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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왜 하필 어린이입니까? (마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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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린이주일입니다. 물론 어린이를 사랑하고 어린이에 대하여 관심을 더 갖기 위해 국가가 제정한 날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에겐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추천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어린이들의 눈동자를 보면 세계를 볼 수 있다"고 한 시인도 있습니다. 영국의 계관시인 시인 워즈워스는 "어린이는 어른의 스승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미지의 세계를 포용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만큼 순수하다는 것입니다. 장래에 어떤 위대한 존재가 될지 모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어른들보다 훨씬 나은 면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면 때문에 주님께선 어린아이를 추천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하필이면 어린아이를 추천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어린아이는 높아지려 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생존경쟁의 이유를 깊이 들여다보면 높아지려는 욕망에서 시작됩니다. 그게 돈이든 권력이든 모두 높아지려는 마음의 표출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이런데 때묻지 않았습니다. 어린이들은 의식적으로 자기가 높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물론 어린아이가 자라면서 달라지지만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자라기 전의 어린이의 상태를 추천하고 계신 겁니다.
예수님은 항상 낮아짐을 교훈하셨습니다. (마23:12)에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어른들의 세계가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교만한 세계라면 어린아이의 세계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기시면서 (요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라고 하십니다. 어린아이와 같이되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섬기는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한 본문은 이 원리를 너무 잘 말하여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높아지려 하고 높아진 이를 원하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더욱 사용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 편에서 크고 위대한 사람은 겸손해서 자기를 낮추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쓰임을 받고 축복 받는 비결은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겸손한 마음을 배울 것을 말씀합니다.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하십니다. 온유와 겸손, 그렇습니다. 어린아이에겐 그것이 있습니다. 어린아이 같이 되라는 말씀은 온유하고 겸손한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돌이켜 어린아이에게서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거짓이 없습니다

어린이들은 거짓말을 모릅니다. 그들은 의식적으로 남을 속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요. 엄마, 없다고 그러래요." 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있는 것은 있는 대로 없는 것은 없는 대로 그대로 표현합니다.
정말, 사람을 믿지 못하는 세상에서 살면서 거짓이 없는 어린아이들의 마음은 더욱 절실합니다.  세상에서 자라면서 그렇게 거짓 없던 어린이들도 거짓을 배우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거짓은 말세의 징조입니다. 사람들이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합니다. (딤후3:13)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거짓의 방법은 날로 진보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남을 속일까 하는 궁리만 늘어가는 세상에서 어린아이는 참되게 사는 삶의 원리를 제시해 줍니다.
불신과 거짓말은 동류입니다. 모두 지옥에 들어갈 조건입니다. (계21:8)에서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하도 세상이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 보니, 거짓말하는 게 그리 무서운 죄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거짓말은 살인이나 흉악범, 우상숭배 등과 같은 몹쓸 죄라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지옥에 떨어지는 원인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거짓을 버리고 진실함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엡4: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어린아이의 거짓 없음을 닮으시기 바랍니다.

꾸미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은 동경의 시절입니다. 그 때는 언덕빼기 하나, 가늘게 흐르는 개울 하나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때였습니다. 모두가 놀이터요, 모두가 기쁨을 주는 문화였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서 그런 순수한 마음은 사라지고 모두가 돈을 위한 도구요, 삶을 위해 이용해야 하는 물질로 보일 뿐입니다. "그거 몇 평이지, 한 평당 얼마야?" 이것이 어른들의 생각입니다. 만약 그런데 별로 소용이 없는 것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으려 합니다.
어른들의 눈은 세상에 찌들어 이미 타락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것을 가리려고 온갖 치장을 합니다. 화장을 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화장이라는 걸 모릅니다. 안 해도 그 순수함 자체로 예쁩니다. 어린아이들의 눈은 아직 수정 같습니다. 사파이어 같습니다. 순수합니다. 깨끗합니다. 몸은 흙위에서 뒹굴어 더러워도 마음만은 깨끗합니다. 주님이 추천하는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이제 우리는 물신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으로 주님 지으신 세계를 보아야 합니다.
어린아이는 혼자 살 수 없음으로 부모를 의지합니다. 이것도 주님이 추천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어린이들이 부모를 따르듯 하나님을 의뢰하고 따르고 신뢰해야 합니다. (사26:4)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라 하십니다. 어린이가 부모 없이 살 수 없듯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스스로 약함과 무력함을 깨닫고 하나님만을 의뢰해야 할 것이다. 깨끗한 마음은 꾸미지 않으며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이런 어린아이의 장점을 가져야 합니다.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습니다. 어른은 이미 다 되었지만, 어린이는 자라서 무엇이든 되겠다는 꿈이 있습니다. 이 점이 바로 주님의 어린이 추천 이유입니다. 항상 배우고 자라기 때문입니다. 배우는 대로 자랍니다. 또 배우려고 합니다. 오늘날 성도들 중에 가장 위험한 사람이 다 안다고 생각하여 배우지 않는 사람입니다. 배우지 않으려는 생각보다 더 위험한 생각은 없습니다. 낮아진 자세로 배우려하는 신앙인은 축복하시지만, 반대로 교만하여 배우지 않는 신앙인에겐 마귀가 동무하자고 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가 자랄 때 자주 질문을 합니다. 알고자 하는 욕심이 많습니다. 또 가르쳐주면 그대로 따라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영적으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신령한 것을 사모하고 배우기를 기꺼워해야 합니다. (벧전2:2)에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영적으로 상장하지 않으면 퇴보하고, 퇴보하면 마귀의 올무에 걸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어린이 주일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아직은 덜 자라 미숙하고 실수 투성이이지만, 어린이들 속에는 교만함이 없고 낮아진 자리에서 어른들을 공경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모습으로 주님을 존경해야 합니다. 거짓이 없습니다. 속이고 속는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참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꾸밈없이 죄를 덮으려고 하지 말고 순수함 그대로 주님을 신뢰해야겠습니다. 항상 영에서 출발한다는 생각으로 신앙을 배우고 또 배우며 신앙을 향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5월은 가정의 달이다. 가정은 하나님이 인간의 행복과 번영을 위해 제정해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이다. '미래의 충격'을 쓴 엘빈 토풀러는 미래의 특징은 가족제도가붕괴되 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늘 날 인류의 가장 큰 위기는 다른데 있지 않고 건전하고 신성한 가정제도가 무너 지고 있다는데 있다.

