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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뻐꾸기 신앙 (마 12:3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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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는 뻐꾹뻐꾹 하고 울어서 뻐꾸기입니다. 예쁘게 생겼고 목소리도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뻐꾸기는 얌체입니다. 뻐꾸기는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습니다. 그 새는 둥지에 뻐꾸기 알이 있는지도 모르고 알을 부화시킵니다. 뻐꾸기 새끼는 다리가 튼튼하고 활동적입니다. 그래서 아직 부화되지 않은 알들을 둥지 밖으로 밀쳐냅니다. 결국 뻐꾸기는 둥지를 독차지 합니다. 식욕도 좋아서 자주 입을 벌려 모이를 받아먹습니다. 어미 새는 자기 새끼인줄 알고 모이를 주기에 바쁩니다. 이런 식으로 뻐꾸기는 빨리 성장합니다. 깃털이 풍성해지면 뻐꾸기는 날아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런 뻐꾸기 같은 얌체들이 나옵니다.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 몇 사람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찾아와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다. 표적을 보여주면 믿겠다는 겁니다. 이들이 왜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을까요?

예수님은 이미 많은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항상 많은 이적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각종 불치병이 다 나았습니다. 또 귀신들을 내쫓으셨습니다. 바다에 큰 놀이 일었지만 꾸짖어 잔잔케 하셨습니다. 죽은 이마저 살렸습니다. 상상을 초월한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수많은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더 이상 보여줄 표적이 어디 있겠습니까? 뭘 보여줘야 이들이 믿겠습니까? 그렇게 많은 은혜를 받고, 그렇게 많은 기적을 보았지만 이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속이고 나를 속이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본 기적들은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신통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기적을 보여주면 그것을 검토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것을 보여줘도 믿지 않습니다. 또 트집만 잡을 뿐입니다. 기적을 눈속임의 마술이라고 매도할 것입니다.

은혜는 다 받고, 기적을 경험했어도 여전히 믿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얌체입니다. 이런 얌체 심보로 교회를 이용해먹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얌체 심보로 믿는 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쉬울 때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해결되면 다시 하나님을 저버립니다. 도리를 저버리고 인정도 없는 얌체 신앙입니다. 은혜만 빼먹고 주님을 위해서는 아무 헌신도 하지 않는 얌체. 이런 사람을 빗대 오늘 설교 제목을 뻐꾸기 신앙이라고 지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다른 표적을 청한 것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것입니다. 믿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기 위해서 청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청원을 거절하십니다. 그래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얌체들에게 세 종류의 손님이 찾아온다고 하셨습니다.


첫째 손님은 니느웨 백성들입니다.

예수님은 요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요나 이야기 속에는 표적이 나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3 일이나 있었다가 살아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뜻하는 요나의 표적입니다. 표적을 보여 달라니 이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 사명을 받았지만 하기 싫어서 도망을 쳤습니다. 가라고 한 니느웨와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바다는 폭풍이 일었고 요나는 바다에 빠져 큰 물고기의 먹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물고기 뱃속에서 3 일 동안 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물고기는 뭍에다 요나를 토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3 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요나는 결국 니느웨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했기 때문에 성의 없이 니느웨 성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니느웨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임금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인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시고 니느웨를 향한 심판의 칼을 거두십니다.
예수님은 얌체 신앙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도 심판을 예고하셨습니다. 오히려 니느웨 사람들에게 정죄를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니느웨는 유다 사람들에게 저주의 대상이었습니다. 니느웨는 이스라엘을 침공한 고대 앗시리아의 수도입니다. 열왕기상 19 장에는 앗수리 왕 산헤립이 18 만 5 천명의 병사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으로 하룻밤에 몰살되어 퇴각합니다. 그래도 결국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나라입니다. 지금은 쿠르드 족이 살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자이툰 부대가 이곳에 주둔하여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니느웨는 이스라엘의 원수입니다. 그것이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으려고 도망한 이유입니다. 요나는 경고도 필요 없이 바로 하나님이 심판해 주시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회개하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곧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만 했습니다. 그런데 니느웨 백성들은 그런 요나의 경고 메시지를 듣고 회개했습니다.
요나는 예수님에 비하면 작은 선지자입니다. 그래도 요나의 경고 메시지는 엄청난 위력이 있었습니다. 니느웨는 220 만평이 넘는 큰 성입니다. 이런 큰 도시가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요나보다 훨씬 위대한 예수님을 만났지만 회개할 줄 모릅니다. 그러니 심판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니느웨 백성들이 찾아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심판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두 번째 손님은 남방 여왕입니다.

