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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손 내밀어 주를 만져라 (막 5: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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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건강하게 삽시다

  사람들이 제일 큰 관심사 중 하나가 건강입니다. 그러면서도 제일 지키기 어려운 것이 또한 건강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우선 하나님과의 관계가 건강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바르고 건강한 관계를 “의”라고 합니다. 둘째는 자기 자신을 잘 지켜야 합니다. 생각을 거룩하고 복되게, 긍정적으로 해야 하고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이것을 “경건이라고 합니다. 셋째는 자신의 비전과 사명을 잘 지켜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자신의 직분과 비전을 잘 지키는 것이 곧 주님의 몸된 교회를 지키는 것입니다. 넷째는 가정을 천국으로 잘 가꾸어야 하고 다섯째는 자신의 받은 시간과 물질 그리고 삶의 환경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끔 잘 지켜야 합니다. 여섯째는 하나님이 주신 관계 즉 사람을 잘 지켜야 합니다. 나의 영적 스승, 영적 지도자 리더 그리고 나의 동료와 태신자 VIP까지 잘 섬기고 지켜야 합니다. 끝으로 내 몸도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함부로 굴리면 안됩니다. 건강하게 잘 지켜야 합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습니다.

  오늘 본문에 건강 잃고 모든 것 잃은 한 사람이 나옵니다. 본문 26절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다” - 여기에 병든 사람의 아픔이 있습니다. 질병엔 단순히 육체적 아픔만 있는 게 아닙니다.

- 병은 고통자체입니다.
- 병은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 병은 우리의 직장, 우리의 사역을 빼앗아 갑니다.
- 행복한 가정 생활을 파괴합니다.
- 때로 관계를 파괴합니다.
- 많은 재정을 앗아 가기도 합니다.
- 심지어 마음을 낙심케 하고 영적 생활, 예배를 빼앗아 가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최근 미국에서는 정계 거물들이 “건강 전도사”로 나서고 있습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2004년 9월 심장수술을 받은 이후 건강을 위해 식사량을 줄이는 운동을 펼치고 있고 지금 우리 시대 가장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콘돌리자 라이스 美 국무장관은 꾸준한 운동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미국 국민들이 적당히 식사량을 조절하고 꾸준히 운동을 한다면 국민 보건비용을 연간 7000억 달러 절약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7000억 달러면 우리 돈으로 약 7000조 정도 됩니까? 건강은 바로 국가 경제, 국력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달력 나이보다 젊게 살기” 운동을 펼치는 미국 뉴욕 주립대 마이클 로이진 의대 학장은 최근 “생체 나이 고치기(The Real Age Makeover)”라는 책에서 건강하게 젊게 사는 비법 78가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중 중요한 몇 가지만 소개해 봅니다.

- 많이 웃고 살면 8년을 더 젊게 살 수 있답니다.
- 늘 감사하고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면 6년을 더 젊게 살 수 있습니다.
- 스트레스를 받지 말고 받아도 빨리 풀어라.
- 매일 친구와 행복한 전화를 주고 받아라.
- 몸에 유익한 식품을 즐겁게 먹어라.
- 적정 체중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라.
- 아침밥 거르지 말아라.
- 매일 비타민을 챙겨라.
- 하루 5회 과일을 즐겨라.
- 담배 피지 말아라. 하루 한 갑 피우면 8년 빨리 죽는다.
- 생선을 튀기지 말고 먹어라.
- 가정생활, 부부생활이 행복해야 된다.
- 심한 정신적 충격을 끌어안고 살지 말아라.
- 이를 자주 닦고 손을 자주 씻어라.
- 커피는 설탕을 빼고 먹어라.
- 하루 7시간 숙면을 취해라.
- 가장 중요한 건 꾸준한 운동이다.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건강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젊고 건강할 때 잘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명과 비전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입니다.



