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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빈 무덤과 부활 (마 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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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8: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인도에서 스탠리 존스 선교사가 노방전도를 하고 있는데, 이슬람교도 한 사람이 설교 중간에 나서서 외쳤습니다.  "우리는 당신네 기독교인들이 못 가진 것 한 가지를 가졌소."그러자 그가 물었다.  "그것이 무엇이오?"  "우리는 메디나에 가면 마호메트의 시체가 들어 있는 관이 있어서 정말 마호메트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소. 하지만 당신네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에 가면 빈 무덤밖에 볼 수 없지 않소?" "고맙소."  스탠리 존스는 이렇게 대답한 뒤 계속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의 말이 그대로 사실인데,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다른 점이오.  우리의 주님은 부활하셨소.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빈 무덤밖에 없는 것이오."(예화 뱅크-빈 무덤이 자랑거리)

  부활주일을 맞아 보수와 진보 교단들이 연합하여 축하예배를 드리며 부활주일에 대한 주제해설과 설교 문을 만들어 함께 하기를 원하여 이를 참고하여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역사적 사실로 믿고 고백하는 데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소개하면서 선지자들을 통해 계속하여 거듭 예언해온 “성경대로”(고전15:3- ) 이루어진 성취 사건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지상에 교회가 세워진 것도, 토요 안식일이 주일 예배의 날로 바뀐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전도도 헛것”(고전15:14)이라고 단언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적 사실이 인류에게 복음이 되는 것은 그가 ‘생명의 주’가 되심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생명’(14:6, 11:25), ‘생명의 물’(4:14), ‘생명의 떡’(6:48), ‘영생의 말씀’(6:68), ‘생명의 빛’(8:12), ‘참포도(생명) 나무’(15:1)로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생명의 주’로 그가 오신 목적을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하게 하려 하심”(10:10)이라 하셨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5-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이심을 공적으로 선언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신 ‘생명’이란 눈에 보이는 육체적인 생명이 아니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속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이 곧 ‘영생’으로 말씀하셨습니다(요3:16). 성경이 나타내는 ‘영생’이란 시간적으로 ‘영원한’ 삶을 말하고, 공간적의미로는 우주적인 삶으로, 인간의 생명 뿐 아니라 만물의 생명력, 문화의 생명, 역사의 생명, 나아가 피조세계의 생명까지 포함하는 ‘하나님 안에 있는 본질적인 생명’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은 인간이 지상에서 맛볼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이며(요11:26, 고후5:17) 그 부활의 생명은 천국에서 맛 볼 그 온전한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도래할 종말적인 시간 속에서 우리에게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 같은 종말적인 생명은 생명의 근원이시고 생명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창2:7,시104:29)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요10:28)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5:12-13)

  예수께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셨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영생의 길을 열어주심으로 인류에게 영원한 소망의 근거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부활의 아침,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인류를 향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 하십니다.

  세상(우주)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생명 안에서 ‘하나 됨’을 유지해 오고 있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과의 긴밀한 관계에서 실재합니다. 즉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 인간과의 사회적 관계, 그리고 피조 계(자연)와의 생태적 관계의 질서 속에서 인간의 생명은 온전하게 유지됩니다. 따라서 ‘우주적’ 생명은 피조세계에 대해 열려진 인간의 삶의 모습을 반영합니다.

  한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영생 얻는 길’을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마19:16)라는 질문을 받고 예수님은 십계명의 근본정신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을 따르는 것이 영원한 생명의 길임을 제시했습니다(마19:17, 22:36-40).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이 곧 참 생명(영생)의 기반임을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 하나님을 믿고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요5:24). 여기서 사도요한은 한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간 줄 알거니와”(요일3:14)의 이 말씀은 곧 참 생명은 남을 위해 목숨을 주는 데서 참 생명이 깃들게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마16:25, 요12:24-25)을 기억나게 합니다. 즉 우리가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는 표현보다 우리의 목숨을 희생하면서라도 하나님을 믿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참 생명의 길임을 보여줍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이웃’의 개념은 한마디로 ‘사회적 약자’인 고아, 과부, 나그네, 가난한 자 등을 지칭하고 있습니다(신10:18-19, 15:11). 예수님은 ‘이웃’을 ‘지극히 작은 자’를 주린 자, 목마른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 강도 만난 자 등으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마25:35-40, 눅10:29-37).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은 회당에서 구약의 예언자의 말씀 가운데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사61:1-3)고 선포하시고 이 말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4:18-21).

