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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막달라 마리아의 슬픔과 기쁨 이야기 (요 19:25, 요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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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부활 주일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인 동시에 부활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인 동시에 부활과 영생의 종교입니다. 오늘 아침 십자가의 은혜와 부활의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구원의 축복과 영생의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또한 오늘 아침 십자가의 슬픔과 부활의 기쁨이 여러분들에게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독교는 슬픔의 종교인 동시에 기쁨의 종교입니다. 지난 금요일 아침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모임에서 고난과 슬픔의 의미에 대한 발표가 있었는데, 김성영 교수는 ‘인간의 범죄’가 ‘하나님의 슬픔’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인간의 범죄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에게 슬픔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인간의 범죄 때문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슬퍼하시며 우시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저의 말이지만,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기쁨’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인간 구원 사역의 완성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에게 기쁨을 가져다 주었을 것입니다. 인간의 구원 때문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즐거워하시고 기뻐하시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슬픔과 기쁨의 색깔로 나타납니다. 죄인들을 향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진한 사랑이 진한 슬픔과 진한 기쁨으로 나타났습니다. 인간 세계에 있어서도 사랑은 슬픔과 기쁨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크라이슬러(Fritz Kreisler)는 '사랑의 슬픔(Leibesleid)'이란 제목의 음악과 '사랑의 기쁨(Leibsfreud)'이란 제목의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는 슬픔도 기쁨도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는 사막과 같은 감정의 메마름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의 가슴에는 주님을 향한 진한 사랑이 있었고 진한 슬픔과 진한 기쁨이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 막달라 마리아의 슬픔과 기쁨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 보이시지 않았고,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 보이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막달라 마리아가 슬픔과 기쁨의 여인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슬픔과 기쁨은 성자 예수님의 존재의 모습이었고 존재의 색깔이었는데, 막달라 마리아가 바로 그 모습과 그 색깔을 가슴과 몸에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막달라 마리아의 슬픔과 기쁨의 이야기를 합니다

  첫째, 막달라 마리아는 십자가 아래서 그리고 무덤 밖에서 슬퍼하며 울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19:25).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요20:11). “천사가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13).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15). 막달라 마리아는 십자가 아래서 그리고 무덤 밖에서 슬퍼하며 울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슬퍼하며 울었을 것이고, 자기의 죄와 수많은 사람들의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그리고 무덤에 안치되는 것을 보았을 때 슬퍼하며 울었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만난 이후 그리고 주님을 따라다니고 섬기면서 주님께서 슬픔과 눈물의 주님이신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심히 슬퍼하시며” 우신 것도(막14:33) 알았을 것이고,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신” 것도(눅19:41) 알았을 것이고, 나사로 죽었을 때 눈물을 흘리며 우신 일도 알았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가슴과 몸과 영혼에 깊이 맺혀 있는 고통과 슬픔을 보았을 때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주님과 함께 통곡하며 울었을 것입니다. 금요일 제 육시 즉 정오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리시고 통곡하며 우시는 것을 육감적으로 느꼈을 때 막달라 마리아도 통곡하며 함께 울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 죄인들이 묻히는 무덤에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묻히는 것을 보았을 때 막달라 마리아는 너무나 기가 막혀서 통곡하며 울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누구에게 나타나 보이시기를 원하셨겠습니까? 십자가를 등지고 도망간 열 제자들이었겠습니까? 무덤에 잠깐 왔다가 집으로 돌아간 베드로와 요한이었겠습니까? 막달라 마리아 밖에는 없었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십자가 아래서 울고 있었고, 금요일 저녁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고, 일요일 새벽 베드로와 요한 두 제자들이 왔다가 떠난 후 무덤 밖에서 슬퍼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나타나 보이시기를 원하셨던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 밖에는 없었을 것입니다.

  둘째,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의 소식을 듣고 너무너무 기뻐했습니다.
  마28:5 이하를 읽습니다.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 쌔”(마28:8). 아직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전이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조금 후에 만나게 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막달라 마리아가 먼저 만나고 조금 후에 다른 여자들이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전이었습니다. 천사의 말만을 들었을 뿐이었습니다. “너희는 무서워 말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그런데도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은 천사들이 전하는 부활의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뻐서 달음질을 했다고 했습니다. 아직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전인데도 말입니다.

  천사들이 전하는 기쁜 소식을 듣고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마음과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서 열려져 있는 복된 사람입니다. 예수님 탄생의 기쁜 소식을 듣고 기뻐한 사람들이 있었고 예수님 부활의 소식을 듣고 기뻐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어머니 뱃속에서 아기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기뻐서 뛰놀았다고 했습니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눅1:44). 들에서 양치던 목자들은 천사들이 전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마리아와 아기 예수님께 달려갔습니다. 아브라함은 메시야가 오실 것을 내다보며 즐거워하고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56).

  막달라 마리아는 천사의 소리를 듣는 순간 자기가 너무너무 사랑하던 예수님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어서 기뻐했고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완성되는 것을 믿고 바라보면서 기뻐했을 것입니다. 옛날 아브라함과 다윗과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며 기뻐했던 것처럼 지금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완성되는 것을 믿고 바라보며 기뻐했을 것입니다.

  결국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일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 보이셨습니다. 슬픔과 기쁨에 쌓여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슬픔과 기쁨의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뜻이라”(요20:16). 막달라 마리아는 너무 기뻐서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자기를 붙잡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제는 붙잡지 않아도 마리아와 함께 계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육체나 시공간에 매이지 않고 언제나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리아는 그 때 세상에서 아니 우주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이 되었고 가장 축복받은 여인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난 여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가슴에는 주님을 향한 진한 사랑이 있었고 주님을 향한 진한 슬픔과 진한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의 메시지를 전하는 첫 번째 증인이 되었습니다.
  진한 슬픔과 진한 기쁨은 삶의 활력소가 됩니다. 슬픔과 기쁨을 지닌 여인 막달라 마리아는 그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집에 가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달음질해서 달려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뛰어가서 소리를 지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자기에게 전하라고 분부하신 부활의 메시지를 가지고 가서 두려움과 의심과 불안에 쌓여 있던 제자들에게 힘 있게 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서 전할 부활의 메시지를 만들어주셨습니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20:17). 마28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마28:10).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지시를 받자마자 즉시 달음질해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분부하신 메시지를 그대로 전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요20:18).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의 메시지를 전한 첫 번째 증인이 되었습니다. 사도들이 전하였어야 할 부활의 메시지를 막달라 마리아가 전한 것이었습니다. 영광스런 부활의 아침 막달라 마리아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이 되었고 가장 축복받은 여인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여성 사역의 정당성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와 은사를 주시면 여성도 얼마든지 안수를 받아 설교 사역도 전도 사역도 목회 사역도 선교 사역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막달라 마리아의 슬픔과 기쁨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슬픔과 기쁨은 성자 예수님의 존재의 모습이었고 존재의 색깔이었는데, 막달라 마리아가 바로 그 모습과 그 색깔을 가슴과 몸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주님과 통하는 것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는 제일 먼저 주님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자기의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의 부드러운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다시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주님의 분부에 따라 달려가서 주님의 부활의 소식을 제일 먼저 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을 진하고 뜨겁게 주님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과 함께 슬퍼하고 주님과 함께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사랑하는 주님을 날마다의 삶에서 다시 또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분부를 따라 온 세상에 달려가서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온 몸으로 힘있게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셨던 부활의 기쁨과 축복을 여러분들에게 모두 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김명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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