II. 아픔을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는 자

  마가복음 5:21-43 말씀에는 두 치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사건이요, 다른 하나는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치료된 사건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두 번째 치유사건, 즉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낫게 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묘하게도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사건의 중간에 끼어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자기 딸이 거의 죽게 되자 예수님을 찾아가 고쳐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야이로의 집으로 향해서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 도중에 벌어진 사건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내용입니다.

  이 여인의 형편을 성경은 그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혈루증이라는 것은 여성이 심하게 하혈하는 병입니다. 하혈을 하다 보면 심한 악성 빈혈로 고통받게 됩니다. 악성빈혈은 노쇠현상을 가져옵니다. 얼굴은 창백해지고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고 머리털과 손톱이 빠지는 증세까지 나타납니다. 이 여자가 당한 것은 육체적인 고통뿐이 아니었습니다. 종교적으로 격리되는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혈루증 환자는 부정하게 여겨졌습니다. 혈루증에 걸린 사람은 다른 사람과 만날 수도 없었고 접촉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 여인은 치료를 위해 여러 의원들에게 몸을 보이고 치료를 받아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병을 치료받지 못했고 많은 고생 가운데 재산까지 탕진한 상태였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레위기 15장에 보면 종교적으로도 철저히 소외당한 질병이었습니다.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병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위생여건이 열악한 시대 아니었습니까? 옷을 자주 갈아 입을 수 있었겠습니까?  목욕을 자주 할 수 있는 상황이었겠습니까? 이천년전 팔레스타인 뿐만 아니고 저희들 어릴 때만 하더래도 목욕을 자주 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시골에 한 청년이 장가를 가게 되었습니다. 평생 처음으로 읍내 목욕탕에서 목욕을 합니다. 목욕탕에 들어가 보니 사람들이 많이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대뜸하는 얘기가 “야~ 내일 장가가는 놈들 되게 많네” 그러더랍니다.

  그뿐이겠습니까? 이쯤되면 대게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당해야 했습니다. 정신적인 고독, 소외감이 어떠했을까요? 율법마저도 종교마저도 그들을 부정하다 일컬었습니다.  공동체로부터 철저하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병들고 나면 사람이 그리운 법인데 이 여인은 사람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행여 사람이 가까이 오면 입에다 손을 대고 나는 부정하다 타메 타메를 외쳐야 했던 여인이었습니다. 오늘 이 여인의 고독 속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모습들, 현대인들의 자화상을 발견해 볼 수 있습니다.

  다른 교회 교인으로 오래 전부터 사귀게 되어 지금까지 좋은 관계가 되어 사귀는 한 가정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했습니다. 존경을 받습니다. 교회에서도 큼직한 직분을 가지고 있고 목사님과 교우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분입니다. 최근 알게된 충격적인 사실은 남편이 성병을 가지고 집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고민할 수 밖에요. 아이들은 아버지를 하늘처럼 생각합니다. 드러내놓고 한바탕 싸움을 할 수도 없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가정의 평화를 지켜나가자니 미칠지경입니다. 제게 전화해서 “목사님 아플 때 아프다고 얘기할 수 있는 게 행복인줄 알았어요. 억울할 때 억울하다고 울 수 있는 게 행복인줄 알았어요. 아파도 아프다고 얘기할 수가 없어요. 드러내놓고 한바탕 소리지를 수도 없어요. 이때는 어떡하면 좋지요.”

  존경과 체통을 유지하고 살아가지만 속이 썩어 들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나의 아픔을 친정식구에게 조차 드러낼 수 없는 아픔들, 친구에게도 의논할 수 없는 아픔들이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본문 혈루병 여인의 얘기는 오늘 현대인들의 얘기요, 나의 얘기요, 너의 이야기입니다.



