을 만질 수 있었습니다. 영으로만 부활하신 것이 아니고 분명히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런 주님의 몸과 같이 부활할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모든 육체가 죽으면 다 썩어서 없어지는데 육체로 부활합니까?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늘에 속한 형체가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부활하면 우리가 영광의 삶을 살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썩지 않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강한 몸으로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3. 날마다 부활신앙을 갖아야 합니다.

31절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여기 바울은 지금 여기에서 날마다 부활을 경험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자랑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합니다.바울은 날마다 자신이 죽는 삶을 실천하고 있습니다.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내안에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부활하신 주님이 내안에 살고 있습니다.
바울은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왜 우리가 신앙의 감격이 없고 내 안에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습니까?
“내가 살아 있기”떄문입니다.
내가 살면 주님께서 살 수 없습니다. 내가 죽어야 주님이 살고 내 안에 모든 풍성한 영적체험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죽기까지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주님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 하에서도 감사하고 기뻐하며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나를 위하여 죽으신 에수님을 마음 속에 받아들임으로 그분의 죄에 대하여 죽으심과 생명에 대한 부활하심의 역사에 연합되어진 운명입니다.
오직 그분이 나를 주장해가야 행복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 바울처럼 모든 영적 삶에 풍성함을 누리기 위하여 날마다 자신을 죽이고 주님에 대하여 살기 바랍니다. (박춘수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