  예수님의 십자가는 수직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복종의 표지이고, 수평적으로 인류 전체에 대한 사랑의 표지입니다. 이같이 ‘생명’의 원리는 철저히 ‘관계’요, ‘교통’(commuinion)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부터 주어진 생명의 본질은 창조 시에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합니다(창1:26-27).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 란 우리 인간 속에 있는 어떤 요소를 일컫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을 때 우리에게 반사되는 ‘하나님의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몸담고 있는 21세기 지구촌의 현장은 한마디로 ‘관계의 단절’과 무질서와 혼돈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류는 지금 불안과 두려움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인종 간의 갈등과 테러가 자행되고 있고, 천재지변으로 인해 수많은 생명이 죽어갑니다. 빈부의 격차가 날로 심각하게 증가하고, 전자통신의 발달은 극도의 개인주의를 부추기고 있는가 하면, 인터넷 사이버 공간은 통제되지 않는 새로운 사회악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생명공학의 발달은 유전자의 조작과 생명복제로 인해 생명윤리의 기반을 흔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차별, 세대 간의 갈등에서 야기되는 인권침해,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인한 젊은이들의 정신적 혼란과 허무주의가 날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과소비’와 ‘개발’이라는 명분하에 진행되는 생태계의 파괴는 지구온난화, 오존층파괴, 대기오염, 환경오염을 야기 시키고 급기야 생명체의 멸종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지구촌은 ‘세계화’의 그럴듯한 포장 속에 모든 것이 상품화되어서 생명경시 내지는 생명질서의 파괴를 야기 시키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생명은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길로 인간에게 허락된 은혜의 선물일 뿐 아니라 피조 계 전체와도 연결된 생명문화의 씨앗이 됩니다. 그리하여 예수의 부활의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파급되는 생명문화의 공통된 특징은 막힌 담(장벽)이 모두 허물어지고 ‘하나 됨’을 경험합니다(엡2:14).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죄)이 허물어지고, ‘영생’이라는 생명줄이 연결됩니다. 민족 간에 막힌 인종의 장벽, 지역, 계층, 성별, 종교, 부부, 형제, 자매간에 가로 놓인 반목과 질시, 편견과 갈등, 다툼과 분쟁의 모든 장벽이 허물어지고 사랑의 줄로 연결되는 ‘화해와 일치’를 경험합니다.

  ‘생명’의 주로 오신 부활의 예수님은 또한 화해와 일치에로 안내하는 ‘길’로 오셨습니다(요14:6). 생명과 화해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성육하신 예수님은 자기를 비워 이웃을 섬겼고, 불화와 분열의 벽을 허물려고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를 지심에 앞서 성부 하나님께 “하나되게 하소서”(요17:21)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고, 그를 대신하여 우리에게 세상을 화목케 하는 말씀을 부탁하셨습니다(고후5:18-20).
태초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이 성육하셔서 삶을 통해, 그리고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 몸소 보여주신 대로 생명의 존엄성에 근거한 ‘화해와 일치’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요, 생명문화의 바른 질서입니다.

  21세기 지구촌이 직면하고 있는 지상과제는 생명경시와 생명조작 그리고 생명파괴로 얼룩진 피조세계 전체 속에 생명을 살리는 운동이요, 탐욕으로 인한 갈등과 대립을 해소하고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하나됨’의 운동입니다. 이 과제는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만이 해결이 가능합니다. 부활절 우리 모두는 생명과 화해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함께 고백해야 합니다. 

  안식일이 지난 첫 날 동틀 무렵,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두 여인은 오직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빌라도 총독의 경비병들과, 유대 대제사장들에게 들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잘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두려움을 이기게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남자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면서 모른다고 부인했고(마태 26:74),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한 자책감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마태 27:5). 나머지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이 체포되신 후, 절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모두 흩어졌습니다. 오직 두 여인만! 이 아직 어두운 새벽을 깨우면서 조심스럽게 무덤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면서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무덤을 닫았던 돌을 굴려내고 그 돌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놀란 여인들에게 천사는 말했습니다: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마태 28:5-7). 놀란 여인들이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려갈 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들에게 나타나시어 말씀 하셨습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마태 28:10).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함으로써 승리한 것처럼 보였던 악의 세력이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악의 승리는 다만 잠시 일뿐입니다. 사탄의 마지막 무기인 죽음도 예수님을 무덤에 가두어 둘 수가 없었습니다. 죄와 악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새로운 생명의 소망이 되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악의 세력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하셨습니다(누가 12:4, 마태 10:28).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써 죽을 수밖에 없는 모든 인간의 구원자 되시었고, 지금 악의 세력 때문에 억압받고 고통 받는 모든 인간의 해방자가 되셨습니다. 그리! 고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예수님과 함께 부활할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교의 부활 신앙은 ‘어떻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라는 의학적인 질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또 죽음 이후의 삶은 어떤 것이냐라는 종교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질문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부활 신앙은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당하신 갈릴리의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죽음으로부터 일으켜 세우셨다는 믿음입니다. 경건한 종교 지도자의 영혼 부활도, 위대한 정치적 영웅의 정신적 부활도 아닙니다. 갈릴리 출신의 청년 목수, 종교 권력과 정치 권력의 희생자,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무덤 속에 방치하지 않으시고 다시 살리셨다는 믿음입니다. 

