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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정한 안식 (마 1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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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은 안식일 논쟁과 치유 논쟁과 표적 논쟁을 통해서, 예수님과 유대 지도자들 사이에 마찰이 점차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1장 말미에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쉼’에로 초청하셨는데, 이것은 오늘 본문에서 다룰 ‘안식’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안식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유대인들의 ‘안식일’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복음서를 종합해보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사건은 모두 7차례 였습니다(막 1:23-28; 요 5:1-15; 마 12:1-8: 마 12:9-21; 요 9:1-41; 눅 13:10-17; 눅 14:1-6). 첫 번째 사건을 제외하면 나머지 사건들은 모두 종교 지도자들의 반감과 핍박을 야기했습니다. 14절을 보면 이 일들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죽일 공모를 합니다. 예수를 처단하기 위해 바리새인들은 평소에 적대적인 관계였던 헤롯당과 손을 잡기까지 했습니다(막 3:6).

왜 종교지도자들은 이처럼 안식일에 집착을 했을까요? 우리는 유대인들을 생각하면 율법이나 번제나 성전이나 할례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근동의 이방민족들에게서도 할례가 있었고 신전이 있었으며 번제와 계율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만의 특징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안식일’은 오직 유대교에만 있는 독특한 상징이었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은 그들로 모든 민족들과 구별되게 하며 선민의식을 고취시켜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고자 하는 의식이 강렬해졌습니다.

안식일을 성수하고자 하는 그들의 집착은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10)는 한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장로들의 유전’이라 불리는 39조 234항의 부가 세칙들을 만들게 했습니다. 그 세칙들에 의하면 안식일에 6스타디아(약 1,200 미터) 이상의 여행과 무화과 두개 무게 이상의 짐을 드는 것은 금물입니다. 음식을 장만하는 것이나 부부관계도 금지되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일’에 해당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근거가 희박한 세칙들은 너무 많아서 마치 ‘머리카락 한 올에 많은 산들이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꼴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안식일을 소중히 여겼던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노골적으로 ‘안식일’을 파기하는 예수님을 그냥 둘 수 없었습니다.

1절을 보면 이 날도 그들의 눈에 거슬리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밀밭 사이로 지나가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었기 때문입니다. 신 23:25절에 의하면 이웃 사람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 낫을 대지 않는다면 손으로 이삭을 잘라 먹는 일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된 것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 곧 안식일에 추수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두 가지 예를 들어 제자들을 변호하셨습니다. 이 변호의 초점은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하지 않았다’는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런 ‘안식일 율법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변호입니다.

3-4절을 보면, 다윗은 시장할 때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만든 장로들의 유전을 범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 자체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일로 인해 범죄자로 비난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그가 생명의 유지를 위해 불가피하게 했던 일을 전혀 문제 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논리는 어떤 것입니까? 율법의 요구를 뛰어넘는 행동을 할 수 있는 권위가 메시아의 그림자인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자들에게 허용되었다면, 메시아이신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권위는 장로들의 유전의 요구를 뛰어넘는 행동을 했다 해서 비난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구약 율법에 의하면 제사장들은 ‘성전 안에’ 있다는 이유로 안식일에 많은 일을 하고 있지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5). 성전 안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곳이며 하나님께 나아가 죄 사함을 받고 관계가 회복되는 곳입니다. 그 신성한 권위 때문에 성전 안은 안식일 법의 대해서 치외법권 지역이었습니다. 그 성전은 장차 메시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 죄 사함을 받고 관계가 회복될 것을 나타내는 그림자였습니다. 메시야이신 예수님은 그림자인 성전이 내다보았던 원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를 성전보다 크다고 선언하셨습니다(6). 그렇다면 성전의 원형이신 ‘예수님 안에’ 있는 제자들도 제사장들처럼 안식일 법을 뛰어넘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잘 지키고자 했던 바리새인들의 동기는 잘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방인과는 분명하게 구별된 삶을 살고자 했던 그들의 동기는 존중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세칙들을 만들어내면서 본래의 안식일 정신을 잃어버렸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구별하신 본래 목적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인간들에게 쉼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의 종들과 짐승들은 안식일에도 죽어라고 부림을 당했지만, 이스라엘의 종들과 짐승들은 일주일에 하루를 쉴 수 있었습니다. 모든 일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창조하심과 구속하심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가운데 하루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안식일은 하나님의 자비의 표현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잘 지키려는 의욕으로 오히려 더욱 무거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놓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정신을 잃어버린 그들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7-8)