III. 예수님의 소문 듣다

  이런 절박한 상황속에서 이어지는 27절 말씀 “예수의 소문을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란 분이 계신데 예수님께 가면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 그러더라. 앉은뱅이도 일어섰다. 소경들이 눈을 떴다. 나병환자도 깨끗함을 받았다. 죽은자도 살아났다. 예수의 소문 가운데 좋은 소문을 들었다고 하는 것이 벌써 복이지요. 당시에 예수의 소문이 좋은 소문만 있었던 것 아니거든요. 미쳤다고 하더라. 이단자라고 하더라. 민중들을 소요케하는 자라고 하더라. 이런 못된 소문이 들려지면 그 귀는 벌써 저주 받은 귀가 되고 마는 겁니다. 예수의 소문 좋은 소문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이 행복이었습니다.

  오늘 이 교회에 찾아나오신 분들은 한소망교회의 좋은 소문들을 듣고 나오신 분들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교회라고 좋은 소문만 있겠습니까? 아마 주일날 주차문제 때문에 피해를 입은 주민들은 한소망 말만 들어도 지긋지긋하다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을 겝니다.

  병은 더 중해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극도의 절망에 빠져 있을 바로 그때 가장 위대한 소문을 듣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슬아슬한 위기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만일 그녀에게 예수 소문이 들어가지 못했더라면 그녀는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하는 점 때문입니다. 틀림없이 그녀는 12년 앓던 혈루증으로 피를 다 쏟고 쓰러졌거나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가장 절망적이고 긴박한 순간에 예수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희망적인 소식을 들었던 것입니다.

  소문이란 퍼뜨리는 사람이 있어서 퍼지게 됩니다. 그리고 한 입 건너고 두 입 건너는 사이 소문은 굵어지고 커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이, 예수 소문을 들었던 사람들이 모조리 입을 다물고 침묵했더라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뜬소문이나 헛소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예수 소문은 겪은 사람들과 목격한 사람들이 퍼뜨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확실한 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이 있었고 그래서 그녀는 그 소문을 듣게 된 것입니다. 전하는 자와 듣는 자는 모두 다 중요합니다. 헛소문, 뜬소문에 귀 기울이지 않고 예수 소문을 들었던 그 여인의 귀는 참으로 복된 귀였습니다.

  자, 이처럼 예수님 소문을 듣고 어찌 어찌하여 예수님 앞에 찾아왔습니다 만은 예수님을 만나기까지는 여간 어려움이 많은 게 아니었습니다.

  우선 외적인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남정네들에 둘러싸여서 예수님은 길을 걸어가고 계셨습니다. 병든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 그 뭇사람들을 헤집고 들어가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은혜의 삶을 살려고 하는데 주변의 환경 때문에 마땅히 나의 신앙을 도와주어야 될 가족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때가 없지는 않았습니까?

  또 내적인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많은 환자들이 환부를 드러내 보이며 주님 앞에 치료를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 내 눈이 보이지 않습니다. 보게하여 주시옵소서. 심지어 나병환자들도 내 환부가 썩어 들어갑니다. 주님 나를 고쳐주십시오. 앉은뱅이들도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주님 앞에 요청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부끄러운 자신의 질병을 주님 앞에 얘기할 수도 없었고 더더구나 환부를 보일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보십시요. 이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27절 28절을 보십시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IV. 예수의 피묻은 옷자락 붙들다

  본문의 외로운 여인, 이제 빈손입니다. 누군가를 붙들어야 했습니다. 이제는 세상 끈 붙들은 것 두손들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의 옷자락에 손을 갖다 댔습니다. 인간은 누군가를 붙들어야 살 수 있습니다. 사랑의 손을 붙들기 위해서 얼마나 인생이 허우적거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까? 어디 나를 행복하게 해줄 손이 없을까? 누구의 손을 붙들면 그 손이 힘있는 손이 될까? 어디에 줄을 대 볼까? 어디에 권력의 손이 없을까? 나를 행복하게 해줄 손이 없을까? 다행히 복된 손을 붙들면 다행이지만 붙들지 말아야 될 손을 붙들었다가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고 받았습니까?

