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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을 떠난 진짜 이유는 무엇입니까? (막 10: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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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걸어가고 계실 때 어떤 부자 청년이 찾아 와서 길바닥에 꿇어앉아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물은 이 사건은 현대인들에게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한가지 진리를 가르쳐 준 획기적인 계기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영생과 돈, 예수와 세상사이에 엉거주춤하게 서서 두 가지를 다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못박아 준 예수님의 교훈을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둘을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그 선택에 따라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 사실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22절을 보면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그냥 이 사람이 부자였기 때문에, 혹은 재물이 많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예수님을 떠나갔다고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가 예수님을 등지고 슬퍼하며 떠나간 진짜 이유는 재물이 많았기 때문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청년을 예수님으로부터 떠나가게 만든 진짜 이유를 조명하여 은혜 받기를 바랍니다.

1.예수님에 대한 오해입니다.

17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여기에서 그는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렀습니다.
18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여러분, 이 말씀을 우리는 피상적으로 관찰해서 “예수님은 자신이 선하다는 것을 부인하셨다”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는 “사람 가운데는 선한 이가 없다. 즉 인간의 선함이 구원의 조건일 수 없다. 자신의 선함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롬3:10절을 보면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 앞에 인정될 수 있는 선함을 가지고 있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선한 자는 하나님 밖에 없다”라고 말씀하시는 의도가 어디에 있을까요?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려는 더 중요한 진리는 “나는 선한 선생의 차원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이다”라는 선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위대한 모델로서의 인간! 예수님을 이렇게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존경할만한 스승, 위대한 인류의 교사로 예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계시하고 있는 예수에 대한 올바른 관점이 아닙니다.
예수는 선생님 그 이상의 분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이시고 무엇보다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구주십니다.
이것이 정답입니다.

위대한 인간은 위대한 모본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수는 없습니다.
본문에서 소개하는 부자청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선한 선생의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선생으로서의 예수는 자기 손익 계산서가 맞지 않는다고 판단될 때는 언제라도 쉽게 떠날 수 있는 그런 예수였습니다.
따라서 그가 슬픈 기색을 띠고 예수를 등지고 떠나간 진짜 이유는 예수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예수님을 선한 스승이라고 생각했지, 그가 하나님이시고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구주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당신은 생각은 어떻습니까?

2.영생에 대한 오해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등지고 떠나가고 있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생을 행위로 얻을 수가 있다고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청년이 던진 질문 그 자체는 아주 바람직한 내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영생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을 깊이 있게 분석해 보면 교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매우 그릇된 전제를 갖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구원에 대한 보편적 편견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질문을 다시 보겠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것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한다”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는 질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청년은 자기가 무엇을 행하고, 굉장한 커다란 업적을 세워야만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을 얻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이 갖고 있는 영생과 구원에 대한 매우 보편적인 선입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청년과의 지속적인 대화 속에서 구원의 근거로서 행함을 가정하고 있는 이 잘못된 근거를 파기시키기 위한 질문을 계속하십니다.
19절을 읽겠습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놀랍게도 20절을 보면 이 청년은 대답하기를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청년이 도덕적으로 자신이 있던 사람이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도덕적인 자긍심을 가지고 삶을 살아온 사람이 아니라면 이 정도의 대답이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대답의 밑바탕에는 아직도 그가 자신의 정체성와 자기의 진실한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기에 예수님은 이 청년에 대해서 무척이나 안타까워하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1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우리는 이 말씀을 비약시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재산을 다 팔아야 한다는 말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이 청년은 아직도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항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세주로 만나기 위해서,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이 죄인됨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아픈 곳을 찔렀습니다.
이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도덕적인 자신감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숨기고 있었던 가장 강력한 삶의 동기 중의 하나는 재물에 대한 탐심이었습니다.
이 한가지 죄를 통해서 그의 죄인됨을 보여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한가지 죄를 통해서 그의 전면적인 죄인된 모습을 보여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청년과 예수님의 대화를 옆에서 엿듣고 있었던 제자들이 드디어 이 질문을 끄집어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26절을 읽겠습니다.
“제자들이 심히 놀라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이 질문에 대해서 27절을 보면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 하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뜻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사람을 결코 구원할 수가 없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어떤 최선도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고, 이웃을 돕는 어떤 자선 행위도 이웃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다 죄인이고, 사람은 다 그릇된 길로 갔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실 때 행함에 근거하지 아니하시고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선물은 어떻게 받습니까? 선물은 그냥 받습니다.
그리고 선물을 누가 제일 염치없이 받습니까? 아이들입니다.
어른들은 선물을 주면 이것이 선물인지, 뇌물인지를 생각하고 무슨 의도가 뒤에 있는가를 생각하지만 아이들은 선물을 있는 그대로 잘 받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청년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생의 선물을 받지 못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의 인식이 없고, 자기 행위에만 매달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오해가 당신에게는 없기를 바랍니다.

3.우선 순위의 오해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등지고 떠나가는 또 하나의 진짜 이유는 인생의 우선 순위를 오해한 것입니다.
우선 순위란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에서 무엇이 좀더 중요한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이라는 것은 우선 순위를 따라 살아가는 삶이요, 불행이란 인생의 불행은 우선 순위의 혼란에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저는 본문에 나타난 이 청년이 우선 순위를 혼돈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은 분명히 예수님에 대한 관심도 있었고, 영생에 대한 관심도 있었지만, 이 청년을 지배하고 있었던 더 중요한 관심은 재물에 대한 탐심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재산을 늘리고, 재물을 축적하는 것이 자신의 삶의 가장 중요한 우선 순위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선 순위에서 예수는 밀려났고, 영생도 포기했고, 마침내 예수를 등지고 떠나갈 수밖에 없었던 슬픈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가장 중요한 우선 순위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 사람은 예수도 영생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그 보다 더 훨씬 재물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여러분, 우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상이란 하나님과 나 사이에 끼어 드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부자청년은 이 우상을 극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가 나의 주님이시요. 나를 구원하신 분이시며, 나의 전 일생을 다스리고 나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놀라우신 분이라는 사실을 당신은 믿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의 우선 순위를 바꾸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나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시고 피흘린 십자가와 죽으심에 대하여 감사하며,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됨을 다시 한번 더 고백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국 가는 그날까지 이 땅에서도 영육의 행복한 삶을 누리시는 우리 고현의 가족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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