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소망을 가지세요 (롬 8:18-30).

  • 잡초 잡초
  • 155
  • 0

첨부 1


서구 사회의 결혼 풍습 중에는 시집가는 딸에게 엄마가 진주를 주는 전통이 있답니다. 이 진주는 흔히 frozen tears(‘얼어붙은 눈물’)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딸이 시집가서 흘려야 할 많은 눈물을 상징하는 것이라 합니다.
진주는 바다에서 나옵니다. 진주는 ‘아비큘리데’(Aviculidae)라고 불리는 특별한 굴(바다에 사는 굴 조개)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이 굴 속에 모래알이 들어오면 굴은 ‘나카’라고 불리는 물질을 만들어 모래알을 싸 바르기 시작합니다. 나카가 많이 덥힐수록 진주는 커지고 값도 올라갑니다. 그런데 이 나카는 아주 조금씩 천천히 만들어지기 때문에 작은 진주도 수개월 걸리고, 큰 진주는 몇 년이 걸리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굴속에 들어온 모래알이 모두 다 진주기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래가 몸속에 들어오면 굴에게는 두 가지 선택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카를 생산해서 코팅 작업을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모래알을 무시해 버리는 길입니다. 모래알을 무시할 경우 굴은 나카를 생산하기 위해 수년을 고생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대신 이 모래 때문에 굴은 병들고, 많은 경우 죽게 됩니다.
굴이 당면하는 이 두 개의 선택이란, 침입한 모래알의 도전으로 받아들여 진주를 만드느냐 아니면 무시해서 피차 망하느냐 하는 선택입니다.

이것은 굴의 선택일 뿐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선택이기도 합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의 선택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도 많은 종류의 모래알이 들어옵니다. 이럴 때, 어떤 사람은 그것을 하나의 도전으로 여기고 건설적으로 받아들여 진주를 만들고, 또 어떤 사람은 무시하고 회피하다가 차차 곪아 파멸에 떨어집니다.

우리가 읽은 오늘 본문은 고난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18절, “우리가 겪는 고난은”
22절,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난이 없는 것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11:23-29에서 사도 바울은 그동안 복음 전하느라 겪었던 고난을 이야기 합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고, 감옥살이도 더 많이 하고, 매도 더 많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습니다. 유대 사람에게서 마흔에 하나를 뺀 매를 맞은 것이 다섯 번이요,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이요, 돌로 맞은 것이 한 번이요,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요, 밤낮 꼬박 하루를 망망한 바다를 떠다녔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는,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수고와 고역에 시달리고, 여러 번 밤을 지세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습니다. 그 밖의 것은 제쳐 놓고서라도, 모든 교회를 염려하는 염려가 날마다 내 마음을 누르고 있습니다. 누가 약해지면, 나도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누가 넘어지면, 나도 애타지 않겠습니까?”
이 정도면 어디 하나님의 일이라도 하겠다고 나서겠어요?
괜히 왜 교회 다니면서 일해요? 괜히 왜 예수 믿고 고생하고 고난을 겪어요?

빌립보서 4:13에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말씀을 읽고 들을 때마다 무슨 생각합니까? “정말 사도 바울은 멋진 사람이야! 대단해!” 그러겠습니까?
거기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그 ‘모든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빌립보서 4:11-12, “내가 궁핍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내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13-14절,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나의 고난에 동참한 것은 잘한 일입니다.”
보세요. 지금 사도 바울이 크게 성공해서, 큰 집에 앉아, 커피 마시면서, 느긋하게 멋진 음악 들으면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빌립보서를 쓰고 있는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다고 빌립보서 1:12-13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죽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빌 1:21)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발, 성도 여러분!
착각에서 깨어나십시오.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잘 살고, 뭐든 다 가질 수 있고, 어떠한 고난이든 당하지 않고, 큰 병은 커녕 감기도 걸리지 않고, 사업은 가만히 있어도, 늘 골프 치러 다녀도 커지고, 아이들은 언제나 일등, 언제나 좋은 일만 생기고……. 이런 망상에서 깨어나십시오.
예수님은 좁은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셨는데…….
넓은 길과 넓은 문. 그 길은 영광의 길입니다. 승리한 장군들이 로마를 향해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달리는 길입니다. 승리한 장군들을 맞이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문이 개선문입니다.
거기에 비해 좁은 길, 좁은 문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예루살렘 시가지를 벗어나 골고다 언덕에 오르셨던 좁은 뒷골목입니다. ‘비아돌로로자’ 슬픔의 길입니다. 가지고 또 가지고, 그래서 이고, 지고, 안고, 메고, 손에 들고 그렇게는 들어갈 수 없는 길입니다. 목을 꼿꼿하게 하고, 허리를 바짝 세우고, 어깨에 힘주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좁은 문입니다.
누가 보아도, 두 길 중에 선택하라면 당연히 넓은 길을 선택할 겁니다. 누가보아도 두 문 중에 선택하여 들어가라면 당연히 넓은 문을 선택할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좁은 길, 좁은 문을 선택한다면, 그 사람은 정신이상에 걸린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좁은 길, 좁은 문으로 가시면서, 우리 보고도 그 좁은 길, 좁은 문으로 오라고 하십니다. 이게, 소위 남부럽지 않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 설사 그가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잘 먹고, 잘 살고, 조금이라도 희생이나 헌신, 감사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귀담아 듣기조차 할 말씀인가요?

