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사 46:5)

  • 잡초 잡초
  • 441
  • 0

첨부 1


사람은 유신론자든, 무신론자든 간에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다 하나님께 대한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땅에 무신론자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인간은 이 땅에서 겨우 칠, 팔십년을 살뿐이지만 영원을 동경합니다.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고 말씀합니다. 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곧 하나님을 동경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을 뿐 아니라, 천지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심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 1:19-20)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방법으로 자기를 인간들에게 알게 하셨습니다. 그 하나는 우주만물을 통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경에 의한 것입니다. 타락하기 이전에 아담은 친히 하나님을 만나 뵙고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마귀의 화신인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 명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타락했습니다.

이 때 아담은 인류의 대표의 자격으로 범죄한 것입니다. 아담의 죄책이 아담과 같은 죄를 범하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 짐 지워진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죄로 인해 그 마음이 어두워졌으므로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올바로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대신, 해와 달과 별들, 바위, 초목, 짐승, 사람과 같은 피조물을 신으로 섬기는 우상 숭배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만들어낸 신들은 하나님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에 떨어진 어리석은 인생들을 향하여 “너희가 나를 누구에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에 빠진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당신께 대한 참된 지식을 인간들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계시를 그리스어로 ‘아포칼룹시스’라고 하는데, 이는 베일을 열어 속에 있는 것을 보여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해 주시지 않으면 인간들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과학으로 하나님이 계신 것을 입증할 수 없습니다. 철학이나 종교적인 수행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과 비교할 수도 없으리만치 높은 차원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에게 자기에 대한 계시를 주셨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시간 저는 신앙의 유일한 기준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말씀해 드리려고 합니다.

첫 번 째로, 성경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계시하였습니다.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의 맨 처음 책은『창세기』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첫 장 첫 구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입니다. 1장과 2장에는,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이 창조에 대한 증언으로 시작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창조가 그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지 않으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불신자들은 진화론을 주장합니다. 진화론의 요점은 이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이 저절로 우연히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우연히 생겨난 아메바에서 시작해서 점점 진화하여 수백만 종류의 동식물로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진화론은 과학적인 근거를 전혀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은 과학자들은  물론 진화론자들 자신도 인정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다면 진화론을 내어버리면 될 것 아닙니까? 그것이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진화론을 부인하면 창조론을 인정해야 되는데, 그러면 하나님을 인정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느니 차라리 비과학적인 진화론을 택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도 언급했듯이 성경은 진화론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동식물을 각기 종류대로 지으셨다고 증언합니다. “그 종류대로”란 표현을 매번 언급하고 있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동식물을 창조하실 때 소는 처음부터 소로 만드시고, 말은 처음부터 말로 만드셨으며, 소나무는 처음부터 소나무로, 장미는 처음부터 장미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진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대 생물학은 생물은 종(種)을 뛰어넘는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과학적인 진리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으로부터 3400년 전에 기록된 성경이 얼마나 정확한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이 진리인 것은 그것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이 틀렸고 창조론이 진리라는 사실에 대하여 히브리서 3장 4절에는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우연히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은 어린이들도 알고 있는 상식입니다. 저절로 만들어진 집이나 시계만 없을 뿐 아니라 지극히 간단한 벽돌 하나라도 저절로 된 것은 없으며 반드시 만든 이가 있습니다. 하물며 현대의 첨단 과학지식으로도 다 풀지 못하는 우주만물이 저절로 만들어졌다고 믿다니, 어찌 보면 진화론자들은 대단한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온 우주만물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사실을 인정할 때 인간의 존재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에 인간이 우연히 진화한 존재라면 삶의 목적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저 본능적인 욕구대로 살아가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창조주께서 계시다면 사정은 다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43장 2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서 사람을 지으셨으니 사람이 얼마나 고귀한 목적을 위해 지음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그 누구도 이 보다 더 인간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두 번 째로, 성경은 하나님을 영이시며, 자존자시며, 영원하신 신으로 계시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요 4:24). 사람은 물질로 된 몸을 갖고 있지만 영은 비 물질입니다. 따라서 영은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디모데전서 1장 17절에는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하였습니다. 또 영은 인격적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지․정․의를 갖고 계시며, 생명의 근원이십니다(요 5:26).

그리고 하나님은 자존자이십니다. 자존자라 함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은 다 지음 받은 것들로서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계시는 분이십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목자 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하루는 양 무리를 이끌고 호렙산 근처를 지나는데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놀랍게도 나무가 타서 사그라지질 않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호기심이 생긴 모세가 어째서 나무가 타지 않는지 알아보려고 그 나무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 때 불붙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자,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자손을 구출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모든 존재가 다 지음 받은 것들입니다. 천사들도, 마귀도, 인간들도 다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인이 되시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영원성은 시간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시작과 끝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던 때가 없으시며, 앞으로도 영원히 계시는 분이십니다. 창세기 21장 33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 거주할 때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였고, 시편 90장 2절에는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 6장 16절에 보니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으신 하나님께서는 현재를 보시듯이 과거와 미래를 보십니다. 이 영원성은 유한한 피조물과 확연히 구별되는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세 번 째로, 성경은 하나님을 전지하시며, 전능하시며, 무소부재하시며, 불변하신 신으로 계시하였습니다.