예수님은 솔로몬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솔로몬은 지혜의 왕으로 유명합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구경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 중에서 남방 여인이 있었습니다.

본문 42 절에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 찾아온 스바 여왕입니다. 스바는 아라비아 서남부에 있는 아주 먼 나라입니다.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기 위해 그 먼 여행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시험하기 위해 어려운 문제를 냈습니다. 솔로몬의 대답은 척척 박사였습니다. 스바 여왕은 경탄을 하면서 많은 보물을 선물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솔로몬보다도 훨씬 더 큰이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지혜의 왕 예수님을 만났어도 그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생명의 말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습니다. 그 말씀은 잠든 영혼들을 번쩍 깨웠습니다. 율법에 억눌렸던 사람들이 해방을 맛보았습니다. 억눌려 지내던 가난한 자, 병든 자, 고아와 과부들을 위로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생수와 같은 진리의 해갈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편견을 가지고 말씀을 왜곡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시기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 앞에 마음을 열지 못했습니다. 반대로만 나갔습니다. 이들은 그러니 악하고 음란한 세대입니다. 이들은 점점 파멸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바여왕이 이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나는 솔로몬의 지혜를 듣고 경탄하며 온갖 보물을 드렸는데, 너희는 지혜의 왕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를 못하느냐고 호통을 치기 위해서 오는 것입니다.

도대체 거꾸로 가는 이들이 어디까지 가게 되었을까요?

세 번째 손님이 찾아옵니다. 이들은 더럽고 악한 일곱 귀신들입니다.

이 귀신 이야기는 이들이 갈 때까지 가 회복하기 어렵게 망가져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 이야기를 하고 마지막 45 절에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 더러운 귀신에 대한 이야기가 표적을 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곧 일곱 귀신이 손님으로 찾아올 것입니다. 저들은 귀신들려 처음보다 나중이 형편없게 되고 말 것입니다.

더러운 귀신은 사람에게 들어가 해코지를 합니다. 거라사 지방에 귀신들린 자의 이야기가 성경에 나옵니다. 귀신은 이 사람에게 못된 짓을 합니다. 그래서 귀신들린 자는 옷을 벗고, 제 몸을 돌로 상하게 했습니다. 괴성을 지르며 무덤과 산 사이를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러니 그 형상이 짐승과 같았습니다.

그런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다면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런데 그 다음이 더 중요합니다. 귀신이 사람에게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합니다. 더러운 귀신은 물을 싫어합니다. 물이 있으면 쉬질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을 받을 때 물 없는 광야로 가셨습니다.

엑소시스트란 영화에 귀신들린 아이에게 신부님이 성수를 뿌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이 닿으면 귀신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싫어합니다.

예수님이 거라사 지방의 군대 귀신을 내쫓자 돼지 떼에게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돼지들은 비탈길을 내리달아 바다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가장 확실하게 귀신을 물리친 사례입니다.

그런데 이 귀신이 쉴 곳을 찾지 못해 나온 집으로 돌아옵니다. 귀신은 사람 속을 아예 자기 집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와보니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어 있습니다. 이 때 가서 저보다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갑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고 맙니다.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었다는 것은 정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봐도 괜찮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집이 비어있습니다. 집이 비어있다는 것은 주인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귀신이 나갔으면 즉시 주인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여전히 방황하며 자기 몸의 주인이 되지 못하면 나갔던 귀신은 더 악한 상태가 되어 다시 점령할 것입니다. 귀신이 들어가면 귀신이 주인 행세를 합니다.

