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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숙과 세상의 영적 함수관계 (요일 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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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남미 우루과이 한 작은 성당벽에 적혀있는 글입니다.
제목은 - 다시 생각하는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하지 마라.
세상일에만 빠져 나 혼자만 생각하며 하나님의 아들, 딸로 살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지 마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 나라이 임하옵시며" 라고 하지 마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더 원하면서...
"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고 하지 마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하지 마라.
죽을 때까지 먹을 양식을 쌓아두려 하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 라고 하지 마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미움과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라고 하지 마라.
욕심에 이끌려 죄 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고 하지 마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하면서...
"아멘"이라고 하지 마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왜? 주님께서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어겠습니까?
주기도문대로 살아라! 고 가르쳐 준 것입니다.
주기도문대로 사는 것이 성도의 진정한 삶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입술에는 주기도문이 있는데
삶에는 주기도문이 없다는데 있습니다.
오늘도 사탄은 우리가 주님 가르쳐주신 기도는 하되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우리를 미혹하거나 방해하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사탄의 유혹과 방해를 받지 않는 영적인 눈이 뜨여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기를 원하는 삶,
진정한 웰빙의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어떻게 하던지 신자들이 구원받은 자로써의 <2>
생명력이 넘치는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하도록 방해 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탄의 방해를 받지 아니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신앙의 성숙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신앙의 성숙에 눈이 뜨여지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여 사탄의 궤계를 물리치려면
먼저 신앙의 성숙의 출발점이 어디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성숙의 출발점이 어디입니까?
1. 우리의 신앙의 성숙의 출발점이 어디입니까?(12절)
육상경기에 있어서 경기자가 가장 먼저 유의해야 할 것은 출발선입니다.
아무리 잘 달린다 해도, 잘 달렸다 해도
출발선을 지키지 아니하면 실격처리 되고 맙니다.
신앙의 성숙의 출발선이 어디입니까?
12절 [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
요한은 본문에서 우선 신앙의 출발점에 대해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영적인 나이는 즉 영적인 성숙은
교회를 오래 다니고 성경을 많이 읽었다고 먹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자라가려고 하면 먼저 거듭남이 있어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았다고 믿는 그 순간부터
여러분은 거듭난 것입니다.
그럴 때 ‘ 내가 구원 받았구나,
죄에서 해방받았구나’ 라며 영적인 나이를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사람은 교회 나오자마자
예수를 영접하고 죄사함의 감격이 있어 신앙이 자라는 교인이 있고, 교회를 수십 년 다녀도 거듭난 확신이 없어서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교인이 있습니다.
항상 이 가슴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 받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빨간불이 켜져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왜? 제가 빨간불이 켜져있는 성도라고 말 하는가 하면
미국 펜실베니아주의 산중턱에 비행기가 추락하여
여섯 명의 희생자를 내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사고현장 가까이에는 교회가 있음을 알리는
68피트 높이의 철탑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AP통신이 전한 사고의 원인은 그 철제십자가에는 늘 불이 켜져 있었는데 그날따라 그 십자가의 전등불이 꺼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지역을 운항하는 항공기들은 <3>
십자가 탑이 밝혀주는 불빛을 보고 그곳을 지나곤 했는데
그날은 불이 꺼져 있던 탓으로 방향감각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불 꺼진 십자가가 비극의 원인을 제공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치 불꺼지 십자가처럼
우리의 가슴에 십자가의 흘리신 피가 바래고 장식용으로 전략한다면
그 십자가 때문에 존재하는 교회와 성도는 설자리를 잃고 말게 되고
아무리 교회가 있고, 성도가 있다 할지라도
이 세상에는 삶의 문제가 끊어질 날이 없을 것입니다.
내일의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
우리의 신앙의 출발선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 받았다는
속죄함의 기쁨에서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신앙의 성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다가 왠지 모르게 영적침제기에 접어들 때
다시 주님의 십자가 앞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피가 맘속에 큰 증거가 되어 내 기도 소리 들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죄사함 받고 거듭났다고 해서
그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영적으로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으면
엡4:14절 말씀같이 사람의 궤술과 마귀의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세상 교훈의 풍조에 밀려 떠내려간다고 합니다.
