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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안에서 힘 있게 살아가라! (빌 4: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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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안에서 힘 있게 살아가라! (빌 4:10~13)

시작하는 말

어떤 마을의 아이들은 학교에 가기 위해 폐쇄된 철교를 건너야 했습니다. 아이들은 철교를 건너다가 어지럼증으로 강물에 빠지는 사건도 발생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통통하고 배가 볼록 튀어나온 아이는 끄떡없이 철교를 잘 건너다녔습니다. 이유를 알아보았더니 다른 아이들은 철교를 건너다가 밑을 내려다보면 어지럼증이 생겨 밑으로 빠지는데 배가 볼록한 이 아이는 밑을 내려다볼 수 없기 때문에 앞만 보고 똑바로 걸어가 빠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파도를 보면 파도 속에 빠집니다. 그러나 베드로처럼 예수님만 바라보고 걸으면 파도 위를 걸을 수 있게 됩니다. 베드로가 파도를 보았을 때 다시 물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날 삼키려고 찾아오는 악한 사탄을 보면은 겁에 질려 압도 당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만 바라보면 사탄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사탄이 물러갑니다.

사도 바울은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 졌느니라”(엡2:12-13)고 말했습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 밖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안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한 순간도 살아 갈 수 없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고기 뱃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고기 뱃속에 갇혀 누어 있었습니다. 무기력했습니다.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3일만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행히 나왔습니다. 고기뱃속의 사람이 다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엡2:19-20)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21-22)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안에서 너희를 권하노니”(엡4:1), “주안에서 증거하노니”(엡4:17),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엡4:21), “그 안에서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4:30)고 “주안에서”를 굉장히 강조했습니다.

1. 주안에  똑바로 서야 합니다.

오뚝이는 아무리 넘어트려도 계속 일어납니다. 길가의 문방구 앞 몰모트 모양의 오락 기구는 맞으면 맞을수록 머리를 들고 올라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안에 서라”(빌4:1)고 권면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옥살이를 하면서 빌립보 교인들을 무척 사랑했습니다. 사모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기쁨이요, 면류관이었습니다. 자랑거리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어 놓을 것은 빌립보 교회와 교인들밖에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아끼고 사랑하고, 사모하는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 세우고 싶었습니다. “주안에 서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 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란 못자리와 종묘장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이식을 받았습니다. 내가 이식하는 것이 아니요, 주님이 이식시켜 주십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그리스도 안에 활착하게 됩니다. 거기서 뿌리를 내리고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마틴 루터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마귀가 양쪽에 무엇인가를 가득 쓴 책을 들고 루터에게 왔습니다. “그게 뭐냐?”라고 루터가 물었습니다. “이것은 네 죄의 기록이다.” 이 대답을 들은 루터가 그 기록을 자세히 읽어보니 틀림없이 마귀의 말대로 자기가 지은 죄의 기록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오래전에 지은 이미 잊어버린 죄까지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모두 인정하였습니다.

“이게 전부냐?” 루터가 물었습니다. “천만에. 또 있지” 의기양양하게 사탄이 대답합니다. “가서 가져와봐라”고 루터가 말했습니다.

마귀가 몇 분 후에 첫 번에 가지고 온 것과 비슷한 책을 들고 왔습니다. 이번에도 이 위대한 종교개혁자는 유죄임을 자인했습니다.

“이것이 전부냐?”라고 루터가 물었습니다. “아직 한개 더 있다.”고 사탄이 말하였습니다. “그것도 가지고 오라.” 곧 사탄이 세 번째 책을 들고 오자 루터는 조심스럽게 읽어 보았습니다. “틀림 없군 !  모두 내가 지은 죄들이다. 아직 더 있나?”, “아니 이제는 없다. 이것이 전부다.”라고 의기양양하게 마귀는 대답하였습니다.

아무 말 없이 루터는 자기 책상으로 가서 펜으로 붉은 잉크를 찍어서 한 장 한 장의 페이지마다 같은 말을 써놓았습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요일1;7).  얼굴에 실망과 분노의 빛을 띤 마귀는 일어서서 물러갔습니다. 루터는 그리스도 안에 든든히 서있었습니다.

여기 이런 시가 있습니다. “노한 파도 휘몰아치나 헛되게 모래 위에 표류할 뿐, 영원히 반석 위에 굳게 서서 그 도성은 영원하리”....

시편1:3절에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품안은 시냇가와 같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심기워 진 그리스도인들은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와 같습니다. 우환질고, 환난 고통이 심하다 할지라도 그 손으로 하는 모든 행사가 다 형통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토양에 심기워, 성령의 생수를 마시며 무럭무럭 자라서, 태양의 결실케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축복을 받기 때문에 항상 만사형통하게 됩니다.

