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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사망아 사망아 (호 13:11~11, 고전 15:5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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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주일을 맞이하여 주님의 부활이 우리의 삶을 소생하게 하는 능력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 부활의 증거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순절 특별새벽기도회로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참여한 모든 분들이 부활의 영광에도 참여하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더운 지방에 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여행지에 도착하여 아내에게 이메일을 보냈는데 메일이 잘못 배달되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방금 돌아가신 할머니에게 배달된 것입니다. 할머니는 이메일을 보는 순간 펄쩍 뛰더니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메일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방금 도착했소, 당신이 내일 이 곳에 도착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끝냈소. 추신-약간 더울 줄 알았는데 매우 뜨겁소”.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모르고, 부활을 모르면 놀랄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반면에 구원받고 죽음을 아는 사람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고, 죽음 이후의 부활을 아는 사람에게는 죽음은 즐거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죽음은 행복한 나들이입니다.

  버트란드 러셀은 ‘나는 왜 크리스천이 아닌가?’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은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지는 것은 은혜입니다. 복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부활을 믿고, 부활을 전제로 한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참으로 행복하고, 힘 있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죽음 이후의 부활을 알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극복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죽음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며, 생명의 종교입니다. 요한복음 11:25에서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친히 부활이며 생명이라고 하셨기에 예수님의 부활과 생명이 우리 기독교의 근거가 된 것입니다. 이미 죽음을 초월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로마서 14:8에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미 죽음도 삶도 다 하나입니다.

  그리스도는 죽음을 맛보셨으나 죽으신 분이 아니라 사신 분입니다. 기독교는 죽음의 종교가 아니라 생명의 종교인 것도 이 까닭입니다. 그리피스 토마스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육체를 “비록 다르지만 동일하고 비록 동일하지만 다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죽음이나 부활이나 죽음 이전의 몸이나 부활 이후의 몸이나 예수님께는 동일한 것입니다.
  교회는 인간의 타고난 두려움과 죽음을 극복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교회 경내 묘지에 시체를 묻고, 시체를 더러운 것이라고 보지 않고, 산자와 죽은 자를 하나로 보고, 생사를 극복한 것이 교회였습니다. 프랑스 교회가 제일 먼저 이 일을 하였다고 합니다. 저는 우리의 정서는 다르지만 우리 교회에도 그렇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죽어서 우리의 몸도 교회 안에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임상적으로 말하면 죽음이란 호흡이 없고 심장이 정지된 상태이고 뇌의 활동이 중지된 상태라고 합니다. 인간이란 태어나서 자라고 발전하며 성숙되고 노쇠하며 죽게 됩니다. 죽음을 흔히 이생과 삶과의 단절이라고 합니다. 영원한 이별 혹은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슬픈 것이 죽음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슬픈 것만은 아닙니다. 죽음 이후의 삶을 아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당당합니다. 슬프지만 기쁨도 함께 있습니다. 영원으로 향하는 길목이며 우리 믿음의 영화의 단계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충만 된 낮의 생활도 수면의 기쁨을 주지만 인생은 죽음의 기쁨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부활을 아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이런 고백은 있습니다. 죽음의 기쁨은 어떤 기쁨보다 더 한 기쁨입니다.
  부활을 증인이며 생명의 사도인 바울은 죽음과 생명을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알기에 당당히 죽음과 맞서고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사망은 승리가 없습니다. 사망은 쏘는 것이 없습니다. 요즘은 “일본은 없다”, “예수는 없다”는 책도 있습니다. “태양은 없다”는 영화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사망은 없다”입니다.
  부활의 빛 아래서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부활의 빛 아래서 사망을 보십시오. 이 아름다운 부활의 아침에 “사망아, 사망아” 하신 말씀을 들으시고 죽음을 이길 수 있는 부활의 증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사망은 승리하지 못하고 부활은 승리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하신 말씀은 사망은 승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마치 사탄이 승리한 듯이 보이는 사건입니다. 사탄의 웃음소리가 들립니다. 그러나 잠시 후 사탄은 자신이 졌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죽음은 예수님의 승리입니다. 죽음은 예수님의 최후의 기적입니다. 요한계시록 21:4에는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합니다. 죽어야 재미있고, 애통하고 곡하고 아파야 재미있는 사탄의 세력이 더 이상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승리하신 것입니다.
  존 뮤즈필드의 희곡 “예수님의 시련”(The Trial of Jesus)에서 빌라도의 아내 프로큘라는 부활의 소식을 듣고 흥분하여 로마 군인 롱기누스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그분이 죽으셨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 그분은 어디에 있다고 봅니까?” “그분은 세상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유대인이나 로마인이나 그 다른 어느 누구라도 그를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망에, 무덤에 갇혀 있지 않으십니다. 벌써 사망을 물리치고 일어나셨습니다. 유대군중의 소리에, 유대인의 고소에, 빌라도의 재판정 앞에서, 대제사장의 심문에 진 것 같지만 승리하셨습니다.
  오스카 해머스타인의 ‘쇼 보트’에는 “사는 걸 지겨워하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의 죄이지만 죄는 승리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죽음에 가두어두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일어나셨습니다. 우리도 죽음에 가두어두지 못합니다. 우리도 언젠가 반드시 일어납니다.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합니다. 부활은 사망을 삼킵니다.

