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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으로 붙드심으로 포기할 수 없다. (행 1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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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붙드심으로 포기할 수 없다.
행 18;1-11.

1) 하나님 말씀에 붙잡혀 일해야 합니다.

사역을 감당하는 자는 모름지기 내 주장, 내 계획을 의존하기 보다는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과 함께 일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바울은 그런 의식을 갖고 실라와 디모데와 함께 일했음을 보게 됩니다. 5절입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5)
사실 이렇게 붙들려 일하는 것은, 이렇게 붙들려, 주께 사로 잡혀 믿고, 주께 매여 증거하는 것은 오랜 교회의 전통입니다. 일례로 주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기다리며 기도합니다. 그리고 결국 마가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중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 붙들림 바 되어서 나가 증거하게 됩니다. 즉 이들도 붙드려서 일했던 것입니다.

붙들린 자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선 나보다는 주님을 위해, 주님의 일을, 주님때문에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일하다 보면 결국 '나'라는 사람의 자존심이나, 감정은 접어두고, 우선적으로 오로지 주를 위해 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바라고 기도합니다. 여러분 모두다가 주님으로 인해서 체험있는, 능력있는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또한 무엇보다 주님 우선주의의 신앙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붙들렸는지 안붙들렸는지는 세상 사람들이 감별해 준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도 분별의 은사라도 있는 것인지 아주 정확하게 붙잡혀서 일하는지 아닌지를 알아내곤 합니다. 한번 들어보세요, 사람들이 그러지요. ‘저 양반은 교회에 빠졌다’ 혹은 ‘누구 아무개는 예수에 미쳤어’ 어떻습니까? 이들의 말의 내용이 그거 아닙니까? 누구누구는 하나님께 붙잡혔다. 누구누구는 이제 꼼짝없이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런 인정함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 말의 의도를 굳이 물을 이유도, 방법도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믿는 성도들은 이런 말에 익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취미도 그것에 푹 빠진 사람은 늘 그 생각에 머리에 떠나지 않습니다. 사랑에 빠진 청춘남녀도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으로 시간가는 줄 모릅니다. 그것이 사로잡힘의 속성입니다. 오히려 당연히 사로잡혀야 할 이들이 냉정하고, 분명하게 혹은 남의 일처럼 반응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혹시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래도 예수를 알고, 하나님을 고백하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인데, 나의 삶 속에 주님의 임재하심과 주님의 붙드심과 주님께 사로잡힘이 있는지, 혹시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래도 누구누구는 예수믿는 사람이고, 그 사람은 요즘 예수에 푹 빠져 지낸다고 인정해주는지, 아니면 그런 인정도, 사로잡힘도 없는 어물정한 신앙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1950년대 남미의 에콰도르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한 대표적인 나라였습니다. 특히 에콰도르 열대 우림 지역에 살던 아우카족은 남미의 인디언 중에서 가장 호전적인 부족이었습니다. 에콰도르에서 오랫동안 선교했던 데이브 쿠퍼는 이런 보고서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스페인의 탐헌가, 금광아나 석유탐사가 천주교의 신부, 선교사 등 수십, 수백명이 이들에 의해 살해 되었을 것이고, 그 지역에서 선교하다가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지역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젊은이들이 나타났습니다. 네이트 세인트, 로저 유드리안, 피트 플레밍, 에드 맥컬리, 그리고 짐 엘리엇이었습니다. 이들은 생명을 걸고 이 부족에게 예수를 전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복음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가진 이들은 <아우카 선교작전>을 세우고 아우카족과 접촉하기 시작했습니다. 1955년 이 젊은 선교사들은 작은 경비행기를 타고 식품, 의약품, 옷 등을 나누어주면서 우호적인 접촉을 시도했습니다. 교제가 이루어지고 답례품으로 앵무새, 땅콩, 원숭이 꼬리 등을 선물로 받은 이들은 첫 접촉을 한지 3개월 만인 1956년 1월 3일 아우카족의 땅에 첫 발을 디뎠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5일 뒤 1월 8일 무참하게 살해되었고, 정찰대는 화살이 꽂힌 그들의 시신을 발견하였습니다. 짐 엘리엣은 휘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였습니다. 그 학교 교수의 길이 보장되었던 29살의 창창한 청년이었습니다. 다른 청년들도 쟁쟁한 엘리트들이었습니다. 그 때 <라이프>(Life)라는 잡지는 표지 기사로 이 사실을 보도하였습니다. 표지 제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불필요한 낭비인가?’ 이 세상은 그 젊은이들이 죽은 것을 무모한 것이요, 불피요한 낭비라고 규정하였습니다.&nbsp;심지어 이렇게 질문도 하였습니다. ‘너희는 영웅이 되려 했는냐?’ ‘무모하기 짝이 없구나’ ‘너희 아까운 청춘을 미개한 종족의 창에 바치다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이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탄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로부터 36년이 지난 1992년 6월 11일, 아우카 족의 땅 <티네노>에서는 감격적인 행사가 열렸습니다. 신약성경이 아우카족의 언어인 <와우라니>어로 번역되어 봉헌예배가 드려졌습니다. 그 봉헌 예배에는 짐 엘리엇을 비롯한 젊은 선교사를 살해했던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와우라니 교회의 지도자로 참석하였습니다. 그들의 죽음은 무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죽음은 영웅주의적인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길을 따라 간 것이었습니다. 순교의 길이 무엇인 지를 정확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순교의 피는 반드시 싹이 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들이 순교한 것은 꼭 하나의 이유에서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서’