즉 예수를 믿어도 세상 스타일에서 못 벗어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이 성숙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 사도 요한은 신앙의 성숙을 세 단계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2. 사도요한은 신앙의 성숙을 위하여 세 부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13-14절)
13절 [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
그리고 14절에 아이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 하고 또 언급합니다.
사도 요한은 신앙의 성숙도에 따라서 성도를 세 부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첫째들, 자녀들아, 또는 아이들아 합니다.
자녀들아, 아이들아 하는 것은 의미상 별 차이가 없습니다만
자녀들아 하는 것은 부모와 유아의 관계성을 말하면서
부모에게 의존하는 것을 강조한다면
아이들아 하는 말은 헬라어로 ‘피아디아’라고 하는데,
이 말은 단순히 나이가 어리다는 말이 아니라 경험이 부족한 사람을 말합니다.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 영적으로 아이입니다. <4>
[ 예수 믿고 죄사함 받았다.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다
야~! 나도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구나 ] 여기에 머물러 있는 교인
즉 신앙적 초보를 어린 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물론 우리의 신앙의 출발선,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아이 수준을 벗어나야 합니다.

2. 두 번째로 ‘아비들아’라고 말합니다.
[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
여기에 안다는 것은 지식적으로 아는 차원을 넘어
다양한 영적인 체험을 통해서 신앙이 성숙되어 있는 사람,
어떤 상황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 단계가 아비신앙입니다.
주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통해서 기쁨을 누리는 성도를
여기서 아비들아 라고 표현합니다.
특히 아비라는 표현은
신앙이 성숙하여 남을 돌보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같은 문제라도 아비의 신앙이 되면
되려 그 문제 때문에 삶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 나갑니다.
신앙이 아이의 수준에서 아비 수준으로 성숙해가면
살아가는 삶의 자세도 다르고,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는 차원도 다릅니다.
그러니 신앙의 아비가 되시기 바랍니다.

가을 단풍잎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녹색을 벗고 노랗고 빨갛게 변하는 자연현상.
자연이 이렇게 변하는데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단풍이 진다’라고 하는 것은 나무들이 겨울을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일조량이 적어지면서 기온이 낮아지고 겨울이 다가오니
봄, 여름에 강렬히 활동하던 엽록소 활동이 중단되어지고
반면에 나뭇잎 속에 남아 있는 카로틴이란 색소가 많으면 붉은색,
크산토필이 많아지면 노란색으로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놀라운 사실은 낙엽이 떨어지잖아요.
나무들이 가지 끝까지 물을 안 보내요. 얼어 죽을까봐.
겨울을 준비하는 방법이 얼마나 세밀한지 모릅니다.나뭇잎이 얼어서 죽는 모습이 아니라
아름다운 색깔을 내면서 내년을 기약하며 그들은 겨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온 산천을 붉게, 노랗게 물감을 들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제가 왜 이 말을 하는가 하면 <5>
어린아이 신앙은 삶의 문제가 닥치면 한숨만 쉬다가 얼어 죽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신앙생활 바로 할 수 없는 교인
어린아이 수준의 신앙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신앙이 성숙해서 아비의 신앙이 되면
인생의 겨울을 당해도 이겨낼 수 있는 지혜가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위로를 하며
다른 사람을 보살피는 성숙한 신앙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이의 수준에서 아비의 수준으로 신앙이 Up 되시기 바랍니다.
아이의 신앙에 머물다가
구원받아 놓고도 엄청난 축복 다 놓치고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는 한 분도 없길 바랍니다.

3. 청년들아 라고 합니다.
[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
청년들이 악한 자를 이기었다고 표현했는데,
여기서 악한 자는 사단을 말합니다.
청년의 특징은 열정과 힘입니다.
요한은 14절에 이런 청년의 힘은 단순한 육신의 정열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바탕 된 영적인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에 지배를 받으면서 그것을 삶 속에 사실적으로 적용해
영적싸움에 승리하는 자들이 바로 영적 청년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 나가면 영적 싸움이 많습니다.
거기서 승리하는 사람이 청년입니다.
말씀을 통해 능력 받아 악한 자들과 싸워 이기는
신앙의 청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신앙에는 연령제한이 없습니다.
싸워서 이기는 청년 같은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이기다 란 말 - <니카오> 라고 하는데
고대 헬라사람들은 아들을 낳으면 니콜라스 라고 많이 지었습니다.
이 말은 바로 니카오에서 나온 말인데 승리자란 말입니다.
