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종려주일] 새로운 기쁨 (시 149:1-5)

  • 잡초 잡초
  • 363
  • 0

첨부 1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워낙 그리스도의 수난이 큰 사건이다 보니 종려주일 분위기가 나지 않습니다. 들어오면서 보니까 가시로 된 십자가가 이주간이 고난주간인 것을 암시하고 있고 사회를 본 박원일 목사님이 선택해서 한 구절 읽은 말씀이 고난에 관한 것이고, 찬양도 고난에 관한 찬양이 나왔지만 이해를 해 주십시오. 왜냐하면 달리 고난주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난에 관한 메시지는 내일 새벽부터 시작해서 한 주간 동안 듣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찬양이 예루살렘 거리를 메웠던 그 날을 우리가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화사한 벚꽃이 만개한 계절에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왜 내가 여기서 살고 있는가?”하는 질문이어야 합니다. 유난히도 봄을 타고 춘곤증에 시달리는 우리들에게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4장 11절은 왜 우리를 만드셨는지 수정처럼 분명하게 밝힙니다.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다른 번역은 “주의 뜻대로”라는 말을 “주의 기쁘신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으니”라고 번역합니다. 만물은 주의 기쁘신 뜻에 따라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해 주님의 즐거움을 위해서 사람은 창조되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만들어 졌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기쁨을 안겨드리기 위해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기 까지는 여러분은 삶의 의미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화사한 봄날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도 이 사실을 알기 전에는 봄을 제대로 즐길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도 말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자녀를 키워보신 부모님들은 아마 공감하실 것입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아이들을 바라보기만 해도 기쁨을 느낄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신다.”고 고백합니다.

여러분이 바른 일을 할 때 하늘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바라보시며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미소를 짓게 하는 일이 바로 우리의 창조 목적입니다. 당신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일을 설명하는 용어로서 예배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자주 오해되고 있습니다.

주일날 특정한 시공간에 모여서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존귀하신 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 크신 이름 앞에 우리의 소원을 아뢰는 이 시간만을 “예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미소 짓게 하는 모든 활동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정직하게 장사를 하고 성실하게 근무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서로에게 던지는 친절한 미소, 따뜻한 격려의 말까지 그 어떤 행위도 예배가 됩니다.

예배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전부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예배시간에 은혜 받기를 원하지만 본질상 예배는 우리가 받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일입니다. 우리의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것이고 우리의 정성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배란 우리의 삶에서 최우선 행위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모든 행위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일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은 예배를 그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롬12:1)

예배는 입술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온 모든 찬송을 불러도 모든 설교를 다 들어도 여러분 자신을 드리기 전에는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권합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십시오.”(엡5:10) 어떻게 하면 주님이 기뻐하실까요? 무엇이 하나님의 마소를 짓게 할까요? 우리의 삶의 목표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성경에 무슨 모범이 없을까요?

다행히 방주를 지은 노아의 삶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더라.”(창6:8)고 개역성경은 번역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공동번역은 “노아만은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라고  번역합니다. 현대어성경은 “노아만은 여호와를 흐뭇하게 해드렸다.”고 번역합니다.

그러면 노아의 무슨 행위가 하나님께 흐뭇함을 안겨줬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만드실 때에 하루의 역사가 끝날 때마다 만족의 표현을 하셨습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엿새에 창조가 완성될 때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흐뭇해 하셨습니다.

하지만 수백 년이 흘러 노아가 살던 시대는 달랐습니다. 온 세상이 도덕적으로 파산상태였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에 대해서 눈길을 주고 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가운데 유독 노아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의 삶은 하나님께 미소를 안겨주는 삶이었습니다.

노아의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의 미소를 짓게 하는 네 가지 방법을 배우려고 합니다.

1.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은 미소를 짓습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 그것을 우리 삶의 최우선에 둘 때에 하나님은 흐뭇해 하십니다.

