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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 그 이후 (요 21: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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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목일만 나무 심나?

우리 옛날로 한 번 돌아가 볼까요? 제가 어렸을 적에 열심히 부르던 동요가 있습니다. 󰁔산에 산에 산에다 나무를 심자 산에 산에 산에다 옷을 입히자 메아리가 살게시리 나무를 심자♫ 지금은 이 동요 가사에 나오는 ‘벌거벗은 붉은 산’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이 노래를 안 부릅니다만 저 어렸을 때만 해도 정말 민둥산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1946년 우리나라에 식목일이 제정되어 이 날만 되면 대통령부터 온 국민이 정말 열심히 나무를 심었고, 지금도 여전히 식목일마다 부지런히 심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식목일 이후입니다. 분명 식목일을 제정한 것은 이 날 하루만 나무 심으라는 뜻이 아닐 텐데 많은 사람들이 이 날 하루만 법석을 떨다가 식목일이 지나면 나무 심는 일을 잊어버리고, 심지어 식목일에 심은 나무 묘목도 돌보지 않아 말라 죽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부활절도 꼭 식목일과 같습니다. 부활절까지는 교회들마다 참 많은 의미를 두고 열심히 행사를 합니다. 사순절을 지키며 사십일 특별새벽기도회를 하는 교회도 많습니다. 고난주간을 지키고 금식을 하고, 우리 교회처럼 성금요일 예배를 드립니다. 부활절이 되면 온 교회마다 축제 분위기로 예배를 드리고 계란을 삶고, 부활절 칸타타를 연주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부활절만 딱 지나면 완전히 끝입니다. 단 하루만 지나면 아무도 부활절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식목일처럼 분명 예수님의 부활을 부활절 하루만 기억하라는 뜻은 아닐 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력에도 보면 ‘부활 후 첫째 주일, 둘째 주일’ 하고 계속 절기가 이어져 성령강림주일까지 일곱 주간 계속됩니다. 주보에도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교회력이나 주보에 나와 있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관심 없습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라는 말씀으로 시작되는데 여기서 ‘그 후에’란 바로 부활사건 후를 의미합니다. 디베랴 바다란 갈릴리 바다의 별명인데 2절에 보면 여기 모여있던 제자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세베대의 아들(야고보와 요한), 또 다른 제자 둘(누구인지는 모름) 모두 일곱 명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왜 갈릴리 바다에 와 있었을까요? 마태복음 28:10에서 주님이 "갈릴리로 가서 나를 만날 준비를 하라"고 하신 말씀에 순종해 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기다리다가 조금 무료해 진 모양입니다. 본업이 어부인 베드로가 물고기 잡으러 간다고 하자 다른 제자들도 따라나서게 되는데 밤새도록 아무 것도 잡지 못합니다. 베드로는 고기 잡는 전문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 나름의 방법으로 아무리 노력을 해도 못 잡으니 실망이 컸을 것입니다. 우리도 내게 생긴 문제들을 내 나름대로 내 힘으로 해결해 보려고 할 때 이런 일이 생깁니다. 더욱이 영적인 고기잡이, 전도는 절대 내 힘으로나 내 경험으로 안 됩니다. 그러다가 나는 아무래도 전도하고는 거리가 먼가보다 하며 크게 실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4절을 보십시오.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 못 잡고 날이 샜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 바닷가에 서계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왜일까요? 아마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처럼 제자들의 영안이 열리지 않아서 알아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눅 24:16).

이 때 주님이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하시니 제자들이 순종하여 153마리라는 많은 고기를 잡게 됩니다. 이 장면은 마치 예수님이 처음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실 때와 비슷합니다(눅 5:1~11).

