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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애굽의 수치가 벗어진 사람들 (요 4: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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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치심
방금 우리는 '살아있는 비너스'로 불리고 있는 영국의 여성 장애인 앨리슨 래퍼에 대한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앨리슨 래퍼는 양팔이 없고 다리가 짧은 기형으로 태어났지만 시종 밝은 모습으로 “내 삶은 행복해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만일 당신이 앨리슨 레퍼와 같은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앨리슨 래퍼와 같이 “내 삶은 행복해요”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많은 분들이 장애인이라는 수치심 때문에 행복하지 못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수치심이 우리를 짖누르고 우리의 행복을 빼앗아 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수치심이란 무엇입니까?
수치심이란 자아가 손상 되었을 때 느끼는 부정적 정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인간만이 수치심을 느낀다고 합니다. 사람이 짐승과 구별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수치심입니다. 여러분, 개와 고양이가 수치심을 느낀 것을 보았습니까? 강아지가 반갑다고 스타킹을 다 물어 뜯어 놓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던가요? 고양이가 침대에 올라와 이부자리에 오줌을 싸 놓고 수치심을 느끼던가요? 가끔 털이 다 깍인체로 돌아다니는 애완견을 봅니다. 그런데 아무런 수치심도 없이 잘만 돌아다닙니다. 만일 인간이 옷을 다 벗고 돌아다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온전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겠습니까? 이렇게 수치심은 인간만이 느낄 수 없는 감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성추행과 살인을 일삼으면서도 전혀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사람들을 봅니다. 당연히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전혀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정말 뻔뻔 스러운 사람들을 봅니다.

이렇게 볼 때 수치심이 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수치심은 인간에게 유익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리 파워스는 『수치심』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정당한 수치심, 건전한 수치심은 도리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관계를 회복하는데 ‘영혼의 신호등’이 되지만 잘못된 수치심은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마저 깨뜨리는 ‘감옥’이 된다” 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건전한 수치심은 자신의 한계를 알게 하여 하나님 앞에 자신을 겸손하게 만들지만 해로운 수치심은 강박장애, 완벽주의, 열등감, 성격장애 등 모든 종류의 정신적 질병을 일으키는 핵심적인 요소가 됩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아오면서 수치심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인생을 살아오면서 누군가로부터 수치를 당하여 본 적이 있습니까?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바 되어 귀하게 쓰임 받았던 사람들에게도 말로다 할 수 없는 수치스러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던 다윗에게도 수치스러움이 있었습니다. 옥상을 거닐다 목욕하는 한 여인을 보고 시험에 들어 왕의 권력으로 그 여인을 데려다가 자기의 부인을 삼고  전쟁 중에 있는 남편을 최 전선에 내어 보내어 죽게 만든 인생의 수치와 부끄러움이 있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사울 왕이 자기를 시기하여 죽이려고 할 때 신앙의 국경선을 넘어 블레셋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가장 안전한 곳이라 생각하여 블레셋으로 도망을 갔는데 블레셋 왕의 신하들이 자기를 알아 보았습니다. 자기의 신분이 들통이 나자 다윗은 절박한 상황 가운데서 살아남기 위하여 침을 흘리며 미친짓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왕이 그 미친 짓에 속아 넘어가 죽음의 고비를 넘기게 됩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장차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까지 받은 다윗이,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물리쳤던 다윗이 적국의 왕 앞에서 미친 짓을 한다는게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이 두 사건은 다윗의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수치스러운 사건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인생에도 수치스러움이 있었습니다. 약속의 말씀을 믿고 가나안 땅에까지 들어왔다면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였어야 하는데 그만 기근을 당하자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남방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사라가 너무 예쁘니까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취할 것 같으니까 자기 아내를 아내라 하지 않고 누이라고 부르게 합니다. 이 말은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끌려가도 괜찮은데 나는 죽지 않고 살아야 되겠다는 그런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입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도 수치스러움이 있었습니다.