선지자는 말합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 현대어성경은 이를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다.” (호6:6,현대어성경)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인격적인 관계에서 서로 사랑을 한다고 하면 계속해서 배달되는 선물을 원합니까? 아닙니다. 마음을 원하는 것입니다. 선물이 마음의 표현이 될 때 우리는 받고 흐뭇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원하고 사랑하기 원하십니다. 이것을 놓치면 인생을 놓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돌려드리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믿기지 않는 놀라운 사실이지만 틀림없는 진리입니다. 온 세상을,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만물가운데서 오직 여러분을 사랑하고 여러분의 사랑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노아가 하나님에게 흐뭇함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아무도 하나님과 관계를 갖지 아니했을 때 노아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에게 눈길을 주지 않을 때 노아는 하나님을 주시했습니다. “노아는 무척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었다. 그 당시에는 그보다 깨끗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하나님과 늘 함께 살았다.”(창6:9)

노아는 시종일관 하나님의 뜻을 따랐고 친밀한 관계를 가졌습니다. 무엇보다도 노아는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홍수 후 방주에서 나와서 했던 첫 번째 행동은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린 일입니다.

성경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다른 동물들에게는 주지 않은 특별한 능력을 사람들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능력을 만물의 영장인 사람에게만 주셨습니다.

개나 고양이가 닭이나 소가 기도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런 능력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하고 교신하고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온 세상에 나가서 선교했던 선교사들의 보고에 의하면 아무리 미개한 민족이라도 거기에는 종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을 개발하지 않으면 인간되기를 멈추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을 놓치고 삶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인간됨의 의미는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변하는 계획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삼는 것입니다. 여기 이 땅에서 몇 십년간이 아니라 저기 하늘에서 영원토록 식구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백을 듣고자 합니다. “하나님, 사랑해요. 그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해요.”하는 고백을 듣기를 원하십니다.

그 고백을 듣는 순간 하나님의 가슴은 멈추듯이 감동하십니다. 그분의 품으로 달려들 때 숨을 멈추고 감동하십니다. 여러분의 미소 띤 눈길을 느낄 때에 하나님께서는 천지창조의 보람을 맛보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미소 짓게 하는 삶을 살기로 종려주일에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어린 아이가 아버지가 붙잡아 줄 것을 믿고 높은 곳에서 안을 준비를 하고 있는 아버지의 품에 뛰어내리면 아버지인 우리는 흐뭇해 합니다. “이 녀석이 나를 믿어주고 있구나.” 하고 말입니다. 하늘아버지를 신뢰하면 하나님이 자녀인 여러분을 기뻐하십니다. “설마 하나님이 날 받아주시겠나? 그럴리 없을거야. 나는 죽었어. 난 큰일 났어.” 울고 지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험을 요구하시면 하나님을 믿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시편은 고백합니다. “자기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 하시는도다.”(시147:11) 하나님을 신뢰하면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정말 노아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했습니다. 대책 없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방주를 지어라.” 이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유치부 때도 들었고 주일학교, 중고등부 때도 들었으니 벌써 알아서 방주 이야기만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꿰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 입장에서 들어보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노아는 폭우라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바다에 떠 있는 배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무 주저 없이, 불평 없이 즉각 방주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하게 신뢰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하나님께서 최선의 것을 아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를 아신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애뿐만 아니고 우리 자녀들의 삶에까지도 최선의 길은 이거라고 그려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쪽으로 뭔가 가는 것 같으면 행복하고 아멘 할렐루야 하다가도 내가 그려놓은 방향으로 배가 가지 않고 엉뚱한 방향으로 가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는 조용해집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고 반드시 기도를 응답하신다는 것을 신뢰하는 행동입니다. 불가능한 일도 하나님께서는 가능함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배를 지으면서 들었을 온갖 조소와 비난을 상상해 보십시오. 방주를 짓는 일을 하루 이틀에 되는 일이 아닙니다. 수십 년을 두고 만든 대역사입니다. 온갖 비아냥거림을 들었어야 했고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해야 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은 그만 두고 가족들에게도 이해받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뜻을 정한 노아는 모든 세상의 조롱과 비난을 무시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 수년 씩 지연될 때 온갖 오해를 기꺼이 참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시인은 고백합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50:15)

왜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할까요? 우리가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광대하심을 자주 망각합니다.

