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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의 주님을 만난 자의 변화 (요 20: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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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인 실제적 사건이라고 믿으십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완전히 변화된 세 그룹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오늘은 본문을 중심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자의 변화”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1.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슬픔이 사라집니다.

눅23:27절에 보면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고 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이름은 밝히지는 않았지만 “가슴을 치며 슬퍼하는 여자들의 큰 무리”속에 막달라 마리아가 끼어 있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사흘 전에 예수님을 장례하는 그 자리에서 무척이나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해가 기울면 안식일이 시작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시체를 십자가에서 내려 장사할 수 있는 시간이 불과 한두 시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와 또 몇몇 여인네들이 서로 손을 모아 죽은 예수님의 몸을 씻기고, 향료를 그 몸에 덮고, 베옷을 감고 하는 이런 절차를 다 끝내는 데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습니다.

여러분, 그들이 얼마나 서둘러 장사를 지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했던 마리아는 마음의 상처를 안고 집으로 돌아간 그는 사흘째 되는 날 이른 아침에 향유를 들고 무덤으로 달려왔습니다.
왜냐하면 장사 지낼 때 좀 미비했다 싶은 부분을 자기 혼자라도 가서 어떻게 해보려고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 앞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시체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간장이 녹아 내리는 것 같은 슬픔을 눈물로 씻어 내며 울고”있던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 오셔서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마리아가 “당신이 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갔으면 어디 있는지 가르쳐 주세요. 내가 가서 다시 가지고 오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마리아야”하고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평소에 자주 듣던 주님의 그 음성이었습니다.

여러분! “마리아야”하고 부르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마리아의 표정이 어떻게 변했을까요? 그리고 그가 어떤 식으로 반응을 했을까요?
우리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대강 그려볼 수는 있습니다.
슬픔이 가득하던 마리아의 얼굴이 기쁨으로 활짝 피었을 것이고, 눈물을 흘리던 그 눈에는 기쁨이 충만하여 광채가 났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가운데 슬픔을 씻어 버리고 세상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생 그 자체가 눈물이요, 슬픔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겉으로는 웃지만 우리의 가슴에는 슬픔과 눈물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이 표현했듯이 낮에도 슬픔과 걱정에 싸인 채 살아야 하고, 밤에조차 쉬지 못하고 괴로워 몸부림치는 것이 우리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마리아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그분의 음성을 들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2.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공포가 사라집니다.

본문에서 열 명의 제자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던 것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지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한참 인기를 얻고, 많은 사람들이 환호할 때는 제자들도 우쭐거렸고, 기분도 좋았고, 두려움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선생님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들은 자신감과 용기를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공포 분위기가 제자들의 주변을 점점 조여들어 “선생님도 저렇게 비참하게 죽이는데 제자인 우리를 가만 두겠느냐”는 생각이 들자 말할 수 없는 공포감이 밀려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방문을 걸어 잠근 채 두문 불출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와 “샬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살아 계신 주님이 눈앞에 서 계시고, 그분이 “샬롬”하시는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은 “샬롬”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는 유령이 아니다. 내 손과 내 옆구리를 보라”하시며 자기가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래도 제자들이 의심하는 것 같으니까 “너희에게 먹을 것이 없느냐? 가지고 와 보라”고 하시고는 제자들 앞에서 음식을 잡수기까지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하신 몸인 것을 제자들에게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소명을 주셨습니다.

2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보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다시 말해서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으로 보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들을 영적으로 무장시켜 주셨습니다.
22-2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나가서 하나님의 용서를 외치면 그들이 믿는 자는 용서를 받을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도 받지 아니하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결과 제자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며 고문하던 공포가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고 담대해졌습니다. 평안 이 찾아왔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인생을 산다는 것은 어떤 면에선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세상은 정말 무서운 곳입니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마음속에 은근한 공포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본능적인 공포가 있습니다.
그리고 공포가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욥3:25절을 보면 욥 같은 위대한 사람도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라고 고백했습니다.
당시에 욥은 십 남매를 거느리고 누가 보아도 부러워할 만한 위치에 있는 동양의 최대 갑부요, 인격자요, 지도자였으며 성공자였습니다.
그러나 욥이 이렇게 형통한 삶을 살 때에도 그의 마음속에는 항상 두려워하는 무엇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던 그것이 갑자기 현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두려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부활 주일을 통해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여 오늘도 살아 계시고, 나와 함께 인생을 걸어가시는 주님을 만나면 우리도 그 모든 공포를 쫓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11:25절을 보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질병의 공포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죽음의 공포에서 우리를 완전히 해방시켜 주십니다.
오늘 부활하신 주님은 “어떻게 살까, 앞날이 어떻게 될까”하는 불안 때문에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의 마음에 평안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요16:33절을 보면 주님은 우리의 삶을 인정하시며 “세상에서는 너희가 고통도 당할 수 있고, 실패 할 수 도 있고, 핍박당할 수도 있고, 또 어떤 때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공포에 짓눌려 고생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 모든 상황에도 담대할 수 있는 한가지 이유는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고, 죽음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의 보호자가 되시고,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며 날마다 우리와 만나 주시는 사람이 된 이상, 우리는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 좌절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샬롬. 평안이 있을 지어다”하시는 주의 음성을 우리가 말씀을 통해 날마다 듣었다면, 목사의 설교를 듣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이제는 그 음성을 여러분 자신의 마음에서,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날마다 체험되는 사건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3.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의심이 사라진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도마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열 명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도마는 무슨 일로 나갔는지 나가고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고 떠들어댔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해 볼 때 도마가 “왜 예수님은 하필 내가 없을 때 찾아오셨지?”하는 섭섭한 생각에 기분이 좀 상해서 그것 때문에 약간의 거부 반응이 생긴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도마는 자기가 만든 나름대로의 잣대를 가지고 이 잣대에 딱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자기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노라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 잣대가 무엇입니까?
25절을 읽겠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집어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이것은 회의주의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리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일수록 회의주의자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상에 있는 것들 중에 앞뒤가 맞아떨어지는 것이 얼마나 됩니까?
이 세상에서 공식을 가지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극히 드뭅니다.
더욱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자신의 몸을 600여명의 사람들에게만 보이시고, 그 다음에는 아무에게도 보이시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은 예수님을 본 사람들에게 가서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들의 말을 듣고 믿게 하신 것입니다.

31절을 읽겠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신 몸으로 일일이 개인마다 찾아다니며, 보여 주시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의 말을 듣고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나름의 합리적인 잣대를 고집하며, 믿기를 거부한다면 그는 구원받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의심을 가지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도마처럼 예수님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도마는 28절에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도마에게 27절에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도마는 그때부터 믿음의 사람이 되었고, 결국은 수십 년 후 에 인도에 가서 복음을 외치다가 순교하는 자리까지 갔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부활의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살아 계신 주님과 만나지 못하여 날마다 자신이 변화되는 모습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 모두 날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납시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면 우리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됩니다.
공포가 사라지고 마음에 용기가 생기고, 평안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런 은혜를 체험하면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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