  우리들은 어떤 이가 죽으면 고인을 애도하기 위하여 모든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는 이미 경쟁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죽은 자는 다시 사는 승리를 하기 때문입니다. 산 자는 누구도 아직 승리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는 많이 있습니다. 무덤이 비어 있었습니다. 죽은 후에 무덤을 자랑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습니다. 피라미드는 고대 애급의 바로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타지마할은 인도의 한 왕이 왕비를 위하여 지은 묘지로 당시의 위용을 자랑합니다.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는 레닌의 묘가 있어서 당시의 힘을 자랑합니다. 이런 자랑이 다 헛것입니다. 예수님의 정돈된 무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예수님의 수의는 잘 개켜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자들의 증언이 부활을 증거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목격자들의 활동이 부활을 증거합니다. 그들이 사실이 아닌 것을 가지고 그렇게 확실하게 주장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증거가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는 결과를 보아 부활을 알 수 있습니다. 거짓이라면 그렇게까지 확대될 수 없을 것입니다.

  로마서 6:9에는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고 합니다. 다시 죽지 않는 것이 부활입니다. 다시 죽으면 부활이 아닙니다. 다시 죽지 않는 부활은 사망이 다시 주장하지 못합니다. ‘글래디에이터’를 보면 둘이서 싸우다 한 사람이 죽으면 싸움은 끝나고 산 자가 승리합니다. 산 자가 승리하는 것이지 죽은 자는 아무리 싸움을 잘 해도 승리하지 못합니다.
  사망을 주관하는 사탄과 생명을 주관하는 하나님은 처음부터 게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하나님은 사탄에게 잠시 동안 허용하십니다. 언젠가는 사탄의 이 권세는 끝날 것입니다. 다시 죽지 않는 부활은 사탄으로 하여금 영원히 죽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요즘 ‘귀차니즘’이란 말 들어보셨습니다. 귀차니즘은 모든 일이 귀찮아서 좀처럼 움직이길 싫어하는 것을 의미하는 요즘 세대들의 말입니다. 일어나기가 귀찮아서 누워서 컴퓨터를 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치우기가 귀찮아서 쓰레기를 방안에 차곡차곡 쌓아놓습니다. 어떤 인터넷 사이트에는 ‘귀차니즘 3대 원칙’이란 제목이 있습니다. 열어보면 빈칸입니다. “쓰기 귀찮다”는 한 마디를 남겨 놓았습니다. 귀차니즘 절정이란 글을 열어보니 차선을 긋는데 나무가 하나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나무를 치우지 않고 길의 차선을 나무가 쓰러진 곳을 따라 휘게 그어놓았습니다. 한국인의 귀차니즘은 실용적이며 편리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미화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귀차니즘의 결정체가 요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산 사람이 왜 죽은 듯이 삽니까? 뭐가 그렇게 귀찮은지 모르겠네요. 간편하고 실용적으로 사용하자는 건 좋지요. 그러나 만사가 귀찮으면 문제입니다. 살아있다는 의미가 대단한 것입니다. 살아있는 즐거움을 느껴야 합니다. 살아있는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승리는 언제나 우리의 것입니다. 사탄이 영원히 지배한 나라는 없습니다. 사탄이 영원히 승리한 적은 없습니다. 산 자처럼 힘차게 삽시다. 적극적이며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삽시다. 활기 있게 일하고 삶도 죽음도 즐겁게 맞이합시다.

