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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의 은혜 (요 21: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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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만큼 두려운 것도 없습니다. 죽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은 끝이 아닌 시작일 뿐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 안에서 우리도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 것입니다. 고난이 축복의 문을 여는 열쇄이듯이 죽음은 부활의 문을 여는 열쇄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부활이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부활 신앙은 용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밤새도록 심문을 받고 빌라도에게로 넘겨집니다. 빌라도는 예수가 갈릴리 출신임을 알고는 다시 헤롯에게로 넘깁니다. 헤롯은 무언가 좀 신비로운 것을 보고 들을까 하다가 마음대로 되지 않자 온갖 희롱을 다하고는 빌라도에게로 넘겨줍니다. 빌라도는 다시 자기에게로 예수가 넘겨지자 예수를 본격적으로 심문해 보지만 예수에게서 사형에 해당할만한 죄가 없음을 알고는 채찍질을 하고는 예수를 풀어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대는 군중들의 소리에 그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고 맙니다. 얼마나 힘들고 지쳤으면 먼 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젊디젊은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언덕길을 오르다가 쓰러지고 넘어지기를 거듭하자 군병들이 구레네 시몬을 데려다가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지게 하고 골고다까지 갑니다. 이윽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때가 아침 아홉시입니다. 그때부터 오후 세시 숨지기까지 손과 발에 못 박하신 채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그 시간은 가뜩이나 지친 예수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얼마나 외로우셨을까요? 그런데도 여전히 무리들은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하며 조롱을 합니다. 같이 십자가에 달린 양 옆의 강도들까지도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그런데 그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무어라 하십니까?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의 하는 일이 무언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참으로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입장에서 본다면 십자가에 못 박힌 손과 발의 고통 이상으로 마음의 고통이 더 컸을 것입니다. 너무도 분하고 억울합니다. 너무도 비참하기 짝이 없습니다. 자기를 따르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고 지금까지 그 수많은 역사를 보고 들었던 사람들이 단 하나도 없단 말입니까? 누구하나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사람 하나도 없으니 말입니다. 아니 그 정도면 그래도 괜찮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은 것도 모자라 그 처형장까지 따라 와서 조롱해 대는 사람들을 볼 때 얼마나 분했을까요? 그렇다면 “저놈들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다 멸하여 주옵소서.” 하는 것이 더 쉬울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저들을 용서하여 달라고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예수님이 누구 때문에 이런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까? 바로 나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죄와 허물로 가득한 우리들이 아닙니까?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건만 우리 가운데 죄 없는 자 과연 누가 있단 말입니까? 나야말로 정말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서도 우리를 위해 용서를 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차라리 주님께서 나를 향해 “네가 그러고도 나의 종이란 말이냐? 네가 그러고도 교회의 직분자란 말이냐? 네가 그러고도 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이 나쁜 놈들!” 하고 호통이라도 쳐 주신다면 오히려 홀가분할 수도 있을 텐데 여전히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용서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친히 가르치시기를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축복하며 기도하라”고 하셨지만 실상 어디 용서하는 것이 쉽습디까? 차라리 욕이라도 한 바탕 퍼부어대는 것이 더 쉽지를 않습니까? 그런데도 십자가의 주님처럼 항상 넓은 마음으로 사랑과 용서를 실천해 오신 향남 교회 성도님들을 생각할 때 참으로 감사합니다. 어떻게 목사가 되서 그럴 수 있냐고 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저입니다. 그것은 저뿐 아니라 직분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고도 장로라 할 수 있느냐? 그러고도 권사라 할 수 있느냐? 그러고도 집사라 할 수 있느냐? 그러고도 성도라 할 수 있느냐? 하면서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 시작한다면 그 비난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한없는 사랑으로 서로를 감싸주고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 성도님들께 정말 감사를 드리며 부족한 종을 끝까지 믿어주고 순종하는 모습을 볼 때 그저 눈물로 감사할 뿐입니다. 또한 서로 화합하며 맡은 바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그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부활 신앙이 무엇입니까? 부활 신앙은 바로 이렇게 용서로 시작하는 사랑입니다. 