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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윗이 주님께 여쭈었습니다 (삼상 23:1-5, 빌 4:4-8, 마 6: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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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더 싱에 관한 이야기로 기억이 되는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선더 싱이 자기 동료와 함께 큰 눈이 쏟아지는 날 높은 산을 넘게 되었습니다. 얼마를 가다 보니까 한 사람이 눈 속에 쓰러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살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더 싱은 동료에게 “우리가 이 사람을 구하여 번갈아 엎고서 이 산을 넘어가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그 동료는 “이 폭설과 추위에 나 혼자 몸 가누기도 어려운데 다 죽어가는 사람을 어떻게 업고 갈려고 하느냐?”라고 하면서 혼자 가버렸습니다. 선더 싱은 할 수 없이 혼자서 그 사람을 업고 낑낑 산을 올라갔습니다. 얼마나 힘이 들었든지 그 추위에도 불구하고 온 몸에 땅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얼마를 가다 보니 또 한 사람이 눈 속에 쓰러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아까 선더 싱을 버려두고 혼자 떠나갔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사람은 이미 숨이 멎어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선더 싱의 등에 업혀온 그 사람은 선더 싱의 체온에 의하여 정신이 들어 깨어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하면 잃고 자기 목숨을 버리면 얻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위하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을 위하는 일입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외면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相生의 원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네가 있을 때 나도 있고, 너의 승리가 곧 나의 승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너 없으면 나도 없다”는 결론입니다. 사도 바울은 “발이 손더러 이르되 너는 발이 아니니 몸에 붙어 있지 않다”라고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손은 발이 아니기 때문에 발에게 손은 절대로 필요한 지체입니다. 우리 서로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흔히 나와 다르다고 해서 비판하고 반대하고 외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엄청난 착각은 없습니다. 끼리끼리만 모이는 것은 교회 공동체가 아닙니다. 다양성 속에 일치를 이루는 여기에 교회 공동체의 신비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우리에게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은 우리 교회 표어대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 서로 사랑하게 되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게 되어 각 사람이 든든하게 설뿐만 아니라 교회가 더욱 온전하게 성장하게 됩니다.

2. 오늘 본문에 다윗이 그일라를 구원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됩니다. 그일라는 현재 다윗이 숨어있던 아둘람에서 남쪽으로 한 5km떨어진 유다 땅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치안이 제대로 확립되지 못했기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에 의하여 숱한 고난과 약탈을 당하게 됩니다. 애써 1년 농사를 지어놓으면 떼 지어 와서 다 약탈해 가곤 했습니다. 그런데도 사울왕은 오직 다윗 찾기에만 골몰하느라고 이런 국민들의 비참한 사정을 전혀 돌아보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럴 테면 데모 막는데 만 치안력을 집중하노라고 온통 사회를 어지럽히는 강력범을 잡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다윗자신도 망명객이 된 형편인데 누군가 이런 그일라의 비참한 사정을 다윗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이런 말을 들은 다윗의 생각은 어떠했습니까? “내 몸 하나 숨기기에도 급한데 남 돌아 볼 여지가 어디 있는가?”라고 했습니까? “그런 것은 국가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외면했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이 말은 이미 다윗의 마음속에 그일라 사람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아직 다윗은 왕이 아닙니다. 그러나 고난 받는 동족을 위할 마음이 있다는 것은 그의 왕 될 자질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일찍이 다윗은 자기 양을 지킬 때 그 양을 위하여 자기 자신의 위험까지도 돌아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다윗을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리고 저 미치광이 같은 사울과 비교해 볼 때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맞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직 왕이 아니면서도 동족의 아픔을 보고 어버이다운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 바로 왕적인 도량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 대한 관심이 너무도 부족합니다. 마치 강도 만난 사람을 외면하고 피해서 가버린 레위인이나 제사장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우리에게 모델로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마치 다윗의 동료들과도 같습니다.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자신들의 존재가 노출되는 것도 위험하기 짝이 없거니와 새로운 적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화약을 들고 불로 뛰어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우리가 유대로 가자, 나사로를 깨우러가자”고 했을 때 제자들은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얼마 전에 이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 사지로 다시 들어가겠다고 하시니 제자들이 막고 나섰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의 인정에 끌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 유대 땅으로 다시 들어가셔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나사로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다윗은 놉에서의 실패를 뼈저리게 기억합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기 임의대로 행했다가 얼마나 많은 제사장을 죽게 했습니까? 이제 다시 그런 전철을 밟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안전할 것이냐 위험할 것이냐를 따지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어떠하신가를 물었습니다. 동료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을 때 그는 제차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5절을 보면 “다윗과 그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쳐서 죽이고...그일라 주민을 구원하니라”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셨습니다. 구원의 큰 역사를 이루어주셨습니다.