□ 수치심을 가진 사마리아 여인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수치심 가운데 인생을 살았던 또 한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은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우리는 이 여인을 흔히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이라 부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서 그 여인을 만나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기 위해 머나먼 길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냥 지나가다 들르신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일부러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 도착한 시간은 바로 6시 우리 나라 시간으로 정오인 12시였습니다. 유대에서 사마리아 수가성까지는 짧은 거리가 아닙니다. 적어도 걸어서 4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그 머나먼 길을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머나먼 길을 찾아와 만나 주신 이 사마리아 여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18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18절)
이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동거하며 살고 있는 남자도 온전한 남편이 아닌 그런 여자였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기둥서방입니다. 물론 그 시대적 상황으로 보았을 때 이 여자가 남자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 남자들로부터 버림을 받았겠지요. 하지만 남편을 다섯이나 두고 살았을 정도인 것을 보면 문란한 생활을 하여온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늘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았던 수치스러운 여인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사람들이 물을 길르러 오지 않는 한낮의 정오에 물을 길르러 왔겠습니까? 그런데 이 여인이 수가성 우물 가에서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생수에 관하여 말씀하시던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메시야심을 드러내셨습니다. 26절을 다같이 볼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26절)
예수님은 내가 바로 그 선지자들이 예언하고 기다렸던 메시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로라”
이 죄 많은 여인, 수치러운 여인이 메시야이신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인생의 오점을 가지고 부끄러움 속에 살던 이 여인이 물을 길르러 왔다가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그러면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만난 이 여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일까요? 29절을 다같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29절)
예수님을 만난 이 여인은 가장 먼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냥 예수만 전한 것이 아니라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고 했습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이란 무엇입니까?
남편을  다섯이나 둔 일입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 치운 일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너무나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입니까? 그런데 이 여인은 “내게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보라”며 자신의 더 이상 자신의 수치스러운 과거에 대하여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동네 사람들을 피하여 정오에 물을 길르러 온 이 여인이 아닙니까? 얼마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행한 과거의 모든 일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리고 수치스러움 때문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숨어지내던 여인이 아닙니까? 얼마전까지만 해도 누가 자신의 아픈 과거의 상처를 건드릴까봐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 지내던 여인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 속으로 뛰어 들어가 친히 사람들 앞에서 외치기 시작합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담대하게 자신의 과거까지 거론하며 외치기 시작합니다. 자기를 손가락질하던 사람들에게로 달려가 예수님을 담대히 전하기 시작합니다. “너희들은 내가 어떤 여자인지 알고 있지 않느냐 그런데 나의 모든 과거를 다 알고 계시는 메시야를 내가 만났다. 어서 속히 와보라”

어쩌면 이렇게 사람이 달라질 수가 있을까요? 불과 몇 분만에.....이렇게 사람이 달라질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녀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순간 자신의 모든 수치가 벗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모든 죄책감에서 해방되었고 그 모든 수치와 부끄러움이 벗어졌기 때문입니다.

□ 왜 예수를 만나면 수치와 부끄러움에서 해방되는가?
그러면 왜 예수를 믿으면 수치심과 모든 부끄러움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될까요?
예수님이 내 대신 수치와 조롱과 멸시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나면 모든 수치와 부끄러움에서 해방됩니다. 예수를 믿으면 죄와 죽음의 법에서만 해방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결과인 수치와 부끄러움으로부터도 자유함을 얻습니다.

1. 수치와 부끄러움은 죄의 결과
인간이 짓는 모든 죄에는 죄의 형벌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죄의 형벌이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고통입니다. 수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온갖 고통과 수치와 죽음을 담당하셨습니다. 죽음만이 아니라 수치와 부끄러움도 죄의 결과입니다.

