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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윗이 광야에 있었다 (삼상 23:6-19, 계 12:1-6, 막 1:1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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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독교 역사에는 소위 “사막의 교부(敎父)들” 또는 “사막의 교모(敎母)들”이 있었습니다. 주후 2-5세기 어간에 일생을 사막에서 살면서 수도생활을 한 수도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면 왜 당시 교부들이나 교모들이 사람 사는 세속을 떠나서 사막으로 갔겠습니까? 거기에는 두 가지 큰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박해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음대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그들은 박해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광야로 나아가서 명상과 노동, 독서와 기도로 일생을 보냈습니다. 다른 하나는 박해가 끝났을 때 교회가 급속도로 부패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세상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순수한 신앙을 지키고, 하나님과 더 밀접하게 교제하기 위하여 사막으로 나아갔습니다.

박해를 피하여 사막으로 나간 분들을 “새로운 순교를 추구한 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박해 후에 사막으로 나간 분들은 마치 홍수처럼 밀어닥치는 세속의 유혹을 피하여 출애굽하듯 피하여 나갔던 것입니다. 유명한 헨리 나우웬은 이 사막의 교부들이야말로 악의 파괴적 힘들에 대하여 반대하는 증거자들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에 대한 증거자들로서 력시 “새로운 순교자들”이라고 했습니다.

헨리 나우웬이 쓴 대표적인 책 가운데 「마음의 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나우웬은 Arsenius라는 분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로마인으로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궁중에 살면서 왕자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계속해서 기도하기를 “주여, 저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로부터 음성이 들려왔는데 “아르세니우스야, 세상을 피해라. 그러면 너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무도 몰래 로마에서 알렉산드리아로 배를 타고 가서 사막에서 혼자 사는 생활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도 그는 같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여, 저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소서”. 이번에 다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아르세니우스야, 떠나라! 침묵을 지켜라! 그리고 항상 기도하라! 이것들이 무죄의 원천들이니라”. 여기 “떠남” “침묵” “기도”는 바로 사막의 영성을 요약한 말이다. 그리하여 “떠남”을 통하여 그리스도와만 사귀는 고독의 문제, “침묵”을 통하여 말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방법을, 그리고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마치 그리스도교가 이 세상을 떠나 은둔생활을 해야 하는 것 같이 들리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가톨릭 신학자 까를로 까레또는 「도시 속의 광야」라는 책을 통해서 “나날의 생활 속에 광야를 마련하라”고 했으며 “당신이 광야로 갈 수 없거든 당신의 생활 속에 광야를 만들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광야”가 의미하는 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참 영성이 얼마나 절실하냐 하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성희 목사는 광야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광야는 태초의 말씀이 흐르고 있습니다. 광야에는 태초의 말씀이 들립니다. 광야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크게 다가옵니다. 광야에서는 숨어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캘 수 있습니다.....(사실)광야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내가 있고, 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광야는 무한 그 자체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광야로 가야합니다. 광야를 사랑해야 합니다. 광야에서 살아 숨쉬는 것들을 발견해야 합니다”고 역설했습니다. 대단히 현실성 없는 말들 같지만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도시의 쉴 새 없는 소음과 귀청을 울리는 전화벨 소리,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만나야 하는 사람들로부터 해방되는 사막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도시가 사막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헨리 나우웬은 광야의 영성을 한마디로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그분하고만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따로 마련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2. 오늘 사무엘서의 말씀을 보면 14절에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다”고 했습니다. 15절에도 “그가 십 광야 수풀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19절에는 “다윗이 광야 남쪽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었다”고 했다. 좀 더 내려가서 24절에는 “다윗과 그 사람들이 광야 남쪽 마온 광야 아라바에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29절에는 “다윗이 거기서 올라가 엔게디(광야) 요새에 머무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생애를 보면 그는 어릴 때부터 베들레헴에서 아버지 이새의 양을 먹이던 목동이었습니다. 그러다 저 엘라 골짜기의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골리앗을 넘어뜨리고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끌므로 일약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사울왕의 주목을 받게 되고 결국은 사울왕의 정적으로 낙인이 찍혀 박해를 받게 됩니다. 그런 와중에도 하나님은 사무엘을 보내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점지하셨습니다. 아직 왕은 아니지만 그는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왕으로 내정을 받았습니다. 그 중간에 이 혹독한 광야의 시련을 겪게 됩니다. 그렇다고 할 때 하나님은 장차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들어 쓰시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할 코스로서 광야를 주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다윗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의 세월이었으나 하나님은 그 고난을 통해서 다윗을 이스라엘 최대의 왕으로 연단하고 계셨습니다. 인류역사에 영원히 빛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저 시편의 대부분은 적어도 다윗의 광야 고난을 통한 영성에서 나온 주옥같은 말씀들입니다. 다윗의 광야 고난은 마침내 그리스도 고난의 모형이 되었으며 이런 점에서 다윗은 메시야적 왕이요 예언자였습니다.

