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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절대 절망에서 절대 희망으로 (고전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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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가 운전 면허를 취득한 후, 얼마 안 있어 중고차를 샀습니다. 한 달도 채 못되어 고속도로를 탔습니다. 처음으로 고속도로에 올라오니 기분이 좋기도 하고, 한편 몹시 긴장되기도 했습니다. 속도를 내면서 4단에서 5단으로 변속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기아가 잘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초보운전인 터라 당황하고 말았습니다. 차체가 흔들립니다. 브레이크를 밟았습니다. 순간 차가 중심을 잃고, 저도 정신을 잃었습니다. ‘이제 죽었다’ 라는 생각과 함께 차가 멈추어섰습니다. 정신 차려서 보니까, 맨 가장자리 차선에서 운행하던 제 차가 1차선으로 와서 분리벽 바로 옆에 180도 돌아 서 있는 것입니다. 30-40m 뒤로 고속버스, 자가용들이 일렬로 쭉 서 있는 것입니다. 죽을 위기에서 하나님께서 건져주셨다고 믿습니다. 이 외에도 한 두 차례 죽을 위기를 경험하면서, 이제 ‘운전’ 하면 어느 정도 수준급에 이른 것입니다.

  실패를 경험해봐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깊은 어둠, 절망의 심연을 맛보아야 새벽이 찾아옵니다. 소위 역발상의 법칙입니다. 실패했을 때 이제 곧 성공하리라는 기대감을 갖는 것, 절망에 빠졌을 때 희망의 빛을 간절히 사모하는 것, 이게 역발상의 법칙입니다.

2.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기쁨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인간 세계에서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은 없습니다. 죽음은 이젠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아무 노력도 필요 없는 절대 절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이란 절대 절망을 딛고 일어선 절대 희망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것은 기독교의 핵심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시어 영원한 영광을 누리심으로 우리에게도 영원한 영광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뗄려야 뗄 수 없습니다. 십자가 죽음 없인 부활이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 고생없는 성공은 허황된 것입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습니다. 시련의 바람이 불면 쓰러지고 맙니다. 부활없는 십자가는 우울합니다. 평생 고생만 진탕하고 성공을 맛보지 못하면 불행합니다.

  <블랙 호크 다운> 이란 영화를 보면, 부상당한 미군 병사들로 가득찬 군용차량이 소말리아 민병대의 총탄이 쏟아지는 도심에 정지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지휘하던 장교가 한 병사에게 운전대를 잡고 전진하라고 명령합니다. “불가능합니다. 전 부상당했습니다.”
이 때, 장교가 명언을 남깁니다. “우리는 모두 부상자다. 당장 잡고 전진해.”
(헤럴드 마이라 & 마셀 셀리, 빌리 그레이엄의 리더십 비밀, 생명의 말씀사. p. 218-219)