  ‘어떻게’는 과학적 질문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어떻게’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는가를 질문하지 않고, ‘누가’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신가를 묻습니다. 누가 낮아진 하나님이신가를 묻습니다. 자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분(빌립보서 2:6),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섬기신 분”(빌립보서 2:6-7),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갈릴리의 예수님이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을 구원하고, 자연과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하여, 세상에 참 생명을 주기 위하여 스스로 죄와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신 하나님, 그러나 그 죽음을 부활로 극복하신 하나님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주님이십니다. 

  사탄의 마지막 무기는 죽임입니다. 죽임의 위협으로 사탄은 의롭고 선한 사람들을 변절시키거나 좌절시킵니다. 그러나 무덤은 생명의 종착지가 아닙니다. 무덤은 질병과 고통, 부와 가난, 불의와 죄악, 사랑과 증오, 시기와 질투, 분쟁과 분노, 권력과 억압의 마지막은 될지언정, 결코 생명의 마지막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어디에도 갇힐 수가 없습니다. “죽음도, 권세자도,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로마서 8:38-39).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서 다시 시작되는 생명인 부활을 믿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로마서 8:11),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시기 때문입니다”(로마서 6:4).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인 부활을 체험 했습니다. 돌로 막은 어두운 무덤 속 같은 절망을 박차고 일어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하신다”(마태 28:18-20)는 약속을 힘입어 제자들은 세상 끝으로 향했습니다. 세상의 끝, 삶의 낭떠러지, 절망의 어둠 속에서, 신음하며 고통 하는 형제자매들에게 생명의 복음, 치유와 화해의 복음을 증언하기 위해서 그들은 다시 세상으로 나아갔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생명의 떡”이라고 증언합니다(요한 6:33-48).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 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요한 6:51).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한 6:56-57). 이것은 사도 요한이 성만찬을 염두에 두고 증언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먹히기’를 원하시는 생명의 떡입니다. 그 분은 다른 사람들에게 먹히기까지 자기를 낮추신 분입니다. 세상은 다른 사람을 잘 먹는 사람을 능력 있는 사람, 출세한 사람이라고 칭송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을 밟고 먹어치우는 사람이 높아지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꺼이 남에게 먹히신 분입니다.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못 박히고 살이 찢겨 돌아가신 분이십니다. 남에게 먹힘으로써 생명을 나누는 삶, 자신을 내 줌으로써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삶,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성만찬적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써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에 대하여 죽음으로써 새 생명, 죽지 않을 생명을 심어야 합니다. 

  세계의 도처에서 지금 인간의 생명은 물론, 생태계와 모든 피조물의 생명 그 자체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전쟁과 테러, 빈곤과 질병, 인종주의와 성차별, 종교 간의 갈등과 분열로 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상처받고 있습니다. 일자리가 없어 일하고 싶어도 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절망하고 있고, 삶이 의미가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이렇게 선언합니다. 특정 국가와 특정 집단의 이익을 보장하고 극대화하기 위하여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무조건 종식되어야 합니다. 전쟁은 어떤 명분으로도 어느 곳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지구의 한편에서는 식량과 의약품이 넘쳐나는데도 다른 한편에서는 구조적 빈곤과 질병으로 고통 받고 죽어가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새로운 기술 과학의 발전은 생명의 존엄성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존권을 박탈당하는 노동자, 농민이 없도록, 문화적 다양성이 서로 존중될 수 있도록 세계화는 보다 인간적이어야 합니다.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이주 노동자들도, 해외에서 외국인이라고 차별당하고 있는 우리 교민들도 정당한 인간적 권리를 누려야 합니다. 피부색과 인종과 종교와 성, 신념의 차이 때문에 차별 받고 억압받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여성과 어린이에 대한 폭력은 사라져야 합니다. 60년이 넘는 군사적 긴장과 반목, 대립과 대결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한반도는 평화적으로 통일되어야 합니다. 미래의 세대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위하여 지구 자원을 돌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리며,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는 인류와 지구의 미래를 위해 참 소망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세계, 하나님의 창조를 이 모양으로 만든 책임은 전적으로 우리 인간에게 있습니다. 인간이 변하지 않으면 세계도 변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거듭나지 않고서는 세계를 변혁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먼저 회개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해서 일하는 세계의 시민과 우리 민족이 오늘의 한국교회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어둠에 앉아있는 백성에게 큰 빛이 되고,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는”(마태 4:16)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함으로써 거듭나야 하며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큰 빛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신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는 할 수가 있습니다. 세상을 향한 우리의 증언이 참될 수가 있고, 사람들을 감동시켜, 세계를 변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다신 사신 부활의 주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사셨습니다! 분열과 분단의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하나님과 화해시키신 예수 그리스도(에베소서 2:14-16)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 날까지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므로, 우리 이웃과 민족과 인류에게 소망을 주는 새로 거듭나는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강성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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