우리 인간이 언제 최초로 수치와 부끄러움을 느꼈습니까?
아담과 하와과 타락하면서부터입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수치와 부끄러움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과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는 순간부터 수치와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 3:7).
아담과 하와는 눈이 밝아졌고 자신들의 벗은 몸을 보고 부끄러워져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하고서 그 부끄러움을 가리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이 범죄한 다음 최초로 경험하는 수치와 부끄러움이었습니다. 나중에는 부끄러움 뿐만 아니라 두려운 마음이 생 겨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2. 아담의 모든 후손은 수치를 숨기고자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아담의 후손인 모든 사람은 수치를 숨기고자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 모든 인간은 누구나 숨기려하는 부끄러운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아담의 후손인 우리 인간들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의 수치심을 숨기려고 하고 있습니다. 양심의 가책에 대한 수치, 학력의 수치, 무지와 가난함에 대한 수치 이런 것들을 가리고 치장하기 위하여 많은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3. 인간의 수치는 무화과 나뭇잎으로 완전히 가리워 질 수 없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인간의 죄와 허물로 말미암는 수치는 무화과 나뭇잎으로는 완전히 가리워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내어 쫒을 때 무화과 나무 잎 대신에 가죽 옷을 지어 입힌 다음에 내어 보내셨습니다. 가죽 옷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가 입게 될 거룩한 의의 옷을 말합니다. 아무리 인간이 선하게 산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의로움을 가지고 자신의 수치를 가리울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에 의해서만이 우리의 수치와 부끄러움이 가려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온갖 수치와 조롱과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로마의 병정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긴 다음 자색 옷을 입히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하면서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쳤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조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어 가졌습니다.

성경을 보면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들도 예수님을 욕하였고 십자가 밑을 지나가던 자들도 “머리를 흔들며 성전을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며 조롱하였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도 “네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구나 네가 정말 이스라엘의 왕이라면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를 구원하여 보라” 비아냥 거렸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 때문에 수치와 조롱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을 대신하여 수치와 조롱과 멸시를 받으셨기에 우리의 수치와 부끄러움이 가려지고 굴러간 것입니다.
□ 애굽의 수치가 벗어진 사람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이 구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가나안의 정복에 앞서 길갈에서 할례를 받게 하고 유월절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길갈의 뜻이 무엇입니까? 여호수아 5:9절을 볼까요?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수5:9)
'길갈'이란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유월절과 할례를 지켜 행함으로 애굽의 모든 수치가 벗어졌다는 사실을 새롭게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1. 애굽의 수치란?
430년 동안 애굽에서의 종살이를 말합니다.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한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수치였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입니까? 애굽의 수치란 더 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 전 광야에서 40년동안 방황하면서 이방 백성들에게 당한 조롱과 비웃음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자기들의 말대로 광야에서 40년동안 헤매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지켜본 이방 사람들, 특히 애굽 사람들 눈에는 “아직도 광야를 헤메이고 있다”고 하는 비웃음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렇게 오랫동안 광야에서 헤맬 것이면 차라리 애굽에 남아서 우리의 종노릇이나 할 것이지“라는 비아냥이 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할례를 받고 유월절을 지킴으로 더 이상 애굽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 관계가 새롭게 회복되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의 모든 수치가 벗어졌습니다.

2. 예수님을 영접한 자는 애굽의 수치가 벗어진 자이다.
길갈이라는 이름의 의미가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은 오늘 예수를 믿음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온 하나님의 자녀는 애굽의 수치가 벗어진 자라는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속죄함을 받고 예수를 믿음으로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애굽의 수치가 벗어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옆사람과 인사하겠습니다. “당신은 애굽의 수치가 벗어진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애굽의 모든 수치가 벗어진 자입니다. 애굽의 모든 수치가 굴러간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아직도 애굽의 수치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어떤 수치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어떤 부끄러움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당신이 예수를 만나면 그 모든 수치들이 다 사라집니다. 아침 안개가 사라지듯이 하늘에 먹구름이 사라지듯이 사라집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보십시오. 그렇게도 수치심과 부끄러움 속에 살던 이 여인을 보십시오. 그 모든 수치와 부끄러움이 한 순간에 벗어지지 않았습니까?