용서가 없이는 참된 사랑의 실천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졸라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하여 집을 떠날 때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집을 떠나면 어떻게 될지 뻔히 내다보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을 갈래갈래 찢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유산을 나눠주어 떠나보냅니다. 그런데 집을 떠난 둘째 아들이 결국은 가진 재산을 다 허비하고는 가장 밑자락까지 떨어져 돼지 치는 자가 되고 맙니다. 돼지가 먹는 것으로 배를 불려보려고 하지만 그것조차도 마음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결국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다시 집으로 돌아옵니다. 너무도 염치가 없어서 감히 자식이라 하지도 못하겠노라고 차라리 종의 하나처럼이라도 여기고 거둬주기만 바라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동네 어귀까지 나와서 날마다 자식 돌아오기만 기다리던 아버지가 저를 발견하고는 뛰어나가 그 아들을 품에 안습니다. 자식이 무어라 하기도 전에 종들을 불러 돌아온 자식을 씻기고 좋은 옷을 입히도록 하고 그 손에는 반지를 끼워주고 잔치를 베풉니다. 비록 실패 끝에 돌아온 자식이지만 종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아버지의 사랑의 배려입니다. 자식의 입장에서 본다면 네가 무슨 낯짝으로 다시 돌아왔냐고 나는 너 같은 자식이 없으니 당장 내 눈 앞에서 사라지라고라고 했다면 마음이 더 편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 나는 그렇게 당해도 싸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단 한 마디도 자식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집에 있을 때보다도 더 자식을 잘 대해 줍니다. 아무리 실패를 했다 하더라도 아무리 죄 많은 자식이라고 해도 그는 여전히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종들에게 하찮게 여김을 받지 않도록 하는 아버지의 사랑의 배려입니다. 이 용서의 사랑이 바로 부활 신앙의 출발입니다.

죄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내가 죽어야 할 십자가에 예수님이 대신 달리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시기에 십자가 위에서 오히려 용서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 용서의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주님의 아픔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른 채 죄 가운데 빠져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이렇게 용서를 통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아직도 비난의 화살을 퍼붓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아직도 내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용서를 선포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내가 잘못했으니 용서하여 달라고 한다면 오히려 쉬울 것입니다. 그런데 용서를 비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을 위해 용서를 먼저 빌고 선포한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정신 나간 사람이나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부활 신앙의 출발이더란 말입니다. 십자가는 바로 용서의 현장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용서의 현장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는 아픔 속에서 함께 하는 사랑의 십자가입니다. 용서는 내 형편이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고통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상대방의 어떤 변화나 회개의 모습이 보여지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십자가는 고통 중에 베푸는 사랑의 절정입니다. 내가 지금 상대방으로 인해서 너무도 고통스럽습니다. 얼마나 아픈지 모릅니다. 너무도 아프기 때문에 베푸는 사랑이 바로 용서입니다. 너무도 힘든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용서가 없이는 사랑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요 사랑이 없이는 은혜로 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가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십자가 위에서 선포된 용서가 있기에 우리가 지금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이런 용서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상처가 있습니까? 누구 때문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용서하십시오. 그래서 사랑을 회복하십시오. 이 용서를 통해 부활의 은총을 함께 나누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로 부활 신앙은 평강입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와서 하신 첫 번째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그렇습니다. 부활 신앙은 그래서 평강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쳤던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찾아가 만나 예수님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의 마음에는 불편함과 두려움으로 가득합니다. 자신 있게 “죽으면 죽었지 결코 주님을 버리지도 부인하지도 않겠다.”고 다짐했었던 저들이지만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부인했고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그랬던 제자들을 예수님이 직접 찾아와 만나 주십니다. 그리고는 하시는 첫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입니다. 그러니까 평강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교제가 회복이 되어야 합니다. 서로 만나야 합니다. 만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찾아가야 합니다.