  이 여인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재산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가난한 몸이 되었습니다. 친구들도 한사람 두사람 다 떠났습니다. 아무도 그를 도와줄 수가 없었습니다. 뒤늦게 나마 예수님의 손을 붙들 수 있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피묻은 옷자락을 붙들 수 있었지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손을 잡았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잡지 못한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손을 붙들고 이곳에 나온 것, 피묻은 주님의 옷자락을 붙들 수 있다고 하는게 얼마나 복된 일인지 아십니까? 여러분 세상사람들은 화려한 옷 붙들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옷은 화려하지 못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힘있는 옷을 붙들어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옷은 권력의 옷이 아니었습니다. 자색옷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손을 붙들기만 하면 거기엔 신비한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옷은 신비한 옷입니다. 붙들면 구원함을 받습니다. 붙들면 치료함을 받습니다. 붙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덧입게 되는 것입니다. 붙들면 하늘 문이 열려지는 놀라운 신비한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V. 교회는 주님의 옷자락

  교회는 주님의 옷자락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옷은 몸을 감싸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곳에 와서 다른 것 발견하면 안됩니다. 주님의 옷자락을 발견하셔야 합니다. 이곳에 와서조차 다른 것 붙들고 돌아가려고 하면 안됩니다. 주님의 옷을 붙들고 돌아가셔야 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손, 모태에서 여러분을 빚어만들던 사랑의 손, 능력의 손, 역사를 운행하는 그 손을 붙들고 세상으로 다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곳에 올 때마다 주님의 옷자락을 덧입고 주님의 피묻은 옷을 사 가지고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 여인에게 한번 제가 그런 요구를 해 보고 싶어요. 얼마나 어렵사리 군중들을 헤집고 주님 앞에 섰습니까? 이왕 이곳까지 오셨으면 주님의 팔을 붙들고 늘어지지 그랬수. 그러지 못한다고 하면 주님께서 발걸음을 재촉하여 길을 걸어가신다고 하면 주님의 다리를 부둥켜 잡고 애원해 보지 그랬수. 이곳까지 달려나온 김에 주님의 품에 안겨서 날 좀 살려주시오. 주님 앞에 애원해 보지 그랬수. 이 여인이 오늘 본문을 통하여 제게 그렇게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주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을 줄로 믿었습니다. 주님의 옷자락 그림자만 스쳐도 나을 줄로 믿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주님, 이 여인을 버렸습니까? 주님의 발걸음이 멈추어 섰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빛나는 눈동자는 부지런히 이 여인을 찾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고 살기를 원하는 이 여인의 가슴을 향하여 주님께서는 찾고 계셨습니다.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

  예수님은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병 고침을 받은 본인을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응급 환자가 있어서 아주 급한 상황인데도, 이미 치료받은 사람을 찾으신 이유를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누군가 예수님을 만짐으로 병이 나았다면 그것은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붙잡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그 여자가 믿음으로 육체의 병은 나았지만 정신적인 병은 아직 낫지 않은 것을 아시고 그의 병든 마음을 치료하시기 위해 그를 만나려고 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무려 십이 년 동안이나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이렇게 격리된 생활은 혈루병이 나았다고 해서 한 순간에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인의 마음의 병은 사람들 앞에 노출되어야 치료될 수 있습니다. 이제 보십시요. 예수님은 그에게 대제사장의 선언을 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이제 여인은 병만 나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모든 죄가 사해졌으며 이제 어느 누구도 그녀를 정죄할 수 없는 의로운 신분임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를 몰랐던 제자들은 뭐라고 대답합니까? 누가 복음에 의하면 그렇게 대답하던 제자가 베드로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사람이 밀고 밀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스쳐지나가다가 예수님의 옷을 만졌겠지요. 그런데 누구를 찾는단 말입니까? 예수님의 발등을 밟는 사람이 있었을 겝니다. 주님 앞에서 부딪히는 사람이 있었을 겝니다. 뒤에서 밀리는 사람이 있었을 겝니다. 옆에서 부딪히는 사람이 있었을 겝니다. 그러나 저들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VI. 의미없는 부딪힘