그런데 그 다음에 참 재미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고기를 많이 잡은 후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이 제일 먼저 예수님을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주님이라고 가르쳐줍니다. 요한은 이적이 일어난 후 곧바로 그분이 예수님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은 제자답게 제일 먼저 알아본 것인데 이것을 보면 요한은 매우 섬세하며 직관적인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깨달음을 실천으로 옮기는 능력은 약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우두머리 격인 베드로에게 저 분이 예수님이라고 알려준 것입니다. 그러자 물고기 잡느라 벗고 있던 베드로가 주님께 예의를 갖추느라 겉옷을 두른 후 곧바로 바다로 뛰어 내립니다. 늘 그렇듯 행동이 앞서고 뭐든지 곧바로 실천으로 옮기는 모습입니다. 그러면 직관력이 뛰어나지만 실천력은 약한 요한과, 직관력은 떨어지지만 실천력이 강한 베드로 중에 누가 더 주님에게 필요한 제자였을까요? 둘 다입니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 온갖 성격과 특징을 가진 사람들이 다양하게 모여 있습니다만 주님은 그들의 다양한 성격과 능력을 절묘하게 조화시켜 주님의 일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그러니 서로 판단하고 비난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모두가 주님의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런데 조반 후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다른 제자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다른 제자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일까요? 요한복음 13:37에 나온 베드로의 장담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죽으러 가는데 너희는 따라 올 수 없다"고 하시자 베드로가 큰소리치면서 "무슨 말씀입니까? 저는 어디든 따라가겠습니다. 주를 위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장담합니다. 그래서 지금 주님은 "베드로야, 네가 그렇게 장담까지 했는데 정말 다른 사람들보다 어떤 제자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것 맞니?"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 말은 "내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주님이 아시지 않습니까?"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한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그런데 주님이 두 번째로 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베드로도 똑같이 대답합니다. 그런데 또 세 번째 물어보시자 베드로는 "왜 같은 질문을 세 번씩이나 하실까?" 불안한 생각이 듭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주님을 부인한 사건(요 18:12 이하) 때문입니다. 세 번 부인했으니 세 번 물으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에도 조심할 부분이 있습니다. 잘못해서 "베드로 너 세 번이나 날 부인했지? 그러니까 나도 똑같이 세 번 물어본다."는 식이 되면 예수님이 아주 속 좁은 분이 되고 맙니다. 오히려 주님이 세 번 물어보신 까닭은 내가 예수님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 장담하고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의 허물을 없애주기 위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너무도 못난 자신에게 크게 실망하고 지금까지도 많은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베드로를 책망하기는커녕 "베드로야, 네가 아무리 순간적으로 그런 실수를 했어도 나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지?"라고 물으십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 정말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할 때 그 허물을 씻어주고 다시금 베드로를 회복시켜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양을 치는 목양의 사명입니다. 이제 주님은 곧 승천하실 텐데 두고 가야할 양들, 너무도 연약하고 혼자 남겨두기엔 불안한 어린양 같은 제자들과 성도들을 걱정돼서 그들을 대신 돌보는 목자의 사명을 배신자 베드로에게 맡기신 것이지요. 흠 있는 양은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질 수 없듯이 사람도 마음속에 허물이 해결되지 못하고 상처가 많으면 결코 하나님의 일에 사용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배신자 베드로를, 그리고 오늘도 허물 많은 우리들을 용서하사 이렇게 못난 자에게도 큰 사명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이렇게 사명을 주신 후 예수님은 베드로의 최후에 대해 예언하십니다.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18절) 베드로가 젊었을 때는 스스로 원하는 곳에 다니며 복음 전하겠지만 늙어서는 다른 사람에 의해 억지로 끌려가 순교당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 때 베드로는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어디든지 따라가겠다고, 죽음도 두렵지 않다고 큰소리 친 자신이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는데 이렇게 못난 나를 주님이 용서하고 큰 사명을 주시니 얼마나 놀랍고 감사하겠습니까? 그러니 이제 정말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주를 위해 얼마든지 순교의 길을 갈 각오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문제가 생깁니다. 베드로 자신은 얼마든지 순교하고 죽음의 길도 갈 각오가 되어 있는데 가만히 보니 지금 예수님 곁에 예수님 사랑하시는 제자, 누굽니까? 바로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의 품에 폭 안겨서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입니까"라고 묻던 요한이 있었던 것입니다. 순간 베드로의 마음속에 한 가지 강한 의문이 떠오릅니다. "주님, 저는 그렇다 치고 그러면 이 요한이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한도 저처럼 순교합니까?" 사실 인간적으로 얼마든지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지요. 그런데 이 질문을 받은 예수님이 "걱정 마라, 요한이도 너처럼 순교한다"고 말씀하시면 좋겠는데 참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이 말은 "내가 재림할 때까지 요한이를 살려둘지라도 너는 상관하지 말고 나를 따르기나 해라"는 뜻입니다. 참 인간적으로 섭섭한 말씀입니다. 실제로 사도 요한은 나중에 밧모 섬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수명을 다하고 자연사한 유일한 제자가 됩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섭섭해 하거나 삐쳤을까요? 아닙니다. 차별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랬겠지만 베드로는 수제자답게 분명 예수님이 어떤 뜻으로 이런 말씀을 하는지 알아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뜻은 무엇인가? 사명에는 1:1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사명 주신 주님과 그 사명 감당하는 나 둘만 존재하면 됩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사명 받고 감당하는 데는 다른 사람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나 한 사람만 충성스럽게 잘 감당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1:1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고 교회 일을 하면서도 자꾸 베드로처럼 궁금해 합니다. "나는 그렇다고 치고 그럼 저 사람은 뭐야? 저 사람은 일 잘 하고 있나?" 괜히 남의 일에 관심 갖고 기웃거립니다. 괜히 남 잘하나 못하나 판단하려고 합니다. 내게 맡겨진 일만 잘 감당하면 되는데 괜히 남들과 비교해서 왜 나한테는 이런 티도 안 나고 별 볼일 없는 일만 맡기고, 저 사람은 저렇게 멋지고 그럴듯하고 편한 일만 맡기냐며 섭섭해 하고 삐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해마다 일군임명하면 꼭 이런 분들 나옵니다. 하지만 이런 분들에게 분명히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얘야, 사명은 1:1이란다. 남 신경 쓰지 마라. 괜히 남 신경 쓰다 너 할 일 못한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맡기든, 어떤 길로 인도하든 신경 쓰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기만 해라, 네게 맡겨진 사명 잘 감당하기만 해라"고 말입니다.

