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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민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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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민수기 20장은 모세의 생애 가운데 가장 슬픈 네 가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장입니다. 민수기 20장에서 모세는 자기의 누이 미리암을 잃게 됩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다고 불평한 므리바 사건을 통해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극한 형벌을 받게 된 것도 민수기 20장입니다. 그리고 에돔 왕의 거절로 에돔땅을 지나가지 못하게 된 것과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험한 산길로 가다가 호르산에서 모세의 형 아론이 123세의 나이로 죽은 것도 민수기 20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모세의 생애 가운데 가장 슬픈 사건은 민수기 20장에 다 모여 있는듯 합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슬프고 괴로운 사건은 아마도 모세가 가데스바네아에서 반석을 지팡이로 두 번 친 므리바 사건일 것입니다. 모세는 80세에 소명을 받아서 120세가 될 때까지, 40년 동안 어려운 목회사명을 잘 감당했습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60만 백성들을 먹이고 입히며,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따라 그들을 인도하여 40년의 광야방황 생활을 다 마치게 되었습니다. 또한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인류 최고의 법인 십계명을 받아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오합지졸 같은 백성들을 대 민족 국가로 형성했으니 참으로 위대한 지도자라 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감당해 낼 수 없는 대 위업을 이뤘습니다.

그런데 이제 가나안 땅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서 모세가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엄명을 듣게 되었으니 모세의 마음이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12절 후반에 보니까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120세가 되어 죽기 전에도 비스가 산꼭대기에 올라 하나님께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명기 3장 26절에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고 일언지하에 모세의 기도를 거절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렇게 심각한 형벌을 받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모세는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연고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진노하셨다고 거듭 거듭 말합니다. 신명기 1장 37절에서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도 진노하사 가라사대 너도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고백합니다. 또 신명기 3장 26절에서도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너희란 광야에서 살아남은 신세대들입니다. 이 신세대는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죽은 구세대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누이 미리암을 잃고 슬픔에 잠긴 모세와 아론을 위로하기는커녕 도리어 물이 없다고 모세와 아론을 세워놓고 공박합니다. 더더군다나 그들의 언어는 구세대들보다도 더 직설적이고 가혹합니다.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여 가로되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면 좋을뻔 하였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를 이 광야로 인도하여 올려서 우리와 우리 짐승으로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20:3~5)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세대나 구세대나 죄성은 아주 동일합니다. 40년 동안 일하고 수고한 모세를 향하여 이 신세대들은 감사하다고 말하기는커녕 오히려 돌을 들어 쳐 죽이겠다고 위협합니다.

이와 같은 일을 당할 때, 모세와 아론은 언제나 동일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총회 앞을 떠나 회막 문에 이르러 엎드리매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나며”(20:6) 모세는 엎드려서 기도했습니다. 저 같으면 아마 이렇게 기도했을 겁니다. “하나님! 이 신세대가 광야 40년 생활 가운데서도 살아남았는데 자신들의 부모와 똑같은 죄성을 가지고 있으니 이 사람들의 버릇을 좀 고쳐주시옵소서. 단단히 혼을 내주시옵소서!” 그러나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라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백성의 불평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 물을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응답을 하십니다. “모세야. 너는 네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총회를 모아라. 총회를 모으고 너희는 그 목전에서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반석에게 말을 해서 물을 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모세와 아론은 총회를 반석 앞에 모으고 이렇게 말합니다.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그리고는 성질을 내면서 지팡이를 들어 반석을 두 번이나 딱딱 쳤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 곳에서 물을 내셔서 사람과 짐승이 함께 마셨습니다. 이 물을 칭하여 므리바 물이라고 합니다. 므리바라고 하는 것은 다투었다는 뜻입니다.

출애굽기 17장에도 맛사, 혹은 므리바라고 하는 물이 나옵니다. 민수기 20장의 므리바는 출애굽기 17장과는 구별되는 므리바입니다. 그래서 민수기 20장의 므리바를 가데스의 므리바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데스 바네아, 즉 38년전 자기 조상들이 열 명의 불신앙 정탐꾼들을 따라 모세를 대적했던 그 지점에서 하나님과 또 다투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결국 반석을 두 번 친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죄를 지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인데 벌은 모세가 받았습니다. 모세가 참 억울할 것 같습니다.