(1)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광야라고 하면 무엇보다 먼저 모세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들게 됩니다.

a.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음의 고난을 겪을 때 홀로 왕궁에서 온갖 부귀와 영광을 누리며 학문과 무예를 익히며 성장했습니다. 그 나이 40이 되었을 때, 평소 어머니에게서 들었던 자기 민족을 구원할 생각을 했습니다. 그의 학문이나 무예, 그리고 그의 위치로 볼 때 적어도 한번쯤 시도해봄직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애굽왕 바로가 그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기 때문에 그는 도망을 쳤습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미디안 광야였습니다. 그는 거기서 40년을 지나면서 모든 인간적인 희망이 끝나는 가 싶은 시점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바로 거기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명을 주시고 애굽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모세를 보십시오. 인간적으로 볼 때는 모든 좋은 여건을 다 구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가지 결정적으로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광야의 영성입니다. 모세도 역시 광야의 영성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b. 이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애굽에서 구원해 낸 그 선민 이스라엘을 곧바로 가나안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애굽에서 나오기는 했으나 아직도 우상 숭배하는 애굽의 문화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40년간을 광야 생활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은 존재하기 위한 모든 것, 먹는 것, 마시는 것, 적과 더불어 싸우는 것, 그리고 진을 치고 진을 걷어 행진하는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들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을 따라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광야 영성입니다. 40년에 걸쳐 애굽의 우상문화에 젖어 있던 옛 사람이 죽고 하나님과 그 말씀으로 거듭난 새사람들이 약속의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 광야가 있습니까?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바로 그 광야에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은 어떠하셨습니까?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 충만한 후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맨 처음 한 일이 무엇입니까? 막1:12-13에 보면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40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한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돌들을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목적 달성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쓰임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인기전술을 쓰라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역시 내 욕구 충족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세 번째는 마귀가 “내게 엎드려 절하면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주리라”고 했습니다. 타협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귀와 타협하면서 끼지 세상 영광을 추구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사탄아 물러가라”고 일갈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분의 뜻만을 절대로 따르는 이것이 예수님의 광야 영성입니다.

우리가 겉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얼마나 자기 위주이며 이기적이며 세속적인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의 영성을 통하여 오늘 우리의 이런 거짓된 신앙행태를 폭로하십니다. 올바른 신앙을 위하여 우리는 홀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오늘도 내 영혼에 세미한 음성으로 속삭이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저 게쎄마네 기도처럼 마침내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결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광야 영성의 결론입니다. 

(3) 다윗의 광야 생활 내용은 너무도 절박했습니다. 그는 이유 없이 사울 왕으로부터 미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한 사람의 인간이기를 거부당해야 했으며 마치 사냥꾼에게 쫓기는 짐승과 같은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다윗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중의 하나입니다. 그 중에 하나는 하나님이 자기를 버렸다고 판단하고, 하나님 믿고 의지하기를 포기하는 일입니다. 이제까지 하나님의 숱한 약속은 다 물거품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은 오히려 바보스런 짓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박해 시대 때 많은 배교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살기 위해서 당국자들이 시키는 대로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욕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어려운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호리라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길이 있는데 그것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입니다. 다윗은 이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광야를 통하여 익힌 영성입니다.

다윗이 광야에서 지은 시를 보십시오. 시56:11“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그 앞에 9절을 보면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 그리고 이 고난의 시절에 다윗이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시57:7-8에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은 결코 광야가 좋아서 찾아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살기 위해 도망간 곳이 광야였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하나님을 찾았을 때 그 광야에서 다윗은 금보다 귀하게 연단되었고 나중에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 되었고 우리 주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에 광야 같은 현실이 있다면 거기서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반드시 놀라운 은혜와 복으로 여러분에게 이루어 주실 줄 믿습니다. (김오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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