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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행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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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연속작품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누가는 복음서를 기록한 후에 이어서 사도행전을 기록하여 그의 후원자였던 로마의 고위 관리인 데오빌로에게 보낸 것입니다.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먼저 쓴 글은 바로 누가복음인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의 행하시고 가르치시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하심과 승천하시기까지의 일이 기록되었습니다.

누가복음의 마지막 24장은 예수님의 부활과 그 증거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4가지로 요약 될 수 있습니다.

1. 부활하신 주님은 절망하고 패배감에 빠져있던 제자들을 만나시고 위로하셨습니다.

절망과 패배감을 가지고는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희망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에 절망하는 우리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제자들을 만나시고 평안과 위로를 주셨던 부활하신 주님이 오늘도 여러분들을 찾아오시고 친히 만나 주시고 위로와 평안 주시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여러분의 삶에 절망이 끝나고 새로운 소망이 시작되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위로하심으로 패배의식을 극복하고 다시 용기 있는 승리의 삶을 향하여 도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주셨고 말씀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제자의 길을 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말씀을 깨닫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는  말씀이 필요합니다. 말씀이 제자들 안에 있어야 말씀이 그들에게서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도 알 수 없고 영적 분별력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 맘대로 살다가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영적이 지혜를 얻는 것이 필요합니다.

3. 너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고 말씀하시며 부활의 증인이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이란 주님이 행하신 모든 사역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도 주님이 행하신 사역을 해야 합니다. 특별히 부활하신 주님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참 구세주이신 것을 증언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4. 손을 들어 축복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베다니까지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향해 두 손을 높이 드시고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제자들에게 마음껏 부어주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하심이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주님이 축복하셔야 우리가 거하는 모든 삶의 자리마다 큰 기쁨이 함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여기 여기모인 우리들을 향하여 부활하신 주님이 축복의 손을 높이 드실 줄 믿습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축복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절망과 고통과 한숨과 눈물을 닦아주실 줄 믿습니다.
모든 두려움과 우리들 둘러싼 어두움의 질병을 고쳐주사 큰 기쁨을 얻게 하실 줄 믿습니다. 

복음서의 신앙은 구원받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해 줍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일들은 병든 자를 고치시고 묶인 자를 자유케 하며 주의 은혜를 선포하시는 일이었습니다. 마침내는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대속의 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40일간 부활하신 주님은 절망하는 제자들을 위로하시고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깨우치시고 축복하시면서 승천하셨습니다.

이제 그 뒷부분이 사도행전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주님이 승천 하신 후 제자들의 사역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놀라운 행적 배후에는 항상 성령이 역사하고 계심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서를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구원의 기쁨을 얻게 되었다면 이제 복음서를 넘어서서 사도행전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적인 삶은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얻은 성도들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사명자의 삶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가야 할 제자의 길입니다.

성도 여러분들은 복음서에 머물러있는 신앙에서 사도행전으로 넘어서는 신앙으로 성장하고 성숙되어지시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은 부활하신 주님이 승천하시면서 주시는 당부의 말씀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4절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들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부활하신 주님은 두 가지 당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첫째,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을까요?

누가복음 24장의 표현에 보면
23절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죄 사함을 얻는 회개는 구원의 복음입니다. 그것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복음이 모든 족속에게로 전파되는데 그 근원지가 예루살렘이라는 것입니다.
떠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복음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땅 끝까지 전파되어야 할 복음이 증거되는 곳입니다.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땅 끝선교의 사명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복음의 진원지요 복음의 사명이 시작되어야 하는 사명의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말씀은 사명을 떠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사명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사명을 붙들어야 합니다.