모세가 왜 이런 벌을 받게 됐을까요? 죄가 없이는 벌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모세의 세 가지 죄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죄는 사소한 죄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1. 분노를 통제하지 못한 죄

첫째로 모세는 분노를 통제하지 못한 죄를 지었습니다. 모세는 신세대가 구세대와 동일하게 죄를 범하는 것에 대해서 분노했습니다. 모세의 분노는 당연합니다. 모세의 분노는 의로운 분노입니다. 제가 모세라도 아마 화를 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 분노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화나는 거야 할 수 없는 일이지 분노는 통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 분노를 마음에 새기고 통제하지 못하여 성급하게 입술로 토해내고 말았습니다. 시편에 “저희가 또 므리바 물에서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으므로 저희로 인하여 얼(trouble)이 모세에게 미쳤나니 이는 저희가 그 심령을 거역함을 인하여 모세가 그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시 106:32-33)고 했습니다. 모세가 아주 성급한 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분노를 드러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모세가 지닌 인간적인 약점 한 가지입니다. 모세는 분노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성질이 나면 그것을 즉시로 풀어야 했습니다. 출애굽기 2장에서도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는 민족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히브리인을 치는 애굽 사람을 쳐죽이고, 그 시신을 모래 속에 파묻었습니다. 그리고 그 죄 때문에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쫓겨 다니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서도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으로부터 두 돌비에 새겨진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40일 금식을 하고 두 돌비를 받아서 내려오는데, 산중턱에서 보니까 산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섬기면서 축제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분노해서 그 돌비를 산 아래로 던져서 깨뜨려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할 수 없이 또 다른 두 돌비를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모세는 분노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인간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사람의 분노 가운데는 의로운 분노도 있습니다. 사람이 불의에 대해서 의분을 가지는 것은 마땅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신약성서를 보면 의로운 분노는 딱 두 번만 등장합니다. 그것도 사람의 분노가 아니라 예수님의 분노였습니다. 그러기에 야고보서 1장 19-20절은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고 권면합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었는데 모세가 성질을 내고 그것을 통제하지 못해서 벌을 받은 것입니다. 얼마나 손해입니까? 에베소서를 통해서도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 4:26)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모세는 분노는 사실 의로운 분노였지만 그 분노를 올바로 통제하지 못해서 결국 어마어마한 벌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부부가 부부싸움을 너무 심하게 하였습니다. 이 부부는 서로 사랑하였지만 서로 화가 나면 단 5초도 견디지 못했기 때문에 서로 심하게 다투곤 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아내가 “여보.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서도 이렇게 다투며 살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우리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서 진찰을 한번 받아보면 어떨까요?”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받으러 갔더니, 의사가 자초지종을 듣고는 안으로 들어가서 노란 물약이 든 큰 통을 하나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 부부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만약에 화가 치솟거든 이 물약을 세 숟가락씩 꼭 드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물약을 한꺼번에 세 숟가락씩 삼키지 말고 한 숟가락 먹을 때마다 입 속에 넣고 1분 동안 머금은 후에 삼켜야 합니다. 그렇게 세 숟가락만 먹으면 큰 효과를 볼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부가 의사의 말을 실천하였습니다. 성질이 날 때마다 노란 물약을 찾아 마셨습니다. 물약을 먹고 3분이 지나니 성질이 가라앉아서 싸움을 하지 않게 됐습니다. 이 약을 먹는 동안 부부는 서로 싸움을 하지 않고 잘 지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약이 떨어지자 부인이 다시 의사를 찾아 왔습니다. “선생님. 약이 떨어졌습니다. 한 병만 더 조제해주세요.” 그러자 그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부인. 이제 더 이상 약은 필요 없습니다. 사실 그 약은 설탕물입니다. 부인이 싸움을 안 하게 된 것은 그 약을 먹고 3분 동안 기다리는 동안 분노가 삭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부부싸움이 일어나려고 할 때에는 맹물이라도 마시고 3분간 분을 삭혀보십시오. 그러면 싸움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처럼 모세도 노란 물약을 먹고 3분만 기다렸다면 가나안 땅에 들어갔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잠언 16장 32절에는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화가 날 때마다 분노하지 마시고, 그 분노를 잘 다스리시기를 바랍니다.

2. 교만했던 죄

두 번째로 모세의 죄는 교만죄입니다. 모세는 사실은 교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민수기 12장 3절을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했습니다. ‘humble spirit’, 즉 ‘겸손한 영’이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했던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겸손한 모세의 마음속에 순간적으로 교만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만 모세는 10절 말씀처럼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가만히 들으면 모세와 아론이 물을 주겠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모세가 수많은 기적을 행하기는 했지만, 그 기적의 주체는 모세가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고 모세가 있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난 것이지, 하나님께서 안 계시고 모세와 지팡이만 있었으면 기적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순간에 모세의 말을 들으면 마치 모세와 아론에게 능력이 있어서 반석에서 물을 쳐 내는 것 같이 들린다는 말입니다.

