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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 (롬 8: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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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람들은 어떤 존재들인가? 우리는 매우 연약한 존재들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흙으로 만드셨는데 흙은 쇠보다 약하고 돌보다도 약하지 않은가? 성경은 사람을 질그릇에 비유하고 있다. 질그릇은 함부로 다룰 수 없다. 질그릇은 쉽게 상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말 한마디에도 상처를 받아 잠을 자지 못할 때가 있다. 또한 성경은 우리를 꺼져가는 심지같고  상한 갈대같다고 하였다. 상한 갈대는 갈대 중에서도 가장 약하다. 우리 모두는 이같이 약한 존재들이다. 상한 갈대란 누구인가? 과거에는 건강했고 물질도 많았지만 지금은 병들고 가난한 자를 말한다. 꺼져가는 심지란 누구를 말하나? 과거에는 열정도 비전도 꿈도 많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자이다. 성경은 우리를 상한 갈대로, 꺼져가는 심지로, 질그릇으로 표현한다. 태풍이나 홍수가 오기 전에 동물들은 미리 알고 피하거나 집을 옮기는 등 여러가지 대책을 취한다. 하지만 우리들은 전혀 그렇게 할 수 없다. 삼손은 드릴라에게 빠져서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엘리야를 보자. 이방신을 섬기는 850명의 선지자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당당히 처단한 큰 선지자였지만 이세벨의 협박이 두려워서 도망하고 숨어버린 자가 되었다.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베드로는 어린 계집종 앞에서 두려워 떨며 주님을 부인한 자가 되었다. 우리는 이렇게 약하고 약한 자들이다. 하지만 우리의 연약함은 하나님의 계획임을 잊지 말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약한 존재로 만든 이유는 강하고 능력있는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간에 우리를 강하게 하신 성령님을 바라보자.

첫째, 성령 하나님은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는 분이다.

약한 우리가 강하게 사는 방법은 무엇인가? 시편103편14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고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신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무 대책없이 약하게 만드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약한 우리로 하여금 강한 하나님을 찾게 하셨다. 바울은 고린도전서12장9절에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라고 고백하였다. 이같이 사람은 약해야 하나님을 찾게 되고 약해야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 안에 거하게 된다. 이같이 성령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우리의 마음은 쉽게 변하고 우리의 결심은 너무도 빨리 깨지게 된다. 강한 결심을 하면 할수록 강한 절망이 오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우리의 육체는 어떤가? 아프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40, 50대가 되면 누구나 질병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 작은 유혹 앞에서도 쉽게 넘어진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이기지 못했다. 우리는 이성의 유혹 앞에서 약하고 물건을 구입하는 단계에서도 유혹을 이기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가 매순간 성령의 도우심을 구한다면 강해질 수 있다. 성령은 우리 곁에 계셔서 늘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어려움을 피하게 하신다. 인생 중에는 거대한 성도 있고 거대한 함성같은 골리앗도 있다. 거대한 성과 거대한 함성 앞에 서면 우리는 늘 위축된다. 건강, 물질, 가족, 신분등에서 만나는 수많은 걱정과 공포를 만날 때에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이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성령은 어떠한 어려움 앞에서도 바로 지금 우리를 도우신다. 그는 지금 돕는 분이다. 과거에 도왔거나 미래에 도울 분이 아니라 바로 지금 돕는 분이다. 1세 때에 소아마비가 되어 52세까지 그렇게 살아오신 성도의 다리가 집회 때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다시 길어지는 역사를 본다. 중풍으로 30년 동안 고생하던 자를 위해서 기도할 때에 그가 일어나고 모든 성도들이 소리를 지르는 기적을 본다. 이 모든 것이 성령의 ‘지금 도우심’이다. 사람들은 연약한 우리들을 싫어하지만 성령은 항상 우리를 사랑하시고 도우신다. “(찬송)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먼 날 볼 수 있게 주 내게 행하셨네, 호산나 호산나, 죽임 당한 어린 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보혜사 성령님은 이렇게 늘 우리의 곁에 계신 것이다. ‘보혜사’란 영원히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변호하시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시며 늘 응원하신다는 뜻이다. 인생은 혼자 강하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갈 수 없다. 두려움, 어려움, 근심, 그리고 걱정 앞에서 우리는 절대로 혼자 강한 자일 수 없다. 에서와 야곱 중에 누가 더 멋있나? 에서가 인간적으로 훨씬 멋있을 수 있다. 그는 남성다운 매력도 있었고 용기도 있었다. 그는 멋진 포기(?)도 할 줄 아는 남자였다. 하지만 야곱은 그 반대였다. 그는 여성스러웠고 인격이나 매력도 별로 신통치 않았다. 그는 기회를 보았다가 탈취하는 야비함도 있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셨고 에서는 미워하신다고 했다.(롬9:13) 에서는 장자로서 재산을 물려받고 많은 권세를 누리며 살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미래에 대한 걱정도 없었고 몸도 건강했으며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보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그러나 야곱은 형편이 달랐다. 야곱은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었고 그 분의 축복을 간구하는 것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기도하는 자였고 간구하는 자였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한 것이다. 하나님은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으로 베푸시나니…(대하16:9)’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무조건 가난한 자를 돕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하고 기도하는 자를 도우신다. 한국에서 사역을 할 때에 400명으로 시작한 청년부가 2,000명으로 부흥할 때까지 정말로 정열적으로 일했고 그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덧 나의 영성이 파괴 되어가고 나의 가정에 문제가 생기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많은 고민과 기도 끝에 아내와 나는 유학을 결정하고 도미하였다. 가지고 온 돈은 금방 소진되었고 물질의 문제와 언어의 문제등 온통 어려움과 근심과 낙담뿐이었다. 학교에서는 바보같은 자로, 가정에서는 가난한 자로, 사회적으로는 (교통 위반을 한) 범죄자로의 삶이 이어졌다. 광야에 서있는 것 같았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광야’가 불편하고 외롭고 질병과 좌절이 있는 장소이겠지만 내게는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을 붙잡는 자리’로 변하였다. 그렇게 하나님을 붙잡았고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그냥 놓아 두지 않으셨다.