둘째, 사망은 죄 때문이며 부활은 죄를 극복합니다.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세는 율법이라”고 합니다. 죄는 사망을 낳습니다. 창세기 1:27에는 “이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십니다. 인간의 시조 아담은 선악을 하는 열매를 먹고 죽었습니다. 사망은 불순종의 대가입니다. 사망은 죄 때문에 인간에게 다가온 형벌입니다.

  로마서 7:11에는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도다”라고 합니다. 죄는 사람을 죽입니다. 부활은 죄를 극복하게 합니다. 저의 부끄러운 일을 고백합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쯤입니다. 그 때 저의 선친께서는 미국에 박사 공부하러 가셨고 어머니와 저의 4남매가 가난하고 힘들게 살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무엇을 사러 갔는데 그 때 제가 거스름돈 50환을 때어먹었습니다. 이 일이 어머니에게 발각되어 어머니께 얼마나 호되게 야단을 맞고 매를 맞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저의 어머니께서 “내가 아들을 이렇게 키웠으니 내가 죽어야겠다”고 하시면서 수건으로 당신의 목을 조르시는 겁니다. 저의 형님과 저와 동생은 놀라서 말리고, 두 손으로 싹싹 빌었습니다. 그 때 얼마나 혼이 났는지 모릅니다. 결국 저는 용서를 빌고 용서를 받았습니다. 발각이 되긴 했지만 용서를 받고 나니 그 다음부터는 그 죄에 대하여 얼마나 자유한지 몰라요. 죄는 죽이는 것이지만 용서는 살게 하는 것입니다. 용서함은 죄를 극복합니다. 그 때 죽는다는 저의 어머니는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부활은 다시 죄 가운데 사는 일이 없습니다. 모든 죄를 다 용서받고 죄를 극복하는 것이 부활입니다. 우리의 하나하나의 죄를 다 극복하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 부활입니다. 부활은 죄와는 아주 먼 것입니다. 죄는 죽게 하지만 부활은 다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탈리아 밀라노 대성당에는 세 개의 아치가 있습니다. 첫 번째 아치에는 장미꽃이 새겨져 있으면서 “모든 즐거움은 잠깐이다”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두 번째 아치에는 “십자가와 함께 모든 고통도 잠깐이다”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중앙통로로 연결된 세 번째 아치에는 “오직 중요한 것은 영원한 것이다”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모든 것이 잠깐이지만 영원한 것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새 생명입니다. 부활의 생명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부활 신앙만이 영원한 것입니다.

  부활은 죄를 극복하기에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고통을 이겨냅니다. 삶의 힘이 있습니다. 살아가는 모습이 당당합니다. 호세아 13:14에는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스올아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눈 앞에서 숨으리라”고 합니다. 사망도 음부도 멸망도 다 이제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제는 승리와 영광이 있을 뿐입니다.

결론

  어느 초등학교 학생이 시험문제에 이런 답을 썼습니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사람은?” 답은 “죽었다”입니다. 그 밑에 누가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교무실로 와”. 거트루드가 햄릿에게 말한 것처럼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죽습니다”. 그러나 그것밖에 모르면 불행입니다. 우이가 아는 것은 우리 모두가 “다시 삽니다”.

  예수님은 다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사십니다.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라 바꿈표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로 바꾸신 것입니다. 파울로 코엘료가 ‘연금술사’에서 말한 대로 죽음으로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마틴 루터는 온갖 박해와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자기 서재에서 흥분의 격동 속에서 크레용으로 방 마루와 창틀에 ‘주님은 살아나셨다’, 주님은 ‘살아나셨다’라고 썼습니다. 이 감격은 어떤 생명의 위협도 삶의 고통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죽음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죽음이란 의미를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부활을, 영원한 생명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부활은 우리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사망아 물렀거라”, “사망은 없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 부활의 증거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신비한 부활의 능력으로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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