신명기 33:13-16절에서 모세는 요셉에게 “요셉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원컨대 ❶그 땅이 여호와께 복을 받아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땅 아래 저장한 물과  ❷태양이 결실케 하는 보물과 태음이 자라게 하는 보물과  ❸옛 산의 상품물과 영원한 작은 산의 보물과 ❹땅의 보물과 거기 충만한 것과 가시떨기나무 가운데 거하시던 자의 은혜로 인하여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끝까지 그리스도 안에 서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끝까지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인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2. 주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막스 러너”라고 하는 사람이 한번은 텔레비전에서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연설에 “지금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행동의 제재를 받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놀라운 충격은 우리가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생각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면서도 기쁨이 없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우리가 자유를 보장받을 때 과연 기쁨도 함께 보장받을 수 있느냐하는 문제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한마디로 표현해서 “기쁨을 잃어버린 시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스토아 철학적인 기쁨은 “세네카”가 젊은 친구 “루실리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직 너 자신의 것으로부터 오는 기쁨을 취하도록 하라 여기서 내가 말하는 너 자신의 것이란 무엇인가? 이는 곧 너 자신이며, 네 안에 있는 최선을 말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반면에 사도 바울의 빌립보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기쁨과 관계된 말을 16번이나 언급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기쁨은 “혼자만의 기쁨이 아니라 언제나 관계속의 기쁨”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의 생활원리는 “관계속의 불쾌가 아니라 관계속의 즐거움”이었습니다. 개인의 기쁨이 곧 교회 전체의 기쁨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그 교회 교인들은 주님의 기쁨인 동시에 바울 자신의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말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3:1절에서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또 다시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고 당부했습니다.

바울 사도는“주안에서 기뻐하라,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삼 세 번 거듭 당부했습니다.

감옥 속에 있는 바울 자신에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는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도 기뻐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은 세상의 것으로 기뻐하는 기쁨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기뻐할 수는 없습니다. 우습지도 않은데 억지로 웃는다면 얼굴 근육이 웁니다. 경련을 일으킵니다. 얼굴이 일그러집니다. 비웃는 웃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뻐할 수 있는 마음가짐과 기분이 필요합니다.

이웃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관용이란 법률이나, 규칙이나, 공정 이상의 것을 의미합니다. 공정 이상의 것은 곧 은혜요, 긍휼이며, 사랑입니다. 그것이 곧 관용입니다.

이웃에게 까다로운 율법을 적용시키면 일시적인 쾌감은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영혼의 기쁨은 절대 오지 않습니다. 관용을 베풀 때에 기쁨이 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엄격한 율법 적용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곧 관용입니다.

아이들은 크고 작은 모든 일을 부모에게 이야기합니다. 이야기하면 다 들어 줄 것으로 믿습니다. 작은 승리, 작은 성공, 작은 실패, 작은 실망, 작은 상처, 작은 요구, 작은 필요를 다 들어 줄 것으로 믿고 말합니다. 부모의 응답을 받고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아무것도 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쁨과 염려는 상극입니다. 기쁨의 원수는 근심 걱정에 사로잡힌 염려입니다. 염려는 걱정을 낳고, 걱정은 근심을 낳습니다. 근심은 낙망을 낳고, 낙망은 절망을 낳고, 절망은 패망을 낳습니다. 패망 중에 기뻐 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빌4;6)라고 충고했습니다.

매사에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고 말했습니다.

❶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과거를 위해 사죄의 은총을 구할 수 있습니다. 현재에 필요한 모든 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미래를 위해 도움과 지도를 구할 수 있습니다. 

❷우리는 타인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영원히 잊지 못할 사람, 신세진 사람, 가난한 사람, 불행한 사람, 관계된 모든 사람,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자들의 영혼을 위해서까지  간구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원수, 대적까지라도 위하여 기도할 때에 기쁨과 즐거움이 찾아옵니다.

3. 주안에서 항상 자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스토아(The Stoa) 철학에서는 “자족(autarkeia)”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인간이 모든 물질, 모든 사람들에게서 무조건 완전히 초연해 있는 상태”를 “자족”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 이르는 것은 철학적인 정신에 의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만족이란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요, 욕심을 적게 내는데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만약 당신이 누구를 행복하게 하려면 “소유물을 증가시켜 주지 말고, 그의 욕심을 제거하라”고 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어느 때에 가장 부한 인간이 되는가?”라는 질문에 “가장 적은 것으로 만족하는 자이다. 왜냐하면 자족이야 말로 자연의 부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에픽테터스(Epictetus)는 “❶컵 하나나 가정용구 하나로 시작하라. 만약 이것이 깨어지면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하라, ❷다음으로 말이나 개를 가져라, 그리고 그 동물에게 무엇이 일어났다면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하라, ❸그리고 네 자신도 어떤 일로 상처를 받으면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하라, ❹오래 산다면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보는 입장에 설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하라.”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스토아 인들은 철학 안에서 자족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1-12)고 말했습니다.

4. 주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인간은 무지몽매합니다. 그러므로 무능 부덕합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무엇이든지 가능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일군으로서의 일체의 생활 비결을 배웠다고 말했습니다.

➀많이 견디는 것 ➁환난과 궁핍과 곤난 ➂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 ➃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➄깨끗함과 지식, 오래 참음과 자비,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 ➅진리의 말씀과 의의 병기로 좌우함 ➆영광과 욕됨, 아름다운 이름과 악한 이름 ➇속이는 자와 참된 자, 무명한 자와 유명한 자 ➈죽은 자 같으나 산자,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않는 자,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자 ➉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자,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고후6:4-10)의 생활을 해왔다고 말했습니다.

끝맺는 말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우물쭈물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 힘 있게, 능력 있게, 확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신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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