2. 안 되어 포기하였는데

이렇게 붙잡힌 사람들의 특징은 나로 인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붙잡힌 사람의 하는 사역의 근거와 동기는 철저히 붙잡은 이에게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일의 책임과 권리는 철저히 붙잡은 이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바울이 이러한 원칙을 잠시나마 잊고서 힘들어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6절을 보니 바울이 그렇게 열심히 전도하다가 실망이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 화가 단단히 났습니다. 맘이 상해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래도 결국은 당신들 좋으라고 하는 것이지, 나 좋자고 하는 것이냐고 항변하는 것입니다. 그는 말씀을 살펴보면 ‘옷을 떨고’,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6) 는 악담 비슷한 선언도 했다고 합니다. 뭐 이제는 상관없어, 이제는 미련없어, 더이상이 아쉬워 않을 거야 뭐 이런 식의 태도 아니겠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무엇 때문에 그가 그토록 옹졸하게 만들었습니까? 그 이유는 우선 ‘대적’ 때문입니다. 6절입니다.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자꾸 반복되어지는 대적과 방해, 훼방 그리고 인간적인 육신의 부침으로 인해서 그가 무엇 때문에 왜하는지에 대해 순간적이나마 망각했다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이러한 바울의 실수와 연약해짐은 모든 사역자들의 고민거리라고 생각됩니다.

어느 나라에 이런 속담이 있답니다. ‘열매 맺는 나무가 돌을 맞는다’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그 나라는 높은 나무에 매달린 열매를 딸 적에 돌을 던져 그 열매를 얻는가 봅니다. 마치 밤이나, 야자열매나 하는 식의 딱딱한 껍질의 열매가 달린 나무인가 봅니다. 하여간 그 열매 때문에 나무는 덩달아 돌팔매질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좋은 일하다가, 좋은 열매 때문에 매도 맞고, 멸시도 당하고, 고달픔도 경험하는 자리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이런 귀한 열매가 없었다면 아예 남들의 눈과 관심에서 벗어나서 속 편히, 맘 편히, 몸 편히 살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일하는 사람이 바람을 맞게 됩니다. 일하는 곳에 고난이 있고, 수고가 있는 것입니다. 항구에 가만히 있는 배는 높은 격랑을 고민할 이유가 없습니다. 바울 일행은 지금 주의 일을 하기 때문에 고생하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주님께 사로잡혀서 자신을 드리고, 수고하며, 전도하기에 대적을 당하고 훼방을 받는 것입니다.