전지하시다 함은, 하나님께서는 알지 못하시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에 속한 모든 일을 아십니다. 아시되 온전히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과거를 아시고 현재도 아시며 미래도 아십니다. 우리 생각도 아시고, 우리가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행한 것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이사야 46장 10절에 보니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고 하셨고, 시편 139장 4절에는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고 하였습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이 우리 마음의 생각과 모든 행위를 다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합니다. 이런 자들에 대하여 시편 14장 1절에는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하나님의 전지하심이 큰 힘이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날지라도, 또는 억울한 일을 당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정을 다 아신다는 사실을 알기에 낙심치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알 때 죄의 유혹에서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가 함께 죄를 짓자고 했을 때,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라는 말로 그 여자의 청을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전능하시다 함은,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많은 기적들, 이를테면 천지만물의 창조, 애굽에 내리신 열 가지 재앙이라든가, 홍해가 갈라진 것이라든가,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이라든가, 요단강 물이 그친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여 주는 사례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하셨으며, 예레미야 선지자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과 드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니이다”(렘 32:17)고 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6)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이 같이 담대하게 선포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시 56:11)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시편 139장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7-12)

하나님께서는 하늘 보좌에 계시지만 동시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고독하고 피곤하며 슬퍼할 때에도 혼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다시금 소망과 용기를 갖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악인들은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계신다는 사실이 큰 부담이 되지만 성도들에게는 이 사실이야말로 큰 위로와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불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불변하시다 함은 절대적으로 신뢰할만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말라기 3장 6절에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라고 하셨고, 야고보서 1장 17절에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불변하심을 믿을 때 우리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불변함을 의심없이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자주 그 뜻을 바꾸시고 약속을 뒤집으신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우리의 삶을 맡길 수 없을 것이지만, 하나님은 불변하시기에 우리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맡기고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네번 째로, 성경은 하나님을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선하시며, 진실하신 신으로 계시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거룩이란 구별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께는 악이 전혀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허물과 죄가 있는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고서 살 자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려고 내려오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소돔 성을 위하여 중보 기도를 드리면서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창 18:27)라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위대한 신앙의 인물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에는 그 자신이 티끌과 같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귀양 가서 어느 주일 환상 중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뵈었는데 그만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었습니다.

한편,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레위기 11장 45절에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속에 물들지 말고 믿는 자답게 구별되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의 또는 공의는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다스리실 때 나타내시는 거룩하심의 또 다른 측면을 말합니다. 인간은 공의롭지 못하므로 인간의 재판 역시 공의롭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거나 심지어는 사형을 당하는 사람도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써 세상을 다스리시며 사람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선하다는 말 속에는 사랑과, 호의, 긍휼, 은혜까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편 34장 8절에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하였고, 시편 23장 6절에는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언제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항상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성도들은 일이 어렵다고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궁극적으로 선한 결과로 만들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진실하십니다. 진실한 것은 거짓이 없고 참됨을 뜻합니다. 신명기 32장 4절에 보니 “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 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진실하시기 때문에 그의 언약은 다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믿을 때 우리의 삶을 다 맡기고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섯 번 째로, 성경은 하나님을 구주로 계시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본질과 그 속성에 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주가 되심을 상고해 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시며, 거룩하시고, 진실 무망하시더라도 만약에 우리를 구원하실 뜻이 없으시다면 하나님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서 살다가 영원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아담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하와를 유혹한 뱀을 저주하시면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고 하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장차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고 예언하였는데,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으로 이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난 받으신 것은 온 인류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서 믿는 우리가 죄사함 받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뿐 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역시 우연이나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취소되는 법이 없는 확실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고 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이 영원불변함을 보증하셨습니다.

여섯 번 째로, 성경은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계시하였습니다.

죄인은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구원하지도 못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서 중보자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인간들과 화해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장 18절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셨으며, 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 14:9)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죄인이 구원받으려면 하나님을 믿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고 하였고,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맏아들이시고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동생들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럽고 복스런 일입니까! 예수님 덕분에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며, 아버지이시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하나님과 아버지가 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을 섬기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성경에 근거해서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처럼 피조물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우상숭배의 죄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올바로 알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 있습니다.

호세아 4장 6절에 보니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얼마나 귀한가를 말해 줍니다. 오늘 주님 앞에 나오신 성도님 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 분명히 알고 섬김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생명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양인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