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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요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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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설교 제목은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입니다. 이 주제는 우리 신앙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인 만큼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는 않지만 예수님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석가, 소크라테스, 공자와 더불어 인류의 사대 성인 중 한 분으로 인정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이 분들의 가르침을 듣고 실천한다면 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정의롭고 따뜻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분들의 가르침 가운데는 일치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탐욕을 버리고, 악을 멀리하고, 이웃을 존중하고, 겸손하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가르침을 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륜에 관한 가르침을 비교해 보면 일치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면에서는 천양지차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이 믿어야 할 신앙의 대상이시나 다른 성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씀하면, 세상 사람들은 불쾌감을 드러내고 기독교를 배타적인 종교라고 비난합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올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른 성현들과 같이 탁월한 사람에 불과하다면 기독교의 주장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 이상의 존재인 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의 태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성경에 근거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지’ 말씀해 드림으로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 째로, 기독교 신앙의 근거인 성경에 관해서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절대 오류가 없으며 성경에 기록된 모든 내용은 다 진실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사실은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주장해서가 아니라 성경 스스로가 이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한 때 성경을 비과학적이라고 치부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할수록 성경이 옳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욥기 26장 7절에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며”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욥은 지금으로부터 약 4천 년 전 사람입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욥기를 모세가 기록했다고도 합니다. 그렇더라도 기록한지 약 3천 4백 년이나 됩니다. 그 때에는 천체 과학이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인류가 지구가 둥글고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은 불과 4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지구가 평평하며 우주의 중심이고 지구 위에 하늘이 펼쳐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미 3, 4천 년 전에 ‘하나님께서 땅을 공간에 다셨다’고 말씀했습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다윈의 진화론은 지구상의 생명체가 동일한 조상 곧 아메바에서 진화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현대 생물학은 같은 종(種) 범위에서 약간의 변형이 발생할 수는 있지만, 한 종이 다른 종으로 변하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고 말합니다. 예컨대, 백인과 흑인이 결혼해서 중간 색깔의 혼혈인이 태어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아닌 아주 다른 종으로 바뀌는 법은 없습니다. 인류 역사상 사람으로 진화하는 과정에 있는 침팬지나 원숭이가 발견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동식물을 창조하시되 종류대로 창조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식물에 관해서는 이같이 말씀합니다. “11)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리고 어류와 조류에 관해서도 이 같이 말씀합니다. “21)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리고 육지의 동물에 관해서는 이 같이 말씀합니다. “24)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방금 소개한 말씀을 보면, “종류대로” 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여러 번 사용했음을 단번에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후대에 진화론이 기승을 부릴 것을 아시고 성경에 모든 생물이 “종류대로” 창조되었음을 명백히 기록해 두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성경은 사실을 미화하는 일이 전혀 없습니다. 성도님들께서도 아시는 대로 성경은 선민 이스라엘 자손에 의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모세 오경은 선민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열 두 족장의 행적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조상들의 생애를 미화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선조들을 미화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모든 민족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선민의 조상 아브라함이 기근을 만나 애굽으로 내려갔는데, 그만 아내 사라의 미모가 소문이 났습니다. 이 소문이 애굽 왕 바로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바로가 사람을 보내 사라에 대하여 알아보니 아브라함이 사라를 자기의 아내라고 하지 않고 누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바로가 사라를 후궁으로 맞아들였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선민의 조상 아브라함에 관한 기록입니다. 수치스러운 내용이므로 빼어버려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아브라함의 훌륭한 점도 수치스러운 점도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36장에는 족장 유다와 맏며느리 다말이 상관해서 쌍둥이 아이를 낳은 사건을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가 누구입니까? 유다 지파의 조상입니다. 따라서 그런 부끄러운 사실은 누락해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하 11장에 보면, 이스라엘의 성군 다윗이 남의 아내를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인물 가운데 다윗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그는 또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윗을 미화하지 않고 그의 치명적인 수치를 그대로 기록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성경이 얼마나 진실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는데 그것은 이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만나 새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아낌없이 바친 그리스도인의 수는 셀 수조차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슬람 국가들과 북한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기독교 신앙을 지켜나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것은 누가 강요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경제적인 이익이 보장되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들이 살해의 위협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독교 신앙을 지켜나가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주이심을 의심 없이 믿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라고 증거합니다.