우리가 이러한 시대에 가정의 달을 맞는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갖 는 것이다. 우리가 가정을 소홀히 하고 가정을 잊고 살아가기 쉬운데 가정의 달을 통 해 다시 한번 가정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느슨해진 가족 관계의 나사를 다시 한번 조 일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오늘은 특별히 어린이 주일이다. 어린이는 가정의 꽃이요 우리 사회의 꿈나무들이 다.

어린이는 우리 사회의 보배들이다. 어린이는 가정과 사회에 웃음을 주고 희망을 준다. 그래서 가정에는 아이들이 있어야 한다. 좀 시끄럽고 귀찮은 것 같지만 아이들 이 있어야 웃을 일도 생기고 살맛도 나며 생기가 돈다. 예수님은 아이들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금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시며 말씀하시기를 '하나님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 니라' 하셨다. 계속하셔서 15절에 보니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 고'했다. 그리고 그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셨다. 예수님은 천국 시민의 자격과 모습을 어린이에게 두셨다.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1) 어린이는 단순하다. 영어로 단순한 것을 simplicity라고 말한다. 어른들의 세계는 좀 복잡하다. 단순하지 않다. 계산적이다. 사람을 사귀고 봉사를 하며 어떤 모임에 참석을 할 때도 항상 이것 이 나에게 어떤 이익이 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손해가 되지 않을 것인가 계산을 한 다. 심지어는 결혼을 하고 교회생활을 하면서도 이것이 얼마나 나에게 유익이 될 것 인가 수지계산을 맞추어 보고 결정을 하고 결단을 한다. 그만큼 어른의 세계는 이해 타산적이다. 그러나 어린이의 세계는 그런 것을 초월한다. 자기가 좋으면 한다.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외식과 형식이요 위선이다. 참 아이러니칼한 것은우 리가 교회생활을 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이 이러한 형식과 위선을 벗어버리고 단 순하고 꾸밈없는 진솔한 삶을 추구하는 데 있다. 그런데 자칫하면 신앙인들이 범하 기 쉬운 잘못이 무엇이냐 하면 이러한 외식과 위선적인 삶이다. 그러므로 부단히 자기 자신을 그러한 형식과 외식에 물들고 빠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항상 어린아이 같은 단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하고 섬기며 이웃을 사랑하 고 섬기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지난번에 말씀드렸지만 Childlike simplicity가 있 는 곳에만 Christlike freedom이 있는 것이다. 어린 아이같은 단순함이 있는 심령에 만 예수 그리스도가 누렸던 자유함을 만끽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단순성은 자유함이다. 형식과 치레는 굴레요 멍에이다. 단순성을 기쁨과 평안을 가 져다 준다. 치레는 근심과 불안을 가져다 준다.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 님은 사람을 단순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라'(전 7:29 예루살렘 번 역). 단순성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주시는 해방감을 맛보게 된다.