부활 후 주어진 사명

이제 다 같이 갈라디아서 2:20 말씀을 읽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무슨 뜻입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 다시 살아났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는 체험을 했다. 그런데 이제 내가 다시 산 것은 무엇 때문인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나는 나 자신만 위해 살았는데 이제 부활한 후 나는 날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님을 위해 사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즉 부활 후 내 인생이 완전히 바뀌고 내 삶이 목적이 송두리째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을 위해 사는 삶,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인생으로 말입니다. 이것이 사명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사건도 중요하지만 부활하신 이후에 일어난 사건도 이에 못지않게 정말 중요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디베랴 바다까지 오신 것은 오로지 베드로를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허물 많은 베드로, 못난 자신에게 실망해 자신감과 능력을 다 잃은 베드로를 만나 그 허물을 씻어주고 회복시키려고 말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부활입니다. 그리고 회복되고 부활한 베드로에게 위대한 사명을 주십니다. 말로만 큰소리치던 베드로가 이제는 정말 주님만 위해 사는 인생으로 바뀌고, 기꺼이 목숨도 바치는 베드로가 됩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찾아오십니다. 세상에서 좌절하고 실패해서, 나 같은 게 무슨 하나님의 일을 하겠냐며 열등감에 사로잡힌 우리에게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내가 지금 너에게 원하는 것은 딱 한 가지란다. 대단한 자격이나 조건이 아니야. 아주 단순한 조건 하나뿐이란다. ♫사랑하는 하준아(자기 이름 넣기)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가 "♫오 주님 당신만이 아십니다󰁔"하고 대답하면 주님은 우리에게 위대한 사명을 주십니다.(이하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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