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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구를 위하는가? (수 5: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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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경쟁이나 싸움에 대해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환경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만화영화, 뽀빠이, 우주소년 아톰, 황금박쥐 등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대개 착한 주인공이 악한 인물에게 꼼짝 못하는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주인공이 상대를 거꾸러뜨리기 시작합니다. 결국 악한은 싸움에서 패하고 맙니다.

무협지도 따지고 보면 엎치락뒤치락 우여곡절 끝에 억울하게 돌아가신 부모님, 혹은 사부님의 원수들을 물리치고 복수한다는 싸움 이야기입니다. 여가시간에 주로 즐기는 스포츠를 보십시오. 축구, 농구, 야구 등 인기가 대단합니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스포츠에는 몇 대 몇의 점수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편 이기면 기분 좋은 일종의 경쟁이요 싸움입니다.

경쟁사회 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생 때의 입시경쟁으로 우리는 잠을 줄이고 초조해 했습니다. 직장에서의 승진도 직장동료와의 치열한 경쟁 없이 거저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소비시장을 차지하려는 기업경쟁은 그 기업의 생존과 직결되고 있습니다. 정치판에서는 더 많은 의석을 차지하려는 몸싸움도 치열합니다. 누구나 이런 경쟁 구도와 싸움판에서는 패자보다는 승자가 되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도 어떤 싸움이 예고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얻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여리고 성과의 전쟁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여리고를 무너뜨려야 땅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전쟁입니다. 지도자 여호수아는 남다른 마음으로 여리고 성 가까이 먼저 가봅니다.

그 때 여호수아 앞에는 정체불명의 건장한 사나이가 출현했습니다. 칼을 빼어들고 있습니다. 싸우겠다는 의지가 분명합니다. 상대의 정체를 알 수 없었던 여호수아가 묻습니다.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너는 우리 편이냐 저쪽편이냐” 한마디로 “너는 아군이냐 적군이냐?”

신원을 알 수 없었던 그 사람은 아주 아리송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답변을 합니다.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아군과 적군으로 분류하는 여호수아의 질문 자체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아니라” “나는 너희 편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리고 쪽 편도 아니다” “나는 너를 도울 너의 아군도 아니고 동시에 너를 대적하는 적군도 아니다.”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이다. 나는 전혀 다른 정체성을 갖고 있으며 나는 전혀 다른 편에 소속해 있다. 나는 하나님 편일뿐이다.”

아니! 여호와로부터 오신 군대장관이라면 당연히, “나는 하나님의 선택 받은 이스라엘 너희를 위해 싸우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셔야 되질 않습니까? 여러분! 가나안 땅은 누가 약속하셨습니까? 여호와입니다. 가서 그 땅을 취하라고 누가 명령하셨습니까? 여호와입니다. 그렇다면 이 전쟁은 누구에게 속한 것입니까? 역시 여호와입니다.

따라서 이 전쟁은 거룩한 전쟁, 즉 성전으로 일컬어집니다. 그렇다면 이 성전에 참전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는 편들어 주셔야 하질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성전을 앞두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네 편도 아니고 저쪽 편도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쪽도 편들어 주시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 여호와 하나님과 당시 그 지방의 부족 신들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 지방 부족들은 바알, 아세라, 아스다롯, 다곤 등 제각기 부족 신을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각 부족은 자기들의 신에게 정-성을 다해 제사를 드립니다. 이때 제사장의 역할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제사장은 부족과 부족 신 사이 유일한 중재자였기 때문입니다. 제사장만이 부족의 제물을 부족 신에게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족신의 축복을 부족민들에게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라던 번영과 축복을 얻지 못하면 그 제사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제사장은 더 큰 지성을 드릴 것 요구합니다. 그러면 농사도 풍작을 거두고, 자손도 번창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제사장이 요구하는 대로 아무리 지성을 드려도 바라던 축복이 번번이 다가오지 않으면 마침내 제사장이나 부족 신에 대해 의심을 품기도 합니다.

