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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도마의 부활 신앙 (요 20:19-29, 시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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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한 주간 새벽마다 교회에 모여서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전날인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사흘째 되는 안식일후 첫날, 즉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부활주일로 한국 교회가 지키는 것입니다. 새벽 미명에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 드리기 위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막달라 마리아는 뜻밖에도 예수님의 무덤에 굳게 닫혔던 돌무덤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그래서 불안한 마음을 안고 다락방으로 달려가 베드로와 요한 등에게 달려가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고 전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급한 걸음으로 달려가 무덤을 확인하니 과연 무덤은 비어있고, 발치에 세마포와 머리에 쌓던 수건이 함께 개켜져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너무 놀라 울며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그 안에 두 천사가 앉아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시면서 “너는 가서 내 형제들에게 내가 부활한 것을 전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럼으로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첫 번째 증인이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막달라 마리아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오늘 본문 19절에서 그 날이 바로 “안식 후 첫날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9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날 곧 안식 후 첫 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안식 후 첫날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첫날, 오늘의 주일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실 때 처형의 현장에도 가지 못하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떨고 있을 때였습니다. 왜입니까?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인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제자였던 자기들에게도 위해(危害)를 가할까 겁을 먹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예 문을 굳게 닫아 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1.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축복하셨습니다. 두려워 떠는 제자들 가운데 서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문을 부수고 들어오신 것도 아니고, 누가 문을 열어 드린 것도 아닌데 지금 그들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눅24:37절에 보면 제자들이 너무 놀라 영으로 생각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귀신인 줄 알았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는데 제자들은 아마도 질겁했을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아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24:38-39) 귀신은 몸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분명히 손과 발이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시지 않고 그대로 들어오셨을까요? 문이 닫혔음에도 그대로 들어오실 수 있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은 시공을 초월할 수 있는 분만 가능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실 수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시공을 초월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한 마디로 샬롬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0절에 “...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그제야 제자들은 주님께서 부활하심을 확신하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때에 다시금 주님께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축복하십니다. 21절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6절에도 또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축복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인사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제일 먼저 주기를 원하셨던 것이 평안이었음을 뜻합니다. 두려움과 불신과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바로 평강입니다. 참신앙의 사람이 누구입니까? 어떤 상황 속에서도 평강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 평강의 원천은 누구십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성자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을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함께 하고 계시는데 어떤 상황에선들 어찌 평강이 넘치지 않겠습니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께서 지금 내 앞에, 우리 가운데 계시는데 우리의 평강을 앗아갈 상황이 어찌 이 세상에 존재할 수가 있겠습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데 어찌 그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믿는 내가 어떤 상황에서건 평강의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바울사도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빌4:6,7절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누가 평안 할 수 있습니까? 주님께 맡기는 사람이 평안한 것입니다. 부디 주님의 평강이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강은 세상에서 얻는 것과 다릅니다. 그러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마시기를 바랍니다.(요14:27)

2. 도마의 처음 신앙과 나중 부활신앙

요20:24,2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24)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예수님을 만난 후에 기쁨으로 즐거워하고 있을 그때에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말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말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이 도마의 지론입니다. 자기의 두 눈과 손으로 예수님의 손에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넣어보아야 믿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혹시 도마와 같이 무엇을 보아야 내가 믿겠다고 하지는 않습니까? 이 본문을 주의해야 합니다. 도마가 믿지 않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고 믿겠다는 것입니다. 안 믿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보고 믿겠다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본다고 잘 믿을까요? 혹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한 표본조사 통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생활 중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처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함께 하심을 눈으로 본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불기둥을 보았습니다. 구름기둥도 보았습니다. 반석에서 생수가 터지는 것도 보았습니다. 땅이 갈라져 주를 거역하고 반역하는 자들이 어떻게 된 것도 보았습니다.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자들이 놋으로 만든 놋뱀을 쳐다보는 순간에 치유와 회복된 것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무슨 소원이 있겠습니까?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이제 열심히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으니 믿음도 잘 자라고 더욱 성숙해져야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말 그랬습니까? 놀라운 것은 이 같은 역사적인 사실을 본 20대 이상의 모든 사람들이 광야에서 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것은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본 것만 가지고는 신앙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은 유년기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도마를 나무라지 아니하시고 손에 못자국을 보여 주시고, 옆구리에 창자국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주님의 말씀대로라면 도마는 믿음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한 사람이 부활하신예수님을 보았다는 것도 아니고 십여 명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하는데도 그것을 믿지 못하고 보여 주어야 믿겠다는 도마는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8일 후에 도마를 포함한 제자들이 있는 곳에 주님께서 다시 오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는 순간 도마가 무엇이라 고백하였습니까? 27,2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27)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는 감히 주님의 옆구리에 창자국을 보자 소리도 못하였습니다. “어디 주님 그 손 좀 봅시다.”그 소리도 못했습니다. 다만 그 자리에 고꾸라지듯이 엎드리면서 하는 말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내가 이제야 믿겠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되도다.”(29) 나중에 도마는 부활 신앙을 체험하고 A. D 70년경에 인도의 갈라미니아(calaminia)에서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이제 끝으로 한 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도마가 말한 대로 “내가 주님의 손과 발의 못자국을 보아야 믿겠다는 그 말씀을 다시 한 번 조명하여 보겠습니다. 도마의 소원대로 8일 후에 예수님은 오셔서 도마에게 만져 보고 확인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도마나 예수님이나 예수부활의 증거를 예수님의 얼굴이나 혹은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의 흔적에서 찾았다는 것입니다. 도마가 요구한 것이 바로 고난의 흔적이었고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확인시켜 주신 것 또한 고난의 상처, 아픔의 흔적이었습니다. 도마는 만져 보지도 않았습니다. 만져 볼 필요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지니고 계신 고난의 흔적보다 더 분명한 부활의 증거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대단히 중요한 것을 깨닫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인이시라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들이라고 하면 그 증거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직분입니까? 지식입니까? 신앙의 연조입니까? 중요하지만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증거는 우리 모두 이 세상을 향하여 주님께서 인류를 살리시기 위해 당하셨던 고난의 흔적, 아픔의 흔적, 고통의 상처를 우리도 보여줄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확실한 그리스도인의 증거는 없을 것입니다.

도마가 예수 부활의 증거로 요구한 것이 바로 고난의 흔적이었고, 예수님께서 부활의 증거로 도마에게 보여주셨던 것도 고난과 아픔의 상처였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오늘날 우리가 주님께 보여 드려야 할 증거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며 살다가 주님의 이름 때문에 받은 고난의 흔적들, 상처들이라고 믿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기에 어떤 물질의 손해를 각오하고라도 주일을 지킵니다. 가족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주일을 지킵니다. 생활이 구차함을 무릅쓰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십일조를 드립니다. 이것들이 고난의 흔적들입니다. 이처럼 확실한 부활의 증거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세상에 보여주어야 할 증거도 진리 때문에 고난당한 흔적, 시대의 아픔에 동참한 상처자국, 세상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희생당한 흔적들을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보여주지 못하고 교회가 이 세상을 향하여 보여주는 것이라고는 집단화된 이기심, 거대한 야망 그리고 세속화된 성공주의와 출세주의뿐이라면 이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보여 주셨던 것들이 분명히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픔과 수고와 희생과 헌신과 고통과 부담이 없는 사랑이란 값싼 동정이요, 자기 욕망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고 영광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희생이 있는 것만큼 성장과 축복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모쪼록 바울 사도는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6:17)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 속에 이 사회와 주님을 위하여 고난의 흔적을 가지고 사신다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도마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 (윤정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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