  의미없는 부딪힘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제자들마저도 옹위하여 길을 가고 있었지만 저들에게는 아무런 경험도 아무런 변화도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혈류 근원이 말랐습니다.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 이 여인이 오늘 본문에 보면 “나와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같은 사건을 누가복음에 보면 “손댄 연고와 낫게된 경위를 모든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사람들이 자기 앞을 지나가기라도 하면 언제나 타메 타메 타메라는 말 밖에 외칠 줄 모르던 여인이었습니다. 이제 주님 앞에 서서 주님의 옷자락에 감동된 이 여인, 주님의 옷에 접촉된 이 여인, 주님의 사랑에 접촉된 이 여인, 이제는 타메 나는 불결하다를 외치는 것 아니고 나는 깨끗해 졌다 나는 나았다.  지금 외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세상에 절망을 안고 살아가시는 분 계십니까? 주님의 사랑에 접촉되는 순간 내게 희망이 있다고 외치게 될 것입니다. 길이 보이지 않아서 울던 분 계십니까? 주님의 사랑에 접촉되는 순간 길을 발견하게 됐다고 외치게 될 것입니다. 죽게 생겼던 분 계십니까? 이제 살게 생겼다고 외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세상의 노래만 부르던 분 계십니까? 주님의 사랑에 접촉되는 순간 하늘의 노래를 외치게 될 것입니다.

  주님 앞에 그렇게 한번 요구를 해 보고 싶어요. 이 여인이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순간, 주님의 능력이 나간 걸 주님이 알고 계셨어요. 그리고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순간, 이 여인의 혈루 근원이 마른다는 사실을 여인이 직감적으로 알 수가 있었어요.  그 정도되면 부끄러운 병을 앓던 여인이기 때문에 그냥 주님께서 모른척 하고 지나가면 좋지 않겠습니까? 정히 주님께서 확인시켜 주시기를 원하셨다면 사람들 앞에서 이 여인의 체면 좀 생각해서 윙크라도 한번 슬쩍하고 지나갔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기어이 이 여인을 찾아냅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댔느냐?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찾으시는 이유는 우리에게 수치와 창피를 안겨주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불안이 내가 안고 있는 공포가 의심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확인시켜 주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내게 믿음을 주시기 위하여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행복을 주시기 위하여 그리고 사람들 앞에 성하게 될 때에 진정한 구원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기 위하여 오늘 주님은 우리를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보게 이 여인이 병이 나아서 돌아갔다고 하자, 내가 모른 척 했고 이 여인이 깨끗이 나았어. 그렇다고 하면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더란 말인가? 나는 이 여인이 진정한 구원이 무엇인지, 혈루 근원이 마른 것뿐만 아니고 죄의 근원이 말라서 그가 구원 받은 하나님의 딸이 되기를 나는 원했다네. 이 땅에서 건강한 여인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기를 원했다네. 할렐루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10:32-33)

  누가 내 옷에 손을 댔느냐? 주님 이 시간에 찾고 있습니다. 의미없는 대답을 주님 앞에 내어 놓으시겠습니까? 아무런 경험도 역사도 체험하지 못했던 못난 제자들의 대답을 이 시간에 하시겠습니까? 주님 60억 가운데 20억의 사람들이 지금 오늘 예배시간에 밀려왔다 밀려가고 있습니다. 이 땅에 천만성도들이 밀려왔다 밀려가고 있습니다. 한결같이 경건하게 예배드리고 돌아가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꼭 주님의 손을 붙들고 가야 되는 것입니까? 이천년 전에 흘렸던 주님의 보혈을 내가 만져야 되는 것입니까? 내 죄를 주님 앞에 고백하고 그것이 치유되었다고 일일이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까?