3.  왜 애굽의 수치가 벗어져야 하는가?
그러면 왜 애굽의 수치가 굴러가고 벗어지는 일이 그렇게 중요할까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애굽의 수치가 벗어진 자라야 오랫동안 기다리던 가나안 땅의 풍요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의 원주민을 몰아내는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길갈이라는 곳에서 할례를 행하게 하고 유월절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가나안 정복에 있어서 길갈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 지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 기념비를 세운 곳이 바로 길갈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첫 유월절을 지킨 곳이 바로 길갈입니다. 언약 백성의 표시인 할례를 받게 한 곳이 바로 길갈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의 원주민을 몰아내는 싸움을 할 때 전쟁에서 승리하여 땅을 정복해 놓고도 길갈로 돌아와 영적 재무장을 하고 다시 돌아가 싸웠습니다. 그러니까 영적 재무장의 장소가 바로 길갈입니다.
그런데 그 길갈의 뜻이 뭐라고 했습니까? “애굽의 수치가 굴러갔다.”는 뜻입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애굽의 노예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모든 부끄러움이 벗어졌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애굽의 수치가 벗어진 자라야 오늘 가나안의 원주민을 몰아내는 영적인 전쟁을 할 수 있습니다. 애굽의 수치가 벗어진 자라야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풍성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수치심과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자는 영적인 전쟁을 할 수 없습니다. 수치심과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자는 내일을 향하여 도전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 주변의 영향력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를 믿음으로 애굽의 수치가 굴러간 사람들입니다. 수치심을 극복한 사람들입니다.

① 하인스 워드
얼마전 한국을 방문했던 미국 풋볼의 MVP 하인스 워드를 보십시오. 그는 한때 피부색이 자신과 다르고 영어를 못해 숙제를 도와 주지 못하는 어머니를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는 한때 혼혈인라는 수치심을 가지고 산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수치를 벗어 버리고 이 시대의 영웅으로 태어났습니다. 거기에는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② 오프라 윈프리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오프라 윈프리라는 여성입니다. 그녀는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는 여자입니다. 그는 인종차별주의가 극심한 미시시피주 가난한 흑인 출신 사생아로 태어났습니다. 6살 때까지 외가에서 자랐고, 13살 때까지 밀워키에서 파출부로 일하는 편모 슬하에서 자랐고, 19살 때까지는  다른 여자와 살고 있는 아버지 집에서 자랐습니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그녀는 마약을 하고, 난잡한 성생활로 미혼모도 되고, 가까운 친척에게 성폭행도 당하였고, 소녀 감호원에도 출입하는 등 형편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 안에서 그녀의 모든 수치심이 벗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도 사람들이 자기를 흑인이라고, 산골출신이라고, 뚱뚱하다고, 비난하고 마약을 한 여자, 강간 당한 여자, 사생아를 낳은 여자라고 자신을 비난하며 자신의 과거를 들추어 자신을 괴롭힐 때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는데“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는데 누가 나를 정죄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를 믿음으로 나의 수치와 부끄러움이 사라졌는데 오늘 누가 나를 정죄할 수 있단 말인가?

③ 이순애 전도사
예수 안에서 자신의 수치심을 벗어버리고 멋있게 쓰임받는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교회 엔젤부를 담당하고 있는 이순애 전도사님입니다. 이제 전도사님의 간증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이순애 전도사님은 서울에서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중학교에서 국어교사를 하며 연극인으로 활동을 하였습니다. 국립극장 개관기념 연극제에 출연하여 여자 연기상을 받을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하다가 뇌혈관이 막혀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2년 후에 뇌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 후유증으로 두달에 한번씩 주기적으로 심한 경련을 일으키면서 발작을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간질증상까지 보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이나 죽으려고 했지만 한쪽이 불편하니까 마음대로 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친구의 전도로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마팀내 간절히 기도하여 간질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순애 전도사님은 주님을 만남으로 모든 수치심으로 자유함을 얻고 이제는 신학까지 하여 지금은 저희 교회 엔젤부(장애인) 담당 전도사님으로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당신의 수치가 무엇입니까? 학력에 대한 수치, 가문에 대한 수치, 죄에 대한 수치, 신체와 외모에 대한 수치입니까? 주님이 당신의 모든 수치를 담당하셨습니다.
수치심을 극복한 자만이 내일을 향하여 도전할 수 있습니다. 수치심을 벗어버린 자만이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찬양......282장  예수님의 보혈로 나의 모든 부끄러움이 사라졌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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