사명은 성도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두 성도가 서로의 의견충돌로 심하게 다투었고 마음에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 일로 한 사람은 자기가 하던 교사의 일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주어진 사명이 있기에 사명을 붙들고 인내했습니다. 인내의 과정은 많은 고난과 아픔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명을 붙들고 인내했던 성도는 마음의 상처를 극복하고 더욱 충성된 사명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사명을 잃었던 성도는 계속 번민과 갈등으로 괴로워하다가 그만 믿음마저 잃어버리고 교회를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사명은 성도가 복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사명을 잘 감당하면 내 믿음이 자라고 하나님께 인정과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상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착하고 충성된 종에게 더 많은 것으로 맡기시고 상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사명은 성도를 승리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명은 곧 능력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모세에게 들려지었던 지팡이는 하나님이 주신 지도자의 사명이었습니다. 모세가 그 지팡이를 손에 들 때 그 지팡이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명자에게 사명을 사용함으로 더욱 큰 능력을 나타내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사명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사명을 잃으면 내 믿음이 사라지고 영혼이 죽어지는 것입니다.
사명을 끝까지 붙들면 시험도 이기고 더욱 큰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고난의 땅입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희생과 순교의 땅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고난과 죽음을 두려워하고 예루살렘을 떠날 때 주님을 길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물었습니다. ‘궤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버리고 떠나는 예루살렘으로 너를 대신하여 내가 다시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회개하고 발길을 돌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예루살렘은 죽음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고난과 역경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이 사명의 자리요 주님이 꼭 있기를 원하시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의 땅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인내하며 사명을 감당하고 축복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창26장에 보면 이삭이 흉년을 피하여 애굽으로 가기 위해 그랄이라는 곳에 이르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말씀하십니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애굽으로 가지 않고 그랄에 머물면서 농사를 지었는데
그 해에 풍년이 되어 백배의 수확을 얻었고 하나님이 복을 주시므로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내하며 사명을 감당하면 반드시 축복의 때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사명이 조금 힘들다고 내려놓으면 안됩니다. 조금 기분이 얺짢다고 사명을 포기하면 안됩니다. 기분 좋으면 하고 기분 나쁘면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사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은 그것이 크든지 작든지 어떤 사명이라도 소중한 것입니다.
사명은 끝까지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주님의 당부를 이 시간 바로 들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궁극적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교는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최고의 사명입니다. 그 사명은 지금 내가 맡고 있는 사명이며 하나님의 선교라는 큰 사명에 속한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조금 힘들다고 떠나지 마십시오. 은혜의 자리를 떠나지 마십시오. 사명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내게 주어진 사명이 없다면 스스로 사명의 자리로 나아가 사명자로 굳건히 서시기를 바랍니다.
사명을 붙들어야 사명이 나를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고 사명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붙들리는 것입니다.
사명이 여러분의 영을 살게 하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나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두 번째 당부하신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약속하신 것 그것은 보혜사이십니다.
요한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약속이며 부활하신 주님의 약속이십니다.
그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성령을 기다려야 하셨을까요? 

성령이 도우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약하고 부족합니다. 쉽게 무너지고 포기합니다.
그러므로 사명은 내 힘으로 결코 끝까지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잠시 동안은 할 수 있지만 오래 할 수 없습니다. 좋은 상황에서는 할 수 있지만 조금 불편하고 힘겨우면 할 수 없습니다. 기분에 따라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령이 우리를 도우셔야 합니다. 성령이 도우시면 할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능력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가진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말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능력을 얻기 위해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사명의 자리입니다.
기도의 자리요, 헌신의 자리입니다.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었던 것처럼 우리들도 주님이 원하시는 곳에 있어서 능력을 힘입어 주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약속의 말씀을 믿고 기다리면, 기다리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성취하여 주십니다.
다윗 왕도 시편 40편 1절에서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난 후 왕이 될 때까지 14년이나 걸렸습니다. 그 시간동안 그는 사울에 의해 광야로 쫓겨 다니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때로는 소망이 없어 보일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었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다윗이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기다리는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그 약속을 이루어주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기다리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시37편7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성경은 기다리기 위한 조건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잠잠하고" 그랬습니다. 말을 많이 하고, 불평하고, 조잘거리는 것은 기다리는 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잠잠하지 못했습니다. 말을 많이 했습니다. 불평을 많이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 아닙니다. 침묵은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입니다.
둘째는 "참아" 그랬습니다. 인내는 기다림의 뿌리입니다. 기다림의 자세입니다. 조급해 하고, 다투고, 대항하는 것은 하나님의 싫어하시는 모습입니다.
로마서 8:25에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참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참아야 기다려집니다.

나무로 집을 짓는데 6개월이면 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무 한 그루를 키우시는데 100년은 걸립니다.
하나님의 기다리심이 없다면 우리의 삶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다리심이 없다면 우리의 구원도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인내(Patiece)와 열정(passion)이라는 두 단어는 라틴어의 한 단어인 '파시오'(pasio)에서 파생되었습니다.
파시오란 말의 뜻은 '견디다'는 뜻입니다. 인내는 견디는 것입니다. 열정도 사실은 견디는 것입니다. 견디는 것이 없으면 열정이 있을 수 없습니다.
기다림은 고통과 힘드는 것이 있지만 동시에 은혜요 즐거움입니다. 기다림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기다리면 손해 볼 것이라는 생각이 많습니다. 그러나 기다려서 손해 보는 것보다 기다리지 않아서 손해 보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기다리는 것은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식물학자의 말을 빌리면 식물은 밤, 어둠 속에서 가장 왕성하게 성장한다고 합니다. 식물이 성장에 필요한 영양소를 만들어내는 시간은 낮이지만, 줄기가 자라고 잎이 넓어지며 봉오리가 벌어지는 실제적인 세포증식을 위해서는 어둠, 곧 밤의 정적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인생도 어둠이 필요합니다. 밤이 필요합니다. 정적이 필요합니다.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잊지 말고 꼭 기억해야 할 말씀은 떠나지 말라는 말씀과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모두 인내를 요구합니다. 때로는 고난이기도 하며 희생이기도 합니다.
눈에 보이는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는 않지만 장치 이루게 될 희망을 선택하는 것이며 생명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지혜로운 행위입니다. 반드시 그 결과는 생명이며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떠나지 마십시오. 인내하며 기다리십시오. 사명을 붙드십시오. 하나님의 손길이 임하시기까지 인내하며 기다리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이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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