결국 나약하기 짝이 없는 자기들의 제사장과 심지어 그 부족 신마저 바꾸기도 합니다. 더 강한 신과 그에 따른 새로운 제사장을 선택합니다. 부족의 번영과 축복을 확실히 보장받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부족신은 사실상 그 부족을 편들어 주는 인간의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다르셨습니다. 어느 한 쪽 편에 서서 무조건하고 그들 편만을 들어주는 그런 분이 아님을 선언하신 겁니다. 한 사람의 지원군도 아쉬운 이 때입니다. 누구보다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하고 있는 때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여호수아에게 얼마나 충격적이며 얼마나 섭섭했겠습니까? 우리도 누구랑 싸워서 하소연할 때, 믿었던 사람이 내 편을 들어주지 않으면 얼마나 섭섭한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편도 들어주지 않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출현하셨습니까? 여호수아가 그것을 물었습니다.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이까?” 이 때의 답변을 주목하십시오. 15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옛날 모세가 호렙산에서 소명 받았을 때도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꼭 같은 요구를 하셨습니다. 출 3:5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지금 여호수아가 신을 벗는다는 것은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동시에 나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종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지방 사람들의 풍습에 의하면 노예나 종들은 신을 벗어야 했습니다. 이 풍습이 예수님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눅 15장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탕자는 맨발이었습니다. 그 탕자는 남의 집 종살이하다 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신을 벗는다는 것은 “주여, 저는 당신의 종이요, 당신의 노예입니다.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은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은 저를 마음대로 쓰실 수 있고, 저는 오직 당신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당신을 기쁘시게 해드리려고 살아가겠습니다.”라는 결단을 고백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쟁을 앞둔 여호수아! 그는 이 전쟁에서 이겨야 했습니다. 패전은 곧 이스라엘 전체가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다보니 이기기 위해서라면 온갖 수단과 방법이 다 동원되어야 했습니다. 이럴 때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준다면 그것보다 더 든든한 후원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여호와의 군대장관은 이런 여호수아의 소망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버린 겁니다. “나는 누구의 편이나 들어주는 부족 신들과는 다르다. 나는 너의 종이 아니다. 네가 나의 종이어야 한다. 나는 무조건하고 너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다. 네가 나의 편에 서야 한다. 이스라엘 군대의 통수권과 작전권은 나에게 있다. 이 전쟁은 내게 속한 것이다. 너는 나의 방식대로 나의 전쟁에 참여하는 나의 도구여야 한다. 그래서 네가 신을 벗어야 한다.”

=== 이제 여호수아가 던지는 질문은 더 이상 “당신은 우리 편이냐 아니면 적 편이냐?”를 따지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여호수아는 오히려 “나는 과연 신을 벗은 여호와의 종인가? 그래서 여호와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여호와의 편이 되어 있는가? 아니면 나는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내 마음대로 살아가면서 신 벗기를 거부하는 그래서 하나님을 등진 자인가?”를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나타나신 것은 이스라엘의 싸움대상이 본질적으로 누구인지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싸워야 할 대상은 뜻밖에도 저 여리고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종 되길 거부하면서 오히려 환경이나 사람들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내편에 서 주기만을 끝없이 요구하는 이스라엘 자신의 본성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도 하나님께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더 중요하게 보시는 것은 하나님의 선민으로 합당하게 살아 가야할 이스라엘 “자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민답게 하나님편이 된다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한편이니 이 싸움에서 이길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 반대편에 서 있다면 그 잘못을 일깨워주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은 저들이 이기도록 방치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비뚤어져 있는데도, 우리가 잘못되어 있는데도 승승장구 바라던 땅을 차지해 간다면 우리는 얼마나 기고만장하고, 오만불손하게 되겠습니까? 이스라엘을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잘못되어 가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습니다.