불평하지 말고 연약함을 묵상하지 말라. 약함을 통해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을 통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연약함은 성령께서 내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기회가 된다. 중요한 것은 내가 힘든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을 믿고 그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어느날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딸이 함께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었다. 딸과 아버지의 상처가 심해서 그들은 목발을 의지하여 살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어린 딸에게는 이 모든 것이 큰 상처가 되었고 성장과정을 통해서 인생의 그림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 딸이 성장하는 모든 과정 중에 그의 아버지가 동행하여 주었다. 그리고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는 그 딸에게 용기를 심어주고 꿈과 비전을 제시해 주었다. 그 딸은 형편과 처지가 같은 아버지를 늘 의지하였고 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나누며 성장하였다. 어느날 한 어린 아이가 공을 잡으려 길로 달려갔고 마침 큰 트럭이 달려오는 순간에 아버지는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아이를 구했다. 그리고는 아이를 들고 (목발없이) 안전한 길로 뛰어갔다. 이 모습을 본 딸은 너무나 놀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 어머니는 모든 사실을 딸에게 밝힐 수 밖에 없었다. 그 아버지는 사고 당시에 목발을 의지하여 생활했지만 오래지 않아서 발이 완쾌되고 목발이 필요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 아버지는 딸의 실망감이 더 커질 것을 걱정하여 그 딸과 함께 목발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그 딸은 아버지의 사랑때문에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가눌 수가 없었다. 약한 자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자.

나아만 장군을 보라 그에게는 남모를 절망이 있었다. 강하게 보이지만 혼자 있을 때에는 절망뿐이었다. 밤마다 외로움과 절망으로 그는 서서이 죽어가고 있었다. 엘리사는 그에게 갑옷을 벗고 요단강으로 들어갈 것을 명하였다. 그는 죽는 것보다 싫었지만 부하의 권면을 듣고 엘리사에게 순종하였다. 그가 갑옷을 벗는 순간 그는 교만과 고집의 갑옷을 벗는 것이었다. 그리고 온전한 순종이 온전한 치유로 이어지는 지적을 체험하게 되었다.

둘째, 성령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시는 분이다.
그 분은 우리를 기도로 돕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약해질 때에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 힘들거나 너무 편안해도 기도하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 망하거나 너무 성공해도 기도하지 않는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지 못하게 유혹한다. 성령 하나님은 그것을 잘 아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를 돕고 계신 것이다. 우리가 기도해본 적이 오래 되었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에 빨강 불이 켜진 것이다. 기도는 틈만 나면 해야 한다. 기도는 기쁨으로 해야 한다. 기도 없이 연약함을 이기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성령은 잘 아신다. 누가 탄식하시는가?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성령도 하나님을 모르는 채 죽어가는 자들을 위해서 탄식하신다. 성령은 기도도 없고 능력도 없는 성도들을 위해서 탄식하신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우리가 약할 때에 그가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음을 기억하자. 그 분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가 늘 성령을 찾기를 바라시며 우리를 그렇게 약하게 지으신 것이다. 아무리 부자라하여도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는다면 그는 실패자이다. 실패하고 가난하여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처럼 보여도 그가 성령을 구한다면 그는 성공자가 되는 것이다. 제발 강한 척하지 말고 그를 찾으며 그의 도움을 받아서 기적의 인생을 살자.

이같이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돕고 계신다. 그 분을 찾자. 그 분을 붙잡자. 약한 그 때가 바로 강함이 시작되는 때임을 믿자. (찬양) “약할 때 강함 주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 나의 모든 것, 주 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 할 수 없네 주 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 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 양 존귀한 이름, 쓰러진 나를 세우고 나의 빈잔을 채우네, 주 나의 모든 것……”(김원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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