이게 바로 인간의 상태입니다. 우리는 모두 부상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진하여야 합니다. 살아남으려면 전진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나름의 시련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진해야 합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미래이지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앞서 가시며 우리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예수님께 우리의 미래를 맡기고 실패를 딛고 전진하십시오. 좌절을 딛고 일어서십시오. 절대 절망적인 환경에서 절대 희망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3.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말씀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예언한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무덤은 지금도 비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사랑하는 게바(베드로)에게 나타나셨고, 열두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 부활의 몸으로 나타나셨고, 오백여 형제들에게 일시에 부활의 몸을 보이셨습니다. 그 후에 야고보에게, 맨 나중에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한 두명이 아니라, 수백명이 예수님의 부활을 본 증인들입니다.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세상에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증조 할아버지도 돌아가셨고, 할아버지도 돌아가셨습니다. 나도 죽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이 말했습니다.
“이 세계에 모든 것이 불확실하지만, 죽음만은 확실하다”
여러분의 진로는 불투명합니다. 가정생활, 직장생활, 사업이 앞으로 어떻게 될 지 불확실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나 저나 죽는다는 사실만은 명확합니다. 인생의 마지막 골인 지점은 죽음입니다. 우리는 잘 살던, 못 살던 관계없이 누구나 죽음을 향해 한 걸음씩 매일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모두가 염세적이고 비관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하루 세끼 밥을 먹는 것도 결국은 죽기 위해서 먹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생각하면 살 맛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잘 살아야 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9:27)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영원한 영광의 세계인 천국에 들어갈 사람과 영원한 저주의 세계인 지옥에 들어갈 사람으로 나뉘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잘 살아야 합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한 기쁨과 복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두 번째 메시지는, 죽음 이후에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한5:29)
죽음 이후에는 두 가지 종류의 부활이 있습니다.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입니다. 그 기준은 선악입니다. 여기의 선악의 개념은 우리가 익히 아는 윤리 도덕적인 선악의 개념이 아닙니다. 착한 일을 선으로, 나쁜 일을 악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의 부활로, 믿지 아니하는 자는 심판의 부활, 영원한 저주의 부활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선이고 믿지 아니한 것이 악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조물주인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신의 삶 전체를 예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 전 생애를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대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대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대로 따라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조물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제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악이요 불신앙입니다. 그런 사람은 영원한 저주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여러분의 전 생애를 맡기십시오. 자녀를 맡기시고, 사업을 맡기시고, 직장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물질을, 재능을, 시간을 하나님께 내어드리십시오.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믿음으로 영생의 복, 영원한 영광의 복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5. 세 번째 메시지는, 죽어야 산다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 12:24)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자매 여러분,
현재의 모습대로 영원히 살고 싶습니까?
현재의 남편, 아내, 자녀, 이 상태로 영원히 살고 싶습니까?
자신에 대해, 자신의 환경에 대해 100% 만족하며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뭔가 2% 부족한 게 인생입니다. 불만이 다 있습니다. 뭔가 더 나은 삶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달라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달라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죽어야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씨앗이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듯이 말입니다.
현재의 모습을 온존하고서야 도무지 달라지지 못합니다. 달라질 게 별로 없습니다.
나의 현재의 모습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묻읍시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로마서 6:4-7)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는다는 말은 나의 것을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나의 권리, 나의 욕심, 나의 생각, 나의 계획, 나의 뜻을 포기합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이삭, 그 귀한 이삭을 포기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되돌려 주셨을 뿐 아니라, 더 좋은 것을 더하여 주셨습니다. 그 후손이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게 해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태 16:25)
내 권리, 내 물질, 내 시간, 내 재능, 내 능력-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은 곧 하나님을 소유하기 위해서입니다. 손에 쥔 것을 버려야 새로운 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내 안에 내 것들로 가득하면, 하나님이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나를 비워야 하나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십니다. 나를 다스리십니다. 내 안에서 창조주의 능력으로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죽는 것이 곧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것입니다.
새롭게 살고 싶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2:20)
나의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 이것이 새롭게 사는 것, 이 땅에서의 부활의 삶입니다. 

금세기 최고의 영성가 토마스 머튼의 기도문을 소개합니다.

우리는 허무한 것들 속에서 자신을 소모하다가 죽어가는데,
시련은 이 허무한 것들로부터 우리를 떼어 놓습니다.
그러므로 시련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우리는 시련을 사랑합니다.
죽음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생명을 사랑하기 때문에
시련을 사랑합니다.
그렇다면, 저로 하여금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허망한 것들,
작가로서 독자들에게 널리 읽히고 칭송받고 싶은 욕망,
학생들에게서 호평받는 성공적인 교사가 되고 싶은 욕망,
또는 어떤 아름다운 곳에서 편히 살고 싶은 욕망 등으로부터
저의 모든 사랑을 거둬들이게 하소서.
그리고 모든 것을 오직 당신 안에만 두게 하소서.
그러면 모든 것은 무익하게 소모되는 대신에
당신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토마스 머튼, 침묵 속에 만남, 성바오로. p. 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절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절대 희망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절대절망을 딛고 절대 희망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희망이십니다. (오재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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