상심한 바울은 포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맘에도 없는 말을 던지고, 옷을 털고, 훌쩍 일어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쯤되면 바울도 참 대단하다 싶지만, 그 고린도 사람들로 대단하다 싶습니다. 바울이 누구입니까? 그래도 한 인내하는 사람 아닙니까? 감옥에 들어가도 좋다고 기도하고, 찬송하던 사람이 바울인데, 그 바울이 모르겠다고 툴툴 털고 일어날 정도니 모르긴 몰라도 그 사이에 많은 사연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요, 보세요. 하나님은 바울이 그런 식으로 일어서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주의 일하다고 상처받고, 맘 상해서 넘어지는 것을 그냥 바라만 보시는 이가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바울에게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주시며, 그를 위로하시고, 길을 열어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하다가하다가 안될 때는 주님께 내려 놓으세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주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상심한 바울이 회당 옆집인 유스도의 집에 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손님을 그 집에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는 다름 아니라 회당장 그리스보입니다. 회당장 그리스보는 유대인이요, 예수쟁이들과는 다른 철저한 유대교 모임의 중요한 인사입니다. 그가 지금 바울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주님을 영접하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더라는 것입니다.

곰곰이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지금도 고린도 지역의 역사 발굴 현장에는 예전 아마도 바울 당시의 회당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의 자리에 아마도 바울과 믿는 무리들이 일했을 법한 일터와 집들이 발견되더라는 것입니다. 즉 바울이 공을 들이고, 주의 사랑에 미쳐 열심히 전도했던 그 사역을 통해 바로 옆집의, 회당의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빗나간 은혜의 방향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사하시는 인도하심의 방식이 분명 바울과 달랐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수고하며, 섬기는 이들이 안달라진다고 몸서리치며, 속상해 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다른 이들을 통해 은혜 받게 하시고, 그들을 주님의 집으로 부르셔서 주의 일을 감당하게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브리스가와 아굴라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들을 통해 돕게 하셨고, 심지어는 주님의 일을 섬기는 맘으로 바울에게 너무나 좋은 협력자로 맺어주셨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6장에 3절-4절에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1년 6개월 동안 내내 그 집에 머물렀고 그들은 내내 사도바울의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3) 해야 할 분명한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낙심한 바울에게 주님이 오셔서 위로하셨음을 보게 됩니다. 8-10절을 보면 그 위로 중에 주님이 바울이 지금 감당하는 일의 의미를 분명히 일러주심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맞습니다.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감당하는 일은 괜히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냥 지나도 보니 머물러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연히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지금 바울이 감당해야 할 분명한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 그런 말씀 드렸습니다. 사명이 있는 자는 죽지 않는다고요, 리빙스턴의 말이라고요, 맞습니다. 그리고 한 말씀을 더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사명이 있는 사람들은 실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면, 사명을 감당해야 할 자에게 주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넘어질려고 했어요, 그 바울을 하나님은 다시 흔들어 감당하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침체되어져 가는 이유는 내 신앙의 갈길을 잃어버릴 때입니다. 가도 가는 것 같지 않고, 마음만 급하고, 보람도 없을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내 일의 의미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분명한 확신이 있을 때, 광야같은 땅에 서 있어도 흔들리지 않고, 육신적으로 곤고해도 소망이 넘치고, 어려운 상대를 만나도 사랑의 수고를 거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절망하던 바울이, 그곳에서 잠시도 더 못 있겠다고 포기하던 바울이 그 자리를 지키고 최선을 다해 교회의 덕을 세운 것은 바로 내 사명 잃지 않았기 때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김병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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