스포츠 용품 메이커 가운데 - 나이키가 있지요. 같은 말입니다.
이 나이키 유니폼 입고, 신발 신고 가서 이기고 돌아오라는 뜻입니다.
복음의 신발 신고 나가서 신앙의 니콜라스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물론 사탄의 세력과 싸워 이겼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 다 보상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영적인 니콜라스에게는 세상의 어떤 보상보다 더 큰 보상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쓴 계시록에 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가운데 <6>
결론이 무엇인가 하면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겠다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감추었던 만나와 새 이름이 기록된 새돌을 주겠다
만국을 다스리는 철장 권세를 주겠다
그 이름이 생명록 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리라
내 하나님 성전 기둥이 되게 하리라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겠다.
그러니 신앙의 청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왜 신앙의 성숙을 분류하면서
같은 말을 두 번이나 분류하여 강조하고 있습니까?
3. 요한이 신자들의 성숙의 부류를 두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왜 반복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녀에게 -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과
아비에게 - 태초부터 계신 이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아는 것
청년들에게- 사탄과 싸워 이기는 삶 - 한 마디로 복음이지요.
복음은 아무리 계속해서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생활 어느 부분일지라도
복음을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정치 경제 사회 나아가 예술 분야라 할지라도
이 세상의 모든 것과 나아가 우주 만물이 다
복음을 중심하고 복음에 들러리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 여러분들 가운데서는 복음이
나의 삶에 옵션 정도로 여기실지 모르지만
그러나 복음은 나의 삶의 중심이요 핵심이요 근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 사도 요한이 지면상 두 번 말했지
거듭 거듭 강조하는 말이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렇게 신앙의 성숙에 대해 거듭 반복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의 신앙에 복음이 체질화 되어서
다시 말하면 생활 자체가 완전 복음인 사람이 되어
신앙의 성숙한 아비가 되고 청년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신앙의 성숙을 위해 복음을 강조하면서
쓰는 것은, 쓴 것은 그리고 앎이라, 알았음이라
이렇게 과거완료형, 또는 현재형을 쓰고 있는 것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복음이 체질화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말입니다.
지금 아드보카드의 고민이 무엇입니까? <7>
누구를 포지선에 맞는 선수로 기용하느냐?
그러면서 한 가지 기준은 현제도 골을 넣는 선수 라고 합니다.
과거에 은혜 받은 사람이 아니라
지금도 복음이 체질화가 되어 가고 있고
복음으로 강해져서 승리하는 신앙인
하나님은 그를 기용하여 사용할 줄 믿습니다.

그런데 사요 요한이 신앙의 성숙을 말하면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4. 사도 요한은 우리의 신앙의 성숙에
가장 방해되는 것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15절)
15절 [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
왜 세상이아 세상의 것을 사랑치 말라고 합니까?
사람은 무엇을 사랑하게 되면 가까이 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세상 가까이 가서 세속적인 사람이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 가까이 가게 되니
경건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성숙한 사람이란 분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아이와 어른의 차이는 바로 분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른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을 철없다고 합니다.
신앙의 철이 들수록
세상을 사랑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사랑하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듣고 우리의 생활에 방향을 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그리스도인은 육신으로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현실 세계를 전면 부정하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현실 도피주의 자들이 아닙니다.
도리어 너희는 세상에 소금과 빛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직장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생계를 위해 장사도 하고 열심히 일도 해야 합니다.
소위 세상에서 말하는 웰빙의 삶, 즉 문화생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의욕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극심한 생존 경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분명 세상에 있는 것들이며 우리는 이것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많이 누리고 싶어 하고 이런 것들로 즐거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런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8>
그렇지 않다면 '세상을 사랑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입니까?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생활에 하나님이 없이 세상 위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는 눅12장에서 어리석은 부자를 봅니다.
그는 열심히 일한 결과 많은 소출을 걷어 드렸습니다.
이 일은 본받을 일이요 칭찬들을 일입니다.
그러나 그의 심중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나 자신을 위해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길 계획만을 세운 것입니다.
자기 인생계획 속에 하나님의 계획이 없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은 전혀 없습니다.
인생의 삶의 목적을 망각한 체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식의 삶을 살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합니다.여기 나오는 사랑하지 말라고 한 말을 보면
<아카페하지 말라>는 말로 나옵니다.