우리는 게쎄마네 동산에서의 우리 주님의 피땀 흘리는 기도를 기억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리고 과감하게 십자가를 향하여 나가셨습니다. 그 결과 골로새서의 말씀대로 우리주님은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당국에 체포되어 끌려가서 “다시는 예수의 이름을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위협을 받았을 때 “우리가 너희 말을 들으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랴.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살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나 개인의 이해관계나 주변 사람들이나 환경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여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큰 승리를 주실 줄 믿습니다.

3.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데 있어서 다윗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다윗은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합니까?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다 계획을 세워놓고 그대로 하나님께서 추인해 주시고 도와달라고 기도합니다. 결국 오늘 우리도 기도한다고 하지만 주님의 저 게쎄마네 기도와는 정반대로 합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원대로가 아니라 내 원대로만 이루어주옵소서” 어쩌면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복덕방망이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다윗은 놉 땅에서 자기 마음대로 처신했다가 엄청난 실패를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거듭 거듭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나서는 비록 이웃의 반대가 있어도, 우려가 있어도 과감하게 행동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신자의 생활에 영어로 3P의 우선순위가 확실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첫째, 기도(pray), 둘째, 계획(plan), 셋째, 실천(practice)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자기의 꾀나 능력을 의지하던 생활을 철저히 회개하고 철두철미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는 “종”으로 방향전환을 했습니다.

내가 청도에서 목회할 때 당시 청도신읍교회에 유정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때 이미 은퇴하시고 원로목사님으로 계셨습니다. 혹 시찰회나 교역자회로 모이게 되면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에서 서로 이야기꽃을 피우게 됩니다. 그럴 때면 이 어른이 점잖게 한마디 하십니다. “先禱後論이니라”. 즉 먼저 기도부터 하고, 예배부터 드리고 나서 이야기들을 나누라는 뜻이었습니다. “먼저 기도”,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지키고 실천해야할 신앙의 한 정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윗의 마음에는 항상 자기 자신보다 다른 사람 그리고 자기 나라와 백성에 대한 사랑이 앞섰습니다. 예를 들면 시편 3편은 다윗이 자기 자신의 문제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는 이렇게 끝을 냅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려주소서”. 다윗의 가장 개인적인 시편이라고 할 수 있는 시 51편 그의 회개시에서도 18절에 와서는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라고 합니다. 그에게는 한시도 자기 나라와 자기 백성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어떤 능력에 의해서 나라가 번영하고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돌보심에 있다고 믿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의 인간됨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미 목장에서 양을 칠 때 양 한 마리에 대하여 지극한 관심으로 돌보았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하면 다윗이야말로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울 왕을 버리고 그 후임을 선택할 때 저 목장에서 양이나 치고 있던 이 다윗을 주목하시고 그에게 기름을 부어서 왕으로 점지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런 사람을 찾으십니다. 일 좀 했다고 동네방네 생색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상을 이미 받았으니 주님께로부터 받을 상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팔을 불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도”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은 다 아시고 상 주신다고 했습니다.

스가랴서에 보면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작은 일을 무시합니다. 말 한마디, 기본적인 인간관계, 하나님 말씀에 사소한 부분들, 우리가 감당해야할 일 가운데 작은 부분들 이런 것들을 하찮게 생각합니다. “그까짓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방축의 작은 틈새가 그것을 무너지게 합니다. 육지가 바다보다 낮은 네델란드의 한 소녀가 밤새도록 그 틈새를 막았기 때문에 큰 화를 면했다는 이야기도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여러분은 신앙의 방축에 틈이 나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번지르르한데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질 수 있는 그런 구멍이 있습니다. 그것이 아주 작은 것, 그리고 작은 일에 대한 불충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는 사람이 큰 것에도 충성한다”고 하신 우리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가운데 우리의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사소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먼저 주님”의 이 절대 우선순위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옛 사람들이 “上善如水”라고 했듯이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일이 물 흐르듯이 하나님의 법도대로 여러분에게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김오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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