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 두려움으로 가득한 사람을 찾아가 만나야 합니다. 만나서는 평강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는 찢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불편한 마음을 평화로운 마음으로 바꾸어주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서 만나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어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입장에서는 피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렇게 피해 도망다니는 사람을 찾아가 만나는 것이 교제를 회복하는 비결입니다. 만나서 무엇을 합니까? 비난을 퍼부어 댑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용서가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요 이 용서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편안하게 대해주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이 무엇입니까? 회복입니다. 죽음의 회복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다시 만나는 것입니다. 만나는데 만나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전에 친하게 지낼 때처럼 다시 편안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말씀하셨습니다. 그처럼 이런 저런 이유로 불편해진 사람을 찾아가 만나되 만나서는 전처럼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조금도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의 잘못을 들추어내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과거는 과거로 다 흘려버리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 전보다 더 가깝게 지낼 수 있도록 편안함을 주어야 합니다. 그런다고 해서 상대방이 금방 달라지는 것은 아닐지라도 더 이상 상대방이 나를 피하지 않아도 되도록 그 마음을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아니 조금도 불편한 내색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 축복해주고 더 격려해주고 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친한 친구를 대하듯 대해주는 것입니다. 거기에 특별한 어떤 말이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찾아가 만나고 편하게 대해주면 됩니다.

누구보다도 친하던 사람이 한 번 갈라서게 되면 원수보다도 못하게 되는 경우를 주위에서 종종 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적어도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내 마음에 상처를 주고 내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 도망치는 사람을 자연스럽게 찾아가 만나고 만나서는 조금도 불편한 표정 없이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편안하게 시간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계속해서 만나게 되면 어느 사이엔가 불편했던 마음들은 사라지고 함께 있는 시간들이 그저 편안하고 즐겁게 되더란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 신앙입니다.
이런 자연스러운 만남을 통해 모든 어그러진 것들을 바로 세워나가는 평강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 신앙은 은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한 번 두 번 만나고 나서도 제자들의 마음에 남아 있는 그늘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이 항상 자기들과 함께 계신 것도 아닙니다. 이제는 주님으로부터 독립을 하여 주님이 그동안 가르쳐 주셨던 교훈들을 널리 펼치도록 하고 그 말씀을 따라 자신들이 살아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도 자신이 없습니다. 주님도 없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할 때 도무지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가장 자신 있는 일 전에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늘 해왔던 고기 잡는 일을 다시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정말 답답합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몇 년 간 손을 놓았다고는 해도 한 평생 살아오면서 했던 것이 고기 잡는 일이었는데 단 한 마리도 잡을 수 없다니 이건 말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을 찾아온 분이 있었습니다. 처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하셨을 때 참 웃기는 사람도 다 봤다 싶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줄곧 그물을 던졌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얼떨결에 그물을 던져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한번 그물을 던졌는데 자그마치 153마리나 되는 큰 물고기들이 잡힌 것입니다. 비로소 자기들에게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던 분이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깨닫고 급히 배를 물가로 대고 주님 앞으로 다가갑니다. 그들에게 숯불에 구운 고기를 주시며 함께 아침 식사를 마친 다음 베드로에게 주님이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어린 양떼를 먹여라.”
예수께서 두 번째로 그에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양떼를 쳐라”
예수께서 세 번째로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때에 베드로는 예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세 번이나 물으시므로, 불안해서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양떼를 먹여라.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네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너를 끌고 갈 것이다.”