교만이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도 내 힘으로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삶의 태도입니다. 자기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어도 내가 내 힘으로 얼마든지 내 일을 처리할 수도 있고, 나는 내 힘으로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 교만입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하나님을 순간순간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그 앞에는 결국 패망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겸손한 인격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성도의 기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도는 인격을 다스리는 기도입니다. 순간순간 교만이 쳐들어올 때에 그 교만을 치고 이길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아프리카의 선교사이자 의사였던 위대한 슈바이처 박사가 아프리카 선교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 있었던 일화입니다. 슈바이처가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슈바이처가 도착할 기차역 앞에서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기차가 도착하고 사람들은 슈바이처 박사가 당연히 1등칸을 타고 왔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1등칸 손님이 다 내릴 때까지 슈바이처 박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혹시 2등칸을 타고 왔나 생각해서 사람들은 다시 2등칸 쪽으로 몰려갔습니다. 역시 거기에도 슈바이처 박사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3등칸 쪽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3등칸의 맨 끝에서 슈바이처 박사가 내리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슈바이처 박사에게 질문했습니다. “박사님. 박사님처럼 위대하신 분이 왜 3등칸을 타고 오셨습니까? 1등칸을 타고 오실 수 있었을텐데요.” 그러자 슈바이처 박사는 “4등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겸손은 사람을 위대하게 합니다. 사람이 겸손하면 그의 인생의 앞길에는 존귀함이 기다립니다. 그러나 교만하면 그 길에는 패망이 있을 뿐입니다. 모세는 순간적인 교만 때문에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죄

모세의 세 번째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것입니다. 민수기 20장 24절을 보면 “아론은 그 열조에게로 돌아가고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므리바 물에서 내 말을 거역한 연고니라”고 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어떻게 하나님을 거역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는데, 모세는 반석을 두 번이나 때렸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반석을 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나와 있습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이 반석은 그리스도이며, 이 반석에서 나오는 생수는 성령과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는 한번 침을 당하시지 두 번 침을 당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한 번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단번에 우리 죄를 모두 사하시는 것이지 그리스도께서 두 번, 혹은 세 번 죽으시는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애굽기 17장에서 모세가 한 번 반석을 친 것과는 다르게 두 번 반석을 친 것은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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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하나님께서는 명하여 물을 내라고 말씀하셨는데 모세는 자기의 경험을 의지했습니다. 모세의 생각은 아마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출애굽기 17장에서는 쳐서 나왔는데요. 하나님께서 뭘 잘못 아신 거 아닙니까? 내 경험으로 보건데 반석은 그냥 말해서는 물을 안냅니다. 내 경험을 보건대 반석은 지팡이를 가지고 쳐야 나옵니다. 지난번에는 한번 쳐서 나왔는데, 이번은 두 번째니까 두 번 쳐야 나올 것 같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자신의 경험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반석이 그리스도이므로 이 반석이 두 번 침을 당해서는 안된다는 위대한 구원의 계획을 가지고 말씀 하셨는데, 모세가 그것을 깨달을 리가 없습니다. 모세의 손에는 신약성경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무조건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경험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큰 죄를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결론

통제되지 않는 분노와 순간적인 교만심,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자기의 경험을 의지한 불순종으로 모세와 아론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장애물 경주를 뛰어넘는 사람이 모든 장애물을 다 뛰어넘은 후에, 마지막 장애물에 걸려 넘어져서 골인 지점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실은 저는 민수기 20장을 보면서 모세와 아론이 무척 억울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전서 4장 17절을 보면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먼저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우리는 세상을 보면서 세상이 죄가 많다고 말하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세상에서 먼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인 우리들에게 먼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순서가 하나님의 집이 먼저요, 그 다음이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이 나쁘다고 비판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죄악을 먼저 정죄하기 전에 하나님의 집의 죄악을 스스로 살펴보고 반성하면서 죄악을 이겨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높은 직분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됩니다. 모세와 아론이 심판받았듯이, 목사와 장로, 권사와 집사가 먼저 심판을 받고, 그 다음에 일반 신도들과 세상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높은 직분을 맡은 사람일수록 하나님 앞에 더욱더 겸손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통제되지 않는 분노, 순간적인 교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심판받는 3대 원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서 이 세 가지를 날마다 버리고, 반석에서 나오는 생수로 우리의 심령을 말씀과 성령으로 채운 바 되어 승리하는 주의 백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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