여러분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내 마음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면 귀신은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합니다.

처음에 귀신이 나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그것은 뻐꾸기 신앙처럼 일시적으로 주님을 이용한 경우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다가왔을 때 아주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였습니다.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한다고 청원했습니다.

속은 시꺼먼 사람이 겉으로 하얀 척 했습니다. 이런 사람을 교활하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주님을 이용해 먹습니다. 은혜를 챙깁니다. 이 때 귀신이 나갑니다. 그리고 주님 없이도 제 마음대로 살 궁리를 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런 얌체의 결말이 어떻게 됩니까?

나갔던 귀신이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옵니다. 처음보다 나중이 더 형편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한국교회 교인들에게 시사 하는바가 큽니다.

한국교회 교인들이 표적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누가 능력이 있다면 그리로 몰려갑니다. 그러니 요나보다 나은 예수님이 설 자리가 없으십니다.

또 조금 깨달음을 얻으면 금방 남을 가르치려고 듭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에는 돌팔이 지도자가 너무 많습니다. 다른 이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제 말만 옳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니 솔로몬보다 지혜로운 예수님이 가르칠 자리가 없습니다.

한국교회 주인은 누구입니까? 주님이 주인으로 자리 잡고 계시기가 불편한 경우가 많습니다.

지난주일 부활절 연합예배가 난장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설교를 맡은 여의도의 어느 큰 교회 목사님의 경호원들이 행사를 주관하던 준비위원장 김광준 신부의 멱살을 잡고 갖은 욕설을 하면서 단상에서 끌어 내렸습니다. 또 NCC 간사 김태현목사님도 같은 봉변을 당했습니다. 이 일은 단상에 순서와 상관없는 설교자의 부인을 앉히려다가 일어난 일입니다. 자기들 교회에서는 주강사 옆에 부인을 앉히는 것이 관례라고 합니다. 또 이 교회 신도들은 날씨가 춥다고 방석과 스토브를 설교 목사님 자리에만 설치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위대한 목사님은 연합 차원에서 마련한 공동 설교문은 한 줄도 읽지 않고 제 마음대로 설교를 하고 내려 왔습니다. 최근에 정년을 번복하고 연장 목회를 하고 있어 한국교회에 못된 본을 보이고 있습니다. 연합회가 이런 분을 설교자로 초청한 값을 치룬 것이라고 봅니다. 다음부터는 경호원을 거느린 목사님을 초청할 때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진정 교회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곳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계시기에 불편한 곳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보다 잘난 사람들이 많으면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교회에 적용해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여러분 자신에게 적용해 보십시오.

나는 표적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스스로 알건 다 안다고 으쓱거리지는 않습니까? 겉으로는 주님을 주인으로 모신 척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주님을 무시하고 제 마음대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움직이지 않습니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하셨습니다. 악한 세대의 결말은 형편없이 구겨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얌체 신앙, 뻐꾸기 신앙을 경계하십시오. 교회는 봉이 아닙니다. 교회는 헌신하는 곳입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 갚기를 하십시오. 섬김을 받았으면 또 다른 이를 섬기십시오. 말씀을 깨달았으면 그 말씀으로 장사를 하지 말고, 말씀대로 행하십시오.

경건하지 않는 자가 경건한 척하면서 주님께 다가오는 자는 곧 일곱 귀신 들릴 자입니다.

우리는 오늘 변하고 또 내일 변덕을 부릴 수 있습니다. 주님이 주인 되신 자리를 언제나 다시 꿰차고 내가 주인행세를 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귀신에게 자리를 내어줄 수도 있습니다. 항상 깨어서 이 주인 됨의 자리를 경계해야 합니다.

이 몸은 결코 귀신이 거할 집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왕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일시적이 아니라 항상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십시다. (황금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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