VII. 접촉불량입니까?

  고양시에만 하더라도 900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들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밀려왔다 밀려가고 있습니까? 예배하고 찬송하고 저마다 봉사하고 그거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요. 의미없는 성도들 말고 변화받지 못한 성도들 말고 의식적으로 예배드리는 사람들 말고 구경삼아 이곳에 온 사람들 말고 어릴 때부터 다녔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관습적으로 예배드리는 사람 말고 군중심리나 인간관계 때문에 오늘 주님 앞에 찾아 나온 사람 말고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 누가 주님 품에 안겼느냐. 누가 피묻은 주님의 손을 붙들었느냐. 주님 이 시간에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언젠가 자동차를 몰고 가는데 신호등 앞에 잠깐 서 있는 사이에 시동이 꺼져요. 그래서 어찌 어찌하여 시동을 켜는데 엔진점검 불이 깜박깜박 들어옵니다. 그래서 집사님 카센타에 맡겼더니 엔진으로 연결하는 선들이 여러 개가 있는데 그 가운데 접촉불량으로 그렇구. 더더구나 거기에 먼지가 끼어있기 때문에 엔진이 힘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접촉 불량 신자들 없습니까? 하나님과 나 사이에 기도하는 그 사이에 먼지가 낀 사람이 없습니까? 찬송하는데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지 못하고 먼지가 끼어 있는 사람 없습니까? 주님 앞에 나와 예배하는 이 시간에 맑고 깨끗하고 순결하게 접촉하여 주님을 붙들고 돌아가지 못하는 접촉 불량품 없냐 이겁니다.

  주님 지금 이 시간에 외롭게 찾고 계십니다. 누가 네 손을 대었느냐. 바로 여러분 한분 한분이 바로 이 질문에 대답하시기를 바랍니다.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제가 만졌습니다. 영혼의 병이 너무 중하여 내가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제가 만졌습니다.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지만 누구에게도 내어놓을 수가 없어서 주님만이 치료자가 되시고 주님만이 위로자가 되시는 줄을 알아 제가 만졌습니다. 주님 인생의 짐이 너무 무거워서 내 삶의 짐이 너무 무거워서 누구도 이것을 해결할 수 없어서 제가 만졌습니다. 갈길이 보이지 않아 제가 만졌습니다. 자유하기 위해서 제가 만졌습니다. 살아야 하겠기에 제가 만졌습니다. 주님 손 놓고 살아가는 삶이 외로워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제 다시는 놓지 않겠습니다. 제가 만졌습니다.

  옷자락만 만져도 나음을 얻었습니다. 주님 품에 안기시기를 바랍니다. 몸만 나오지 마시고 마음이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온전히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주님 품에 온전히 안기는 감동되어지는 접촉되어지는 이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다” 할렐루야.

  자리에 모두 다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오른 손을 다 드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이 손을 만져 주시옵소서. 이 손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이 손 손바닥 끝에다가 여러분의 아픔을 다 실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몸이 병들어 나오신 분 계십니까? 주님께서 만져주실 줄로 믿습니다. 마음의 고통을 안고 나오신 분 계십니까? 환경의 삶에 무거운 짐을 지고 나오신 분 계십니까? 누구에게도 내어놓을 수 없는 영혼의 고통을 안고 나오신 분 계십니까? 이 손으로 주님의 옷을, 피묻은 손을 주님의 보혈은 능력이 있습니다. 이 손으로 여러분 그 주님의 피 묻은 옷 자락을 움켜 쥐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손 내밀어 주를 만져라

♪ 손 내밀어 주를 만져라 주 지나신다
  너의 애타는 외침을 주 들으시니
  주님 너의 모든 것을 채워주시니
  손 내밀어 주를 만져라 주 지나신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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