우린 너무 자주 하나님을 우리 정도로 축소시킵니다. 정말 우리의 하나님은 너무 왜소합니다. 그러므로 문제에 봉착할 때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만났을 때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면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자신이 해낼 수 있다고 어리석은 시도를 하지 말고 주님께로 가져가면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을 위해 모험을 시도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불가능한 것을 하나님을 믿고 시도할 때 하나님은 즐거워하십니다. 지난 50년 역사에 하지 못한 일이라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믿고 시도하면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3. 우리가 하나님께 전심으로 순복하면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야고보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신앙만이 아니라, 신앙과 함께 반드시 행동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잘 새겨 두어야 합니다.”(약2:24)

우리 중 아무도 우리의 선행을 통해 구원을 얻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중 아무도 여러분의 부모를 기쁘게 해서 태어난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태어난 다음에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부모를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도와 달라고 하는 것도, 후원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도 부모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순종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면 내가 말하는 바를 하리니”라고 주님은 말합니다. 입술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순종할 때 우리로 인해 미소를 짓습니다. 그래서 주님 사랑하는 자는 주님 계명을 지킵니다.

노아야말로 전심으로 순종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다 순종하였다.”(창6:22) 그의 순종에 관해서 신약도 증거 합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하나님께서 아직 보이지 않는 일들을 지시하셨을 때에, 경외심을 가지고 방주를 지어서, 자기 가족을 구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른 의를 유업으로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히11:7, 표준새번역)

그러면 무엇이 전심으로 순종하는 것입니까?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의문도, 아무런 주저도, 망설임도 없이 행동하는 것입니다. 연기함도 없는 것입니다. “뒤에 한 번 보지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지연은 때로 불순종입니다. 온전한 순종은 즉시, 바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형편이 어렵다고 변명하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 특별헌금은 말할 것도 없고 십일조도 할 형편이 안 됩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드릴 일이 있으면 언제나 기쁨으로 동참합니다.

온전한 순종은 열정적인 순종입니다.  “흠 없는 길을 배워 깨달으렵니다. 언제 나에게로 오시렵니까? 나의 궁전에서 흠이 없는 마음으로 살렵니다.”(시101:2,표준새번역) 기쁨으로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온전한 순종입니다.

시인은 온전한 순종의 결단을 내립니다. “주께서 더욱더 깊이깊이 깨달음 주시리니 열심 다하여 주님의 명령 따르렵니다.”(시119:32, 현대어성경)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후 삶의 첫 번째 목표는 하나님께 미소를 드리는 일이 되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을 하고나면 온전한 순종은 가능해 집니다. 하긴 결심한다고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불편을 감수해야 하고 때로는 인기 없는 일을 떠맡아야 하며, 때로는 비싼 값을 치러야 하고 쉽지 않은 일을 해내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때는 여러분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 정반대의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우리의 자연적 성향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는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은 나에게 익숙하고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른 사람이 여러분을 해치면 여러분의 자연적 성향은 어떻게 발동합니다. 그에게 갚아주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을 상하게 한 것보다 더 상하게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용서하고 악을 선으로 갚아주라고 말씀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결코 우리에겐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돈을 갖고 있을 때 핍절한 사람을 보면 자연스런 반응은 어떻습니까? 나누어 줍니까? 나누는 것을 그만 두고 빌려주기라도 합니까? 그럴 리 없습니다. 가진 것을 더 움켜 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명합니다. 나누라, 관대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것이 너무나 익숙해 있습니다.

이런 우리가 온전히 순종할 때 하나님은 미소를 짓습니다.

날 때 모습 가지고 말하면 절대 저럴 수 없는데, 표범이 반점을 제했으면 제했지, 구스인이 피부색깔을 바꿀 수 있으면 있었지 절대 저럴 놈이 아닌데 나누기를 좋아하네? 맞고도 용서 하려고 하네? 날 닮아서 그렇지. 그러십니다. 우리가 온전한 순종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행복해 하십니다.

4.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하늘 아버지의 목적을 성취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미소를 보내십니다. 홍수가 끝난 뒤 방주에서 나왔을 때 하나님은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 복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가 홍수 만나 시원한 꼴을 한번 보더니 이제부터는 착해졌네.” 그럽니까? “이제부터는 경건하게 살겠다고? 그래.” 그래서 복 주신 말씀을 한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창9:1) 배우자와 더불어 사랑하고 자녀를 낳아서 인류를 세상에 보낸 그 임무를 완성하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되라! 여러분이 결혼해서 자식 낳고 사람 구실하는 것을 바라보실 때 하나님은 미소를 보내십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신앙이 좋아질 때만 하나님이 미소를 보내신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적인 일에만 관심을 갖는다고 여깁니다.