아카페는 절대적인 사랑을 의미하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을 나타날 때 사용됩니다.
독생자까지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이 그런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 역시 이런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경계한 것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릴 사랑을 세상에 쏟으면
'아버지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있을 것이냐'고 한 것입니다.

왜? 사도 요한이 세상이나 세상의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합니까?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 말은 세상과 하나님과 더불어 사랑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것을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성숙과 세상과 영적 함수관계라 그렇게 제목을 부쳤습니다.
우리가 세상이나 세상의 것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가운데 점점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교인들도 뭔가 착각하고 있습니다.
성숙과 세상과의 함수관계가 정비례인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성숙과 세상과의 함수관계는 바로 반비례입니다.
세상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없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 즉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면 어떻게 됩니까? <9>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사실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지나온 세월들 한 번 돌이켜 보세요.
하나님의 은혜가 베여있지 않는 나의 삶의 부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것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왜 이 세상의 것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까?
5. 그렇다면 신앙의 성숙과 세상과는
어떠한 영적 함수관계를 갖고 있습니까?(16-17절)
16절에 [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니라 ] 여기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전략 세 가지가 16절에 나옵니다.
육신의 정욕은 육체의 욕심을 말합니다,
안목의 정욕은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한 욕심,
이생의 자랑은 자존심입니다.
이 세 가지는 사단의 최고 공격 무기입니다.
창세가 3장의 아담과 하와를 처참하게 실패시킨 방법,
선악과를 보고 보암직스럽고 - 안목의 정욕
먹음직스럽고 - 육신의 정욕
탐스러운 - 이생의 자랑입니다.
바로 사탄의 계략에 하와가 넘어가고 아담이 넘어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인간의 부패성을 가진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사는 동안
이러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의 유혹을
물리친다는 것 그리 쉬운일이 아닙니다.
아니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14절에 [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 고 한 것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강해질 때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nbsp;&nbsp;
마4장에 보면 40일 금식하시고 성령충만하신 예수님에게
사단이 찾아와서 유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단이 예수님에게
‘ 배고프지 네가 능력이 있으니 이 돌을 떡이 되게 하라 ’
육신의 정욕입니다.
‘ 높은 산에 올라가서 온 천하 만물을 보여주면서
나한테 한번만 경배하라 내가 네게 다 주겠다 ’
안목의 정욕입니다.
‘성전 꼭대기에 세워놓고 뛰어내리면 <10>
네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온 천하가 알 것이다’
이것은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렇게 사단은 세 가지를 가지고 유혹을 합니다.
이 세 가지가 사람을 완전히 망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 하시며
말씀으로 물려 쳤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거하여
마귀적인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본래 이 세상 그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탄이 공중권세를 잡고 세상을 조종하고 있기 때문에
빌2;16절에는 [ 어거러지고 거스리는 세상 ] 이라고 말합니다.
그저께 정몽구 회장이 구속되었지요.
그런데 정치인이든 경제인이든 구속되는 사람들 공통점이 있는데
자신은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정치나 권력의 희생양이라는 거지요
그 말도 맞습니다.
왜냐하면 비뚤어진 세상에 맞추어 사니 비뚤게 사는 것이 바른 것인 줄 알았지요.
그러나 성도는 어거러지고 거스리는 세대에
달음박질 하여 생명의 말씀을 밝혀 빛들로 나타내라 고합니다.
그러니 우리 성도들 청년신앙이 되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통하여 들어오는
사탄의 궤계를 물리치고
어두운 세상을 비취는 빛들로 나타나시기 바랍니다.
로마의 시인 <테르툴리아누스>의 글에
[ 햇빛은 하수구까지 고르게 비추되 햇빛 자신은 더러워지지 않는다. ] 훌륭한 사람은 진흙 속의 진주 같아서
진흙과 함께 있을지라도 주위 환경에 오염되지 않습니다.
요즈음 비뚤어진 세상에 익숙해져
진실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짝퉁은 진품보다 더욱 화려합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짝퉁과 명품은 확연히 구분됩니다.
하나님의 명품 신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도 요한이 우리의 신앙의 성숙과 세상의 함수관계의 정답을 알려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합니다.
17절 [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
이 세상에 목숨을 걸고 살면 - 허무한 삶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목숨을 건다면 - 흐뭇한 삶이 있는 줄 믿습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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