여기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대표적으로 베드로를 향해 말씀하시지만 사실은 모든 제자들에게 너희들도 잘 들으라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던 제자들로서는 당연히 사랑한다고 대답할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래요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잘했냐 잘못했냐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때로는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가 무언가 잘못되었다 해서 괴로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때로는 힘들어 하고 때로는 괴로워하고 때로는 좌절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기에 힘들어 하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새로운 힘을 주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사명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시는 것이 바로 주님의 은혜요 부활의 신앙입니다. 부활 신앙은 그러므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필요를 채우시기를 원하십니다.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한 번 그물을 던져 큰 물고기 153마리를 잡도록 하신 주님이십니다. 밤새 수고하고 배고픈 제자들을 위해서 아침을 준비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이 오늘 우리들의 필요를 따라 채우시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바 부활의 은혜입니다. 없는 것으로 있게 하시고 부족한 것을 넘치도록 채우시며 낙심한 자들에게 새롭게 힘을 내어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바로 부활의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부활 신앙은 잃어버린 사명의 회복입니다. 우리는 주의 일을 힘써 하다가도 때로는 지치기도 하고 때로는 낙심하기도 하고 때로는 좌절하기도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다 포기해 버리고만 싶을 때도 있습니다. 다 내어놓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에게로 오셔서 우리들의 힘을 북돋아 주십니다. 다시 힘을 내어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때 주님이 우리에게 묻는 것은 단 하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우리는 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남들처럼 잘 하지는 못해도 여전히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것을 주님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묻고 계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여전히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다시금 내게 주어진 일에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이 사명을 회복시키시며 주님은 사명 감당을 위해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혜로 힘써 수고하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일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은혜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이렇듯 잃어버린 사명을 다시금 회복시켜 주닙니다. 그러니까 사명의 회복이 바로 부활의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이 무엇입니까? 이 맡겨진 사명을 가지고 이제는 우리가 수고하여야 합니다. 아니 이 부활의 주님을 만천하에 전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가 지금까지 수고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없습니까? 과연 될까 싶습니까? 아닙니다. 자신을 가지십시오. 이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요 주님이 우리들에게 맡겨주신 일입니다.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나가십시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함께 하시는 일에 실패란 없습니다. 내가 감당치 못할 시험도 없습니다. 주님이 피할 길을 내시고 주님이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부족하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했던 야고보의 말처럼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한 것들을 주님께 구하여 풍족하고 강력하게 바꾸어가는 귀한 역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따라 맡겨진 사명을 회복하고 힘차게 주님을 섬겨 예배하며 나가서 복음을 전하며 우리에게 맡겨진 모든 일에 충성을 다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교훈은 바로 용서를 통한 사랑의 회복입니다. 가장 힘들기에 용서는 그만큼 보람된 일입니다. 그 고통 가운데서 용서를 비는 기도를 드린 주님처럼 그렇기에 우리도 고통스럽기에 더욱 용서로 다가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은 평안한 마음으로 교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함께 만나고 함께 지내는 것이 누구보다도 편안할 수 있어야 된단 말입니다. 누구 때문에 불편한 것이 아니라 그 불편한 사람조차도 편안한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바로 평안을 통한 교제의 회복입니다. 그래서 함께 만나는 것이 즐겁고 그 무엇보다도 편안하도록 되어야 합니다. 이는 곧 신뢰의 회복이기도 합니다. 상대방을 의심하지 말고 믿어주는 것입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상대방을 대하게 되면 불편했던 모든 것이 사라지고 끝까지 믿어주고 사랑해주면 잘못되었던 것조차도 바르게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믿음은 이렇게 어그러진 것들을 바로 세워가는 것입니다. 또한 부활의 신앙은 은혜의 회복이기도 합니다. 무언가 잘못되어 무언가 마음의 상처로 인해 우리 가운데서 사라져가는 은혜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 바로 부활의 신앙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끊임없이 재확인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비록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해서 쓰러지고 넘어져도 그러나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의 여전하다면 우리는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여전히 사랑을 베풀어주시고 필요한 모든 은혜와 능력으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용서하는 사랑을 가지고 함께 만나고 함께 있는 것이 더 이상 불편한 것이 아니라 편안하도록 그렇게 우리는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을 가지고 찾아가 만나고 사랑의 주님을 전해주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일에 다시금 열심을 내도록 만들어 가는 것이 바로 부활 신앙입니다. 이 주님을 우리들이 마음에 믿음으로 품은 귀한 생명들에게 전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열심을 가지고 우리가 그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오늘 부활 주일을 맞아 이 귀한 은혜와 사랑으로 평안을 누리며 다시금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재확인하는 귀한 시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홍인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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