바로 지금 교회당에 와서 설교말씀을 잘 듣고 있기에 기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식당에 가서 여러분이 좋아하는 음식을 시킬 때 하나님이 기뻐하리라는 상상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맛있게 음식을 먹는 것을 바라보시면서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명절 때 자식들이 오면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고 어머니가 잡숫지 않고 자식들 먹는 것만 봐도 행복해하는 것을 보신 적 없습니까? 여러분이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이 맛있는 것 시켜먹는데 뒤돌아 앉아서 심통 부리겠습니까? 절대 그러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맛있는 것을 먹으면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피어나는 새싹과 벌어지는 벚꽃을 바라보며 좋아할 때, 흐드러지게 핀 밤 벚꽃을 즐길 때도 미소를 보내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개나 소가 벚꽃나무 밑을 지나가면서 웃는 것을 보셨나요? 그러지 않습니다. 짐승은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능력을 주셨어요. 누가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주셨어요. 그걸 보면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도록 지음 받은 창조의 질서에 따라서 우리가 반응하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 모습을 보고 행복해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즐거움을 위해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온갖 들풀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은 우리의 기쁨을 위해서 즐거움을 위해서 하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꽃 한 송이도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오죽하면 제가 ‘세상에 꽃 한 송이만 남아있어도 나는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꽃을 나를 위해서 마련하신 것을 보니까 하나님이 날 사랑 하는 게 분명해.’ 이렇게 결론을 내렸겠습니까?

우리의 삶의 모든 행동은 모두가 다 예배행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그것은 바로 예배행위입니다.

집안을 청소하는 일도, 접시를 닦는 일도, 운전을 하는 일도, 등산을 하는 일도 바른 태도로 하면 하나님이 바라보며 기뻐하는 예배행위입니다. 거실에서도, 욕실에서도, 침실에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그 행위는 예배행위입니다.

신앙의 시인은 고백합니다. “사람이 살아가야 할 도리를 여호와께서 인도하신다. 가르치신 그 길 따라 살아가는 것 여호와께서 흐뭇해 하신다.”(시37:23,현대어성경) 가르치신 그 인생길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 우리에게 주신 본능에 따라서 반응하는 것, 우리에게 주신 도덕을 따라서 신앙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이 흐뭇해 하신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길에 앉아 좌판 펴놓고 장사하면서 즐거워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착한 일을 하며 궁핍한 사람들과 나누는 일을 잊지 마십시오. 이러한 제물이야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입니다.”(히13:16) 부엌이나 일터에서 아니면 길거리에서 이루어지는 예배에도 하나님은 특별한 즐거움을 느끼십니다.

그것을 알면 여러분은 하루에도 수백 번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주일날 교회당 건물 안에서만 아니라 월요일 일터에서도 하나님께 기쁨의 미소를 띠게 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로마서 12장 1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베푸실 일을 생각할 때 이것이 무리한 요구이겠습니까?”(롬12:1)

예배의 본질은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란 무엇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입니다. 헌신하고 양도하고 드리는 행위가 핵심입니다. 그래서 그는 찬양합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라고 고백하는 일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의 핵심은 사람들이 자신을 기쁘게 하고 자신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성경의 하나님을 찾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관심을 갖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에 그 어떤 것 보다 더 큰 보람을 느끼는 이 시대의 노아를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드리십시오. 여러분의 눈을 하나님의 시선과 맞추십시오. 창조하신분의 뜻을 따라서 그분으로 하여금 여러분을 보실 때에 미소 짓도록 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자신을 드리면 모든 책임을 져주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미소를 구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기쁨을 선사하십니다.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기쁨 되기를 원하면 여러분의 마음에는 하늘의 기쁨이 언제나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종려주일을 맞이해서 찬양하는, 주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이런 일에 마음이 모아져야 합니다. 내일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시간마다 고난의 메시지를 듣게 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려주일은 하나님으로 인해서 기뻐하며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그분이 당신의 성읍에 들어오실 때에 찬양하는 일에 우리도 마음을 합해서 기뻐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정근두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