여리고 성 싸움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 방식대로 싸웁니다. 6:2-5을 통해 말씀하신 여호와의 지시를 그대로 순종하며 전쟁에 임합니다. 그들은 진정 여호와 편이었고 여호와의 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는 당연한 승리가 6장 전체에 기록됩니다. 6장 27절은 이 승리를 한마디로 요약합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명성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 하나님과 여호수아는 과연 한편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장애물인 아이 성과의 전쟁은 사정이 달랐습니다. 아간이 문제를 일으킨 겁니다. (7:1) 그는 하나님께 구별하여 바친 물건을 훔칩니다. 그는 탐심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 아간이 죄를 범함으로 전체 이스라엘 몸속에 죄의 바이러스가 침투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병든 상태에서 아이 성 점령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병을 고치기 전에 아이 성 공격에 필요한 작전지시를 하나님께서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작전 지시도 받지 않고 성급하게 아이 성을 공략합니다. 이는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속한 군대 작전권을 자신이 장악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신을 벗은 하나님의 종이 아니었고, 따라서 하나님편도 아니었습니다. 여호와의 군대장관도 이런 이스라엘을 편들어 줄 수 없었습니다.

7:4-5에는 당연한 패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7:4-5) 여호수아는 장로들과 함께 옷을 찢고 회개합니다. 종의 위치로 돌아온 겁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아간의 문제를 엄중히 처리합니다. 바르게 회복된 이스라엘을 보시고 여호와께서는 8:1을 통해 마침내 작전 지시를 내립니다. (8:1) 여호와와 이스라엘은 다시 한편이 되어 전쟁에서 이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제 싸워야 할 본질적인 대상을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따라주지 않는 어떤 조건이 아닙니다. 역풍을 불어대는 환경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내 목표 달성에 방해가 되거나 심지어 나를 불리하게 만드는 저 인간도 아닙니다. 더욱이 이윤 창출에 장애가 되는 저 경쟁업체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내편에만 서 주기를 끝없이 요구하면서도 하나님께 종 되기를 싫어하는 나 자신의 이기적 자아 본능입니다.

하나님께는 가나안 땅보다 이스라엘 자신이 더 중요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장애를 물리치고 어떤 일을 성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 하나님께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추구하는 일보다 우리 자신을 더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간절한 소망처럼 우리가 하나님편이 되기만 하면 하나님과 우리는 한편이니 혹 도중에 어려움이 계속된다 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승리하게 될 겁니다.

우리는 사회, 가정, 그리고 교회 사이를 오가며 살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목표가 있습니다. 학생이라면 실력을 연마하여 좋은 미래를 준비하기 원할 겁니다. 사업가라면 내가 투자하고 있는 사업에서 성공하고, 직장인들은 맡은 직장일 자알 해내어 직장 상사의 인정도 받기 원하실 겁니다. 연로하신 부모님, 다복한 노년기 맞이하도록 효도하고, 행복한 부부관계도 이루어 가기 원하실 겁니다. 내 비록 험한 세월을 살아왔지만 내 자식만큼은 당당하고 바르게 자라주길 원하실 겁니다.

더 나아가 나의 믿음도 날이 갈수록 성숙해지며, 우리 높은뜻숭의교회도 진실로 하나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모여서 예배드릴 때 구원의 축제를 경험하며, 주님 사랑의 열정이 다시 불타올라 흩어져 복음 증거하고, 서로를 향한 사랑 이글거리고, 자발적인 봉사와 희생적인 나눔이 여기 저기 가득하길 우리는 바랍니다.

여러분! 이 목표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인도해 가시는 가나안땅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영광 받기 원하시는 약속의 땅일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땅을 향해 가는 도중 만나게 된 여리고가 혹시 있으십니까? 그 난관의 여리고 앞에서 우리가 먼저 신을- 벗어야 합니다.

여호수아처럼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서 신을 벗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종임을 고백하고 내가 하나님편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잘못되어 있는데도 하나님이 내편에만 서 주기를 요구하는 나의 본성과 싸워내야 합니다. 이 본질적인 싸움에서 이기면 하나님과 나는 한편이 됩니다.

더 나아가 온 성도가 하나님과 한편이 될 때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결국 우리는 여리고 성도, 아이 성도 하나님과 함께 뛰어넘게 될 겁니다.
그리고 바라던 저 가나안은 우리의 땅으로 성큼 다가올 것입니다.
신을 벗자. 아직도 벗지 못한 신은 무엇인가? 일주일간 묵상하자
(이장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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