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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제는 길이 나타났다 (롬 3: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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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간 평양을 다녀왔습니다. 평양뿐만 아니라 강남군에 위치한 탁아소, 유아원, 학교와 농촌현장을 방문했습니다.
3박4일동안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도대체 누가 지배하는 땅이기에 지구상에 이런 곳이 있는지 생각하니까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음식이 목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곳을 보면서 로마서의 말씀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라는 단어가 자꾸 생각났습니다.
로마서의 본론이라고 할 수 있는 1:18절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1:18)
그렇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3)
저 북한 땅은 하나님을 부인, 멸시, 핍박하는 자의 종국이 어떠한지 그대로 보여주는 실물 현장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는 몇 번에 걸쳐서 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의 칼날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1장에서는 '저희' 즉 이방인들에게 심판의 칼날이 향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2장에서는 '너희' 즉 로마교회 성도들에게도 심판의 칼날이 임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3장에서는 '우리' 즉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사도를 포함한 모든 자들에게 심판의 칼날이 임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7장에서는 자기 자신의 가슴팍에 칼날이 향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두려움으로 몸서리치며 부르짖고 있습니다.(롬7:24)
자신은 남들보다 더 선하고, 경건하게 살고 있다고 은근히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성령께서는 그게 아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
이런 절망적인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하여 온갖 몸부림과 이론을 다 동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행을 통해 수양을 쌓으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몸을 학대하며, 고행에 고행을 거듭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공로를 쌓으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평생을 선을 베풀고, 덕을 쌓는 일에 전력투구합니다.
이렇게 하면 죄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요? 절망에 처한 비참한 그 상황에서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이렇게 살았던 사람중에 대표적인 사람은 불교의 성철스님일 것입니다.
그는 결혼 직후, 처자식을 버리고 집을 떠났습니다. 부모가 찾아와도 수행에 방해된다고 만나지 않았습니다.
기거하는 곳에 철조망을 쳐놓고, 무려 십년동안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십육년 동안 솔잎가루와 쌀가루로 연명했습니다. 팔년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 즉 눕지 않고 앉아서 잤다고 합니다.
한평생 이렇게 살았던 그가 죽음 직전 열반송 혹은 임종게(臨終偈를 남겼습니다.
"한평생 무수한 사람들을 속였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가득 차 수미산보다 더 하다.
산채로 무한 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이니, 한 덩이 붉은 해 푸른 산에 걸려있다" 일생을 그렇게 깨끗하게 살면서 스스로 구원을 이루기 위해, 그렇게도 발버둥 쳤는데, 헛고생했다는 고백입니다.
"나는 지금 무한 지옥에 떨어진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기에 후회막급하다.
서산으로 해는 뉘엿뉘엿지는데(죽음) 이제야 깨달으니......" 또 한가지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들이 사용한 방법으로써, 율법을 지키면 죄문제를 해결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선을 행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쳤는지 모릅니다.
율법을 어떻게 지키는 것이 완벽하게 지키는 것일까 하고 고민하면서 만들어 낸 책이 미쉬나, 탈무드입니다.
그 분량이 대형트럭에 실어도 남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한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
율법의 행위로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무슨 말입니까? 율법을 가까이하면 할수록 죄의식을 더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율법을 몰랐을 때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알고부터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을 하려고 노력을 하게 됩니다.
노력하면서 느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면 할수록 부족함을 느낍니다.
애를 쓰면 쓸수록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율법은 이렇게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해주기에 하나님 앞에서 오히려 그 어떤 변명조차 못하게 우리의 입을 막아버립니다.
인간이 스스로를 그 절망적 상태에서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전적으로 밖으로부터 와야 합니다. 그 구원의 길이 바로 21절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3:21) 여기에서 '이제는'이란 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것은 로마서에서 일종의 전환점 역할을 합니다. 로마서는 일반적으로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롬1~11장, 롬12~16장까지로 나눕니다. 그러나 이것은 고전적인 방법입니다.
로마서 전체를 이렇게 분류하는 것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지만 로마서를 자세히 구상하면 롬1:1~3:30절까지, 그리고 롬3:21절부터 마지막까지 나누는 것이 더 일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제는'이란 단어 때문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쓰면서,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펜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처음부터 예수의 복음을 소개하지 않고, 이제야 복음을 소개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이제는'이란 말의 반대말은 '전에는'입니다. 바울은 롬3:20절까지 '전에는' 우리가 어떤 자이었으며, '전에는'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어떤 방법들을 동원했는지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여 있었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죄를 깨닫고, 죄의식만 더 쌓아가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바울사도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라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고 절규할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경이로운 전환점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이제는'이라는 단어로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길이 열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전혀 다른 길을 우리 앞에 펼쳐 보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한 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율법외에 나타난' 방법입니다.
이 말은 율법을 폐기한다는 뜻이 아니라 율법과 관계없이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다른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그 길은 도대체 어떤 길일까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2)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곧 길이심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우리 문제의 유일한 해답임을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율법을 얼마나 지켰느냐? 덕, 고행, 선행을 얼마나 베풀었느냐가 아니라, 이런 문제와는 전혀 상관없이 오직 '믿음' 하나로 의롭다하심을 받고, 믿음 하나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복음입니까?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파격적인 선언입니다.
그래서 우리 구원을 위해서 성경 66권이 다 필요없고, 로마서만 있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로마서도 다 필요없고 롬3:21~24절만 있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약시대 사람들이, 아니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이 길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알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방법들을 다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찾아오는 것은 절망뿐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였는데 엄습해 오는 것은 무서운 '죄의식'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18:23)
이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형벌 받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율법으로가 아닌, 다른 새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 길을 향해 달려가는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옥성석 목사(충정교회 담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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