2) 어린이는 모든 것이 신비스럽다. 세상에 태어나서 바라보는 어린이의 눈에는 세상의 모든 사물이 참 신기하고 신비롭 다. 그래서 부모나 어른들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계속 질문을 던진다. 왜 코는 하나인 데 눈은 두 개이고 손가락이 다섯 개냐 등 많은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 부모는쓸데없 는 것을 묻는다고 야단을 친다. 아니 두 개니까 두 개이고 다섯 개니까 다섯 개지 왜 말이 많으냐고 호통을 친다. 어른들에게는 그것이 당연지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리의 삶에서 왜? 라는 호기심과 질문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만큼 인생의 excitement(흥분)이 사라지게 된 것을 의미한다. 오래 살다 보면 세상에 참 신기하고 묘한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다. 여러분! 세상에 참 신기한 것이 하나도 없어 보이고 감동적인 것이 하나도 없는 삶은 이제 살만큼 살았 다는 뜻이다. 그래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은 진짜로 곤란한 사람이다. 한 마디로 끝 장난 삶이다. 우리에게 삶의 스릴과 호기심이 사라졌다는 것은 삶이 사실은 끝장났 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이 항상 호기심으로 가득차고 경이감과 신 비스러움으로 가득찬 삶이 되도록 힘을 써야 한다. 나병에 걸리면 감각이 없어진다. 그래서 뜨거운 것을 만져도 뜨거운 지도 모르고 심 지어는 살이 떨어져 나가도 아픈 줄을 모른다. 그런데 영적으로도 그러한 현상이 나 타난다. 우리가 예배를 반복하고 신앙생활을 계속하다 보면 빠지기 쉬운 딜레마가 바로 그런 것이다. 아무리 감격스럽고 생동적인 예배와 찬양도 계속 반복하고 듣다 보면 우리 심령이 무디어지게 된다. 그때 우리의 신앙생활은 형식적인 것이 되고 생 명력을 잃고 만다.

3) 어린이는 천진난만하다. 물론 요새아이들은 너무 똑똑하고 어른 뺨을 친다. 우리 외손자도 할머니보다 컴퓨 터 게임을 벌써 더 잘 한다. 할머니 할머니하고 가르쳐 준다. 그러나 간난 어린이는 순결과 천진난만함의 상징이다. 어른들은 때가 많이 묻었다. 세파에 시달려서 순수 함을 잃었다. 그러나 어린이들은 정말 깨끗하고 그 눈동자가 얼마나 맑고 순결한지 모르겠다. 어린아이들의 마음을 백지장과 같다. 백지장은 무슨 그림이든지 그리는 대로 선명하게 그려진다. 아이들의 마음은 백지장과 같다. 어떤 의미에서는 스폰지 와 같다. 스폰지가 물을 막 빨아 흡수하듯이 무슨 이야기든지 해주면 쫙쫙 빨아 흡수 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가르쳐 보면 하라는 대로 한다.

4) 어린이는 미래지향적이다. 어린이는 과거가 없다. 어린이에게는 미래만 있다. 그러므로 어린이의 삶은 언제나 미래지향적이다. 그러기에 노년은 과거에 살고 장년은 현재에 살며 어린이는 미래에 산다는 말이 있다. 어린이는 항상 꿈꾸는 자들이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과도 일맥상 통한다. 기독교 신앙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항상 앞만 향해 나가도록 강조한다. 캄캄 한 밤에도 항상 새벽을 바라보는 소망의 믿음으로 살아가게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신앙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이루어 진 것처럼 현실화해 서 살아가고 아직 보지 못한 것을 본 것처럼 앞당겨 살아가는 삶인 것이다. 즉 소망 중에 바라고 인내하며 살아가는 삶이다. 소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하 고 놀라운 선물이다. 어떠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이기게 하시고 용기와 새 힘을 얻게 하는 삶의 원천이 다. 인간은 마치 고기가 물을 떠나 살수 없고, Jumbo Jet기가 공기없이 나를 수 없는 것처럼 인생은 소망없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주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의분(義憤)을 내실 때가 있습니다. (마21:19)에서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을 때, (마21:12, 요2:15)에서 성전 숙정사건 때, (막3:1-5)에서 회당에서 손 마른 자를 고치면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화를 내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화를 내십니다. 주님께서 왜 화를 내십니까?

첫째, 예외 없는 사랑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관념 속에서는 어린아이나 여자들은 수(數)에 들지도 못하였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때도 여자와 아이들을 제외하고 5,000명이 먹었다고 합니다.(마14:21) 출애굽한 60만도 여자나 아이는 제외된 숫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제자들은 그 관념 속에서 어린아이들이 오는 것을 금한 것입니다. 이유야 어떻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격앙된 어조로 분(憤)을 내면서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어린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가 예외 없이 자신이 필요함을 이 장면에서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롬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예,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남녀노소에 차이가 없습니다.