서론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 이상의 존재이십니다. 먼저, 살펴볼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장 1절에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태초 곧 영원 전에 말씀이 있었는데,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는 표현은 어렵긴 하지만 논리적으로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곧 이어서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한 구절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표현을 이해하려면,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되 단지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또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신 말씀은 곧 요한복음 1장 1절에 기록된 말씀과 동일한 존재입니다. 요한복음은 이 말씀이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거합니다. 이렇게 볼 때,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장 2절과 3절에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주시라는 뜻입니다. 이에 대하여 골로새서 1장 15절로 16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음 받은 존재가 아니요,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나신 분이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게서 나오신 하나님이시요, 빛에서 나오신 빛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이십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신 사실은 공생애 기간에 보여주신 여러 가지 이적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무리를 먹이신 일이라든지, 바다 위를 걸어오신 것이라든지, 풍랑 이는 바다를 명하여 잔잔케 하신 일이라든지,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문둥병을 깨끗케 하시며,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신 기적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기적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신 결정적인 증거는 죽은 지 삼일 만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것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지만 죽음을 정복한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성현군자, 영웅호걸, 평범한 사람들이 다 죽음 앞에 굴복하였고 땅에 묻혀 한 줌의 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망의 세력을 철폐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자기가 하나님이심을 입증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 사람이라고 증언합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는데, 이는 말씀이신 성자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증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요 역사적인 사실로서 이천 년 전에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탄생하셨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낮고 천한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달리 말하면, 성자 하나님께서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겸손을 말해 줍니다. 이에 대하여 빌립보서 2장 6절로 8절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낮고 천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실제로,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적인 능력을 나타내신 일과 함께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셨을 때 주님께서는 심히 주리셨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던진 첫 번째 시험은 “돌덩이를 떡덩이로 만들어 먹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갈증도 느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흘리시며 고난당하실 때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 또 피곤하면 잠도 주무셨습니다.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널 때에 배의 고물에 누워서 깊이 잠드신 적도 있습니다. 통증과 피로도 느끼셨습니다. 채찍에 맞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니 피가 낭자하게 흘러내렸고,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지쳐서 쓰러지기도 하셨습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희로애락을 느끼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오는 것을 환영하시고 아이들을 품에 안고 축복하셨습니다. 그 때 주님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성전을 더럽히는 장사꾼들을 보시고 화를 내시면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소와 양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슬피 우는 마르다와 마리아를 보시고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았습니다. 이는 우리 인간들의 연약함을 몸소 체험하심으로 우리를 더 깊이 이해하고 도와주시려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려서부터 가난을 경험하셨으며, 친히 목수 일을 하시면서 가족을 부양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의 어려움을 아시며, 노동의 고달픔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아마 우리 가운데 예수님보다 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의 온갖 고초를 맛보신 것은 우리의 저주와 질고를 담당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가장 큰 목적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고,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난 인간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타락한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 평생 죄를 지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아무리 수양을 하고 도를 깨치고 자선을 할지라도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할 수도 없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성자 하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시니 죄가 없으십니다. 지금까지 말씀한 내용을 정리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참 사람이십니다.

세 번 째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믿는 자들의 구주가 되심을 증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우리의 영은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였습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께 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도,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오직 이 세상일에만 관심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러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자 하나님을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존재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우리가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요 힘쓰고 애쓴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이 같은 영광스러운 특권을 부여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장 12절에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을 부여받습니다.

믿는 우리의 마음속에 성령께서 임재 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알게 해 주십니다.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을 때에는 죄와 죽음의 종이 되어서 감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지만, 이제는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언제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 죄 사함을 주십니다. 인간의 불행은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범죄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로서 범죄했으므로 그의 죄가 그의 모든 후손에게 전가되었습니다. 인종이나 민족이 어떠하든지 간에 모든 사람은 아담을 뿌리로 해서 생겨난 줄기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범죄한 것은 결국 인류 전체가 범죄한 것과 같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이 세상에는 죄가 들어왔고, 사망과 질병과 저주가 생겨났습니다. 인간 본성의 악함은 과거 사람들이나 현대인들이나 본질상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그것은 가인이 아벨을 쳐 죽인 형제 살인의 비극이 아담의 가정에서 생겨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죄를 범하는 것은 환경이 나빠서가 아니라 본성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인간의 불행을 근원적으로 해결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 희생 제물을 드리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아벨이 어린양을 잡아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린 것을 보면 희생 제사의 역사가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짐승을 잡아 희생 제사를 드린 것은 하나의 상징에 불과합니다. 희생 제물은 장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출애굽 직전에 지켰던 유월절 의식을 보면 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자손을 해방시키시려고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완고한 바로는 하나님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애굽 전역에 물이 피로 변하는 재앙을 비롯하여 개구리 재앙, 이 재앙, 파리 재앙, 악질 재앙, 독종 재앙, 우박 재앙, 메뚜기 재앙, 흑암 재앙 등을 내리셨으나 여전히 듣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애굽인들의 장자를 치는 재앙을 내리시기로 작정하시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시기를 재앙이 임하는 날 해질녘에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인 어린양이나 염소를 잡고 그 피로 집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집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과연 그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에 피를 바른 이스라엘 자손의 집은 넘어 갔으나 애굽인들의 집에는 위로 바로의 장자로부터 아래로 여종의 장자에 이르기까지 다 죽임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유월절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고 한 것은 이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구약 시대에는 일 년에 한 차례씩 대제사장이 제물의 피를 그릇에 담아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하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 때 백성을 대신하여 속죄 제사를 드린 대제사장은 예수님을 상징하며, 제물로 바친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제사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그림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11절로 14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보혈로써 우리를 위한 속죄 제사를 드려 주신 데 대하여 이 같이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희생으로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이 죄 사함을 받고 의롭게 된 것은 아담이 인류의 대표였던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 역시 인류를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기록 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 15:45) 라고 하심으로, 인류의 조상 아담을 첫 사람 아담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이라고 했습니다.

네 번 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18절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영이신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람으로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고서 살 자가 없습니다. 성경은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말하는 특권을 누렸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표현은 모세가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구하기를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곧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하였다는 표현은 그가 하나님의 영광의 일부분을 보았다는 뜻이지 하나님을 직접 보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영이시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로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계시의 정신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독생자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함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루는 제자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는 미워하시되 죄인들은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를 대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병들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동정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하신 예수님을 대하면서죄인들을 향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간절하게 호소하시는 하나님을 모습을 발견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무서운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 알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그 아들조차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 주신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소개하시되, 사랑이 한량없으신 아버지로 소개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의 올바른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야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이심을 믿으십시오. 이 사실을 믿을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고, 죄사함을 얻고 영생에 참여하게 됩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들은 대로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나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역사 상 가장 위대한 선지자에 속하는 인물들입니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단한 분으로 생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평가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께 대한 올바른 평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하니 예수님께서 크게 기뻐하시며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님 모두 시몬 베드로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올바른 신앙을 고백하심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뿐 아니라 주 안에 있는 모든 신령한 은혜와 특권을 누리면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양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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