창조된 인간이 맞이한 첫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곧 인간은 안식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만약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그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을 누리다가 영원한 안식으로 옮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범죄로 안식이 깨어졌습니다. 인간에게는 쉼이 없어졌고 대신 종신토록 수고와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안식을 잃어버린 인간에게 부분적이나마 안식을 회복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안식일’ ‘안식년’ ‘희년’ 같은 율법이었습니다. 그것은 통해 장차 하나님께서 온전히 주실 안식을 소망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그 목적이 성취되었습니다. 이제는 안식일과 같은 제도, 혹은 성전과 같은 건물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만민이 안식을 누릴 수 있게끔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8)으로 선포하셨습니다. 구약 성경은 안식일에 대한 주권이 하나님께만 속해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출 16:23). 하나님만이 안식일에 이 일은 하라, 혹 이 일은 하지 말라고 규정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주권을 당신께서 가지셨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안식일 율법을 범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변호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안식일의 성취자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안식일의 정신을 성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변호를 받은 것입니다. 즉, 제자들은 참된 성전이시며 참된 안식일이신 ‘예수님의 주권 안에서’ 그분과 동행하면서 성취된 안식일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구약의 안식일을 문자 그대로 지킨 것이 아니라 성취된 율법의 정신을 따라 지키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의 참 정신을 잃어버린 바리새인들은 점점 더 악한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10절을 보면 그들은 안식일에 일하시는 예수님을 송사하기 위해 함정을 마련했습니다. 한편 손 마른 사람을 내세워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지도자로서 누구보다 병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비의 마음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연약하고 힘없는 병자를 자기들의 사악한 목적을 위해 이용합니다. 선악의 분별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 중에 있는 양을 안식일에 건져내는 것이 중요하다면, 고통 받는 한 사람을 안식일에 치료하는 것은 더 합당하다고 대답하시며 한 편 손 마른 자를 치료해 주셨습니다(11-13).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더욱 마음이 악해져서 예수님을 죽일 방도를 모의하게 되었습니다(14).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겠다는 동기로 시작했다가 오히려 신앙의 정신을 잃어버리는 안타까움이 오늘날도 많습니다. ‘성전 건축’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겠다는 미명아래 각종 편법과 불법을 행하며, 오히려 성전 되신 예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영광을 가리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주일 성수’를 강조하며 많은 프로그램을 도입하면서도, 하루를 구별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각함으로서 나머지 육일 동안에도 그 주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려는 주일의 정신을 잃어버린 것이 안타깝습니다. 주일 하루만 때우면 육일은 마음껏 육신적으로 살아도 될 것처럼 생각하는 것, 십일조만 내면 나머지는 마음껏 세속적 욕망대로 사용해도 될 것처럼 생각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주님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는 바리새인적인 마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하려 하기 전에, 먼저 주님 안에서 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의 일을 즐거워하기 전에 먼저 주님 자체를 즐거워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님 안에 있는 참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종교적 열정만큼 위험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참 안식이 어디에 있으며 어디서 오는지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한다고 하나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며 그 분의 영광을 가릴 뿐입니다.

15절을 보면 예수님은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회당에서 안식하지 못하던 그들이 예수님을 통해 안식을 얻습니다. 이 예수님에 대해 마태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20-21)하신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병도 많고 탈도 많은 인생입니다. 언제나 돌아보면 허물과 죄악도 많아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갈은 모습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죄인을 사랑하셨던 우리 주님은 지금도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그분은 모든 허물과 죄를 가려주시고 결코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의인이라 칭하십니다. 그 형용할 수 없는 은혜가 우리 마음으로 안식을 얻게 합니다. 이 주님의 은혜 안에서 오늘도 안식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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