둘째, 어린아이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책망을 들은 이유는 그들이 어린아이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사모하여 예수님께로 가까이하는 아이들을 막은 것은 자신들의 율법과 전통만 생각하지 주님께서 어린아이들 속에 있는 참된 모습을 보시고자 한다는 걸 몰랐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아는 게 문제입니다. 오늘날도 아는 게 문제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은 예수님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18: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결단코'라는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차라리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자' 즉, 어린아이 같지 않으면 천국시민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셋째, 그럼, 어린아이는 어떻습니까?

1) 순진무구(純眞無垢)합니다.
요즘 애들이 그러지 않아서 걱정입니다만, 아이들의 특성 중 가장 두드러진 게 바로 순진하다는 겁니다. 머리를 굴리지 않습니다. 앞뒤를 재지 않습니다. 높아지려고 기를 쓰지도 않습니다. (마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낮은 그 자리에 만족합니다. 거짓말을 못합니다. 어린아이가 전화를 받았을 때 부모가 받기 싫은 전화이면 '없다 그래!' 그럽니다. 그러면, '엄마가 없다고 그러래요.' 하는 게 어린아이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놀라운 어획기적이 일어납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바보처럼 순진합니다. 거기가 기적의 자립니다. 어른이 보기엔 좀 덜떨어진 것 같은 게 바로 어린아이의 모습입니다. 바로 그 자리가 주님 계실 자립니다. 여러분에게 그 자리 있습니까? 어린아이에겐 죄악의 요소가 어른보다 적습니다. 바로 주님은 이런 자를 사랑하는 겁니다. 여러분! 바로 이런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2) 부모를 절대신뢰(絶對信賴)합니다.
어린아이는 자기 부모가 전부입니다. 무식하고 못난 부모도 자기의 부모를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제일 잘난 부모라고 믿습니다. 부모만 있으면 굶든지, 전쟁이 나든지 걱정이 없습니다. 어린아이는 엄마가 없으면 웁니다. 그것은 의지할 대상이 없어서 우는 겁니다. 의지할 대상을 꼭 곁에다 두려는 욕심이 어린아이에게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없어도 잘도 사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렇담, 여러분에게서 천국은 멉니다. 하루만 하나님 못 봐도 울음이 나와야 합니다. 근데, 일주일에 한번! 아니, 한 달에 한번 봐도 괜찮은 성도는 아닙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그분을 신뢰하지 않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 세상입니까? 아버지가 계신데 실망하고 좌절하는 성도가 얼마나 많습니까? (수1:9)에서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말씀하시는 데도 땅을 보고 탄식하는 성도는 아닙니까? 주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십시오. (사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을 향한 절대신뢰 잊지 마십시오!

3) 젖을 사모(思慕)합니다.
어린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어머니의 젖을 사모합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누구에게 배운 일이 없어도, 젖을 빨아먹는 것은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본능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벧전2:2)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근데, 성경을 얼마나 봅니까? 설교 듣기를 얼마나 좋아합니까? 부끄럽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천국은 놓치기 싫은 게 당신의 모습이 아닙니까?
어린아이는 먹는 대로 성장합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먹는 교인은 성장합니다. 그러나 반찬투정이나 하고, 군것질이나 하는 아이는 발육에 문제가 있습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를 잘하느니 못하느니, 여기저기 다니며 군것질하는 성도, 그들의 신앙엔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성도입니까? 어린아이에게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진수성찬(珍羞盛饌)이나 산해진미(山海珍味)보다도 어머니의 젖이 필요한 것과 같이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신령한 영적 젖을 먹어야 합니다. 그것도 어머니, 즉 담임목사가 주는 젖을 먹어야 합니다.

4) 가르쳐주는 대로 합니다.
어린아이들이 누구에게 무엇을 배우느냐에 따라서 그의 인격이 형성되고 그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도둑질을 가르치면 커서 분명히 도둑놈이 될 것입니다. 그림을 가르치면 화가가 됩니다. 피아노를 가르치면 피아니스트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믿음을 가르치면 그 아이는 커서 분명히 하나님을 잘 섬기는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아이들은 무엇이든지 가르쳐 주는 대로 잘 배웁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도 아이처럼 잘 배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배우기를 싫어하면 좋은 성도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배우고 묵상해야 합니다. (시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를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

자! 사랑하는 예은가족 여러분! 주님을 화나게 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화내면 여러분에게 이득 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아직까지 살아온 전통과 습관만 고집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잘못된 습관과 아집, 고집을 과감히 버리십시오. 여러분이 어린아이의 심성을 품지 않으면 주님은 화내십니다. 잔머리 굴리지 마시고 순전하십시오. 차라리 주안에서 바보가 되십시오.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십시오. 다른 것 없인 살아도 주님 없인 못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령한 젖을 사모하십시오. 그러기 위해 말씀 듣는 걸 최상의 과제로 삼으십시오. 배우기를 힘쓰고 가르쳐준 대로 순종하십시오. 천국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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