그런데,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뭡니까?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죽어야 합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도 착한 일 하면 천당 간다고 하는데……. 예수 안 믿는 사람도 착한 일 하면 복을 받는다고 하는데……. 우린 그런 것도 없다는 말입니까? 그런 거 바라는 것이 잘못된 신앙입니까?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고난의 문제를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한 마디로 25절, “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18절,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참으면서 기다리라는 겁니다. 장래의 영광이 있으니 참으면서 기다리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 또한 막연한 것 아닙니까? 그야말로 생일잔치 멋들어지게 먹자고 그날까지 굶자는 거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천국의 영광을 누리기 위해 이 땅에서는 참으면서 기다리자는 겁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가 왜 참으면서 기다려야 하는지,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22절,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나 혼자 고난당하고 있는 것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고난은 나 혼자 당하는 것 아닙니다.
고난에서 도망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돈 있다고, 권력 있다고, 뭐 있다고 고난 안 당하는 것 아닙니다. 사람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까지도 고난당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 하나님의 질서가 파괴됩니다. 그리고 시작된 고난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겁니다. 마치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든 노력하면 고난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결국 모두가 다 고난당하고 있고, 고난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모든 피조물- 예수 믿든 안 믿든, 사람이든 나무든, 모든 피조물이 고난당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성령 받은 사람도 신음하고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말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왜 병 걸리느냐?”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사업에 실패하느냐?” 그래서 간혹 예수 믿는 사람들도 이런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신앙생활 잘 하면 당연히 복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성경 특히 주님의 말씀을 보면, 건강하고 돈 많은 것은 신앙생활 잘 하고 못하고에 따른 것 아닙니다. 물론 작은 일에 충성하면 큰일을 맡기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일을 더 하라고 주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삽을 가지고 열심히 땅을 파는 나에게 하나님께서 포클레인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포클레인으로 더 크게 땅을 파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집에다 차고를 만들고 그 안에 넣어둡니다. 닦고, 조이고, 기름 치고……. 그러다가 땅을 파야할 일이 있으면 여전히 삽을 들고 나갑니다. 조심하세요. 그러다보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곳간에서 포클레인을 끌어가십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우리가 안 믿는 사람이나 다를 것 없는 건가요? 예수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똑같다면, 여기 이 시간 이렇게 앉아있는 우리들은 뭔가요? 차라리 집에 앉아서 쉬든지, 아니면 이렇게 만나도 둘러앉아 먹을거리를 나누던지, 하다못해 부침개라도 해먹는 게 훨씬 재미있고 유익한 거 아닌가요?
과연 우리에게 뭐가 있습니까? 안 믿는 사람에게 없는 것이 우리에게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에겐 소망이 있습니다.
23-24절,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우리는 이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거듭날 수 없기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주셔서 예수를 주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말씀대로 이제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양자될 것.
곧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주실 것입니다. 여기 ‘아들’이란 ‘아들의 신분’ ‘아들 됨’을 이야기 합니다.
자유당 시절. 이기붕 씨의 아들 이강석은 그렇지 않아도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양자로 삼았습니다. 그 당시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아들의 권력을 굉장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아들은 아니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아들 신분, 곧 아들 됨이 그에게 그런 권력을 준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죄의 종들이었습니다. 마귀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별거 아닌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통령의 양아들만 되어도 엄청난 권세를 누렸는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도 여전히 죄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치사하고 쩨쩨하게 살아갑니다. 조그마한 어려움만 있어도 세상 다 무너진 것 같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몸의 구속.
신앙을 영적인 것만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구원도 영적인 구원이기에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들 합니다. 양자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영혼만이 아닙니다. 마음이 곱다고 마음만 양자 삼아요? 공부 잘 한다고 머리만 양자 삼아요? 양자라면 그 모든 것입니다. 심지어 그가 어떻게 살았든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그의 전부를 양자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부패하는 육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병들 수 있고, 육신의 욕심 때문에 유혹에 넘어가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외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몸입니다. 몸은 결국 흙으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무슨 몸의 구속이 있다고 할까요?
때문에 몸의 구속은 곧 몸이 있을 때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육신을 지키는 것이 영혼을 지키는 것이 되고,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육신을 구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혼과 육신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4:7-9,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능력을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꺼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자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린 질그릇 같은 몸이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몸은, 내 삶은 질그릇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담고 있기에 망가지지도 썩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 뿐 아닙니다.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26절)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다 말 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서 주십니다.
성령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영, 예수님의 영, 주의 영입니다. 곧 세상 모든 것 만드시고 다스리시고 끝내 심판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약함을 말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약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고난당한다는 것입니다. 제발, 하나님 앞에서 강한 척 하지 마십시오.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권력만 있으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내가 가지고 싶은 것만 가지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런 것들만 있으면 하나님 없이도,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강한 척 하는 겁니다.
“헌금하라.” 하나님께서 왜 그런 말씀하셨을까? “봉사하라.” 왜 그리 말씀하셨을까? 하나님이 뭐가 아쉬워서……. 하나님께서 그런 말씀하신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정말 얼마나 믿고 의지하는가를 보고자 하심입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더 큰 은혜와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왜 헌신과 봉사에 인색합니까? “하나님. 하나님을 믿습니다만 이것 없으면 곤란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지만 이것 없으면 곤란합니다.” 왜 그렇게 말합니까? 하나님 보다 누가 더 강하다고 느끼는 겁니까?
“하나님! 이 모든 것 보다 하나님께서 더 강하십니다.” 그렇게 고백하는 것이 우리의 약함이요, 이 약함을 그리고 그 약함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강한 능력으로 도움이 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이 없을 수 없습니다.(모두 없기를 바라지만)
중요한 것은 그 고난을 어떻게 할 것인가? 진주를 만들어 낼 것인가 아니면 멸망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고난이 여러분을 인생에서 오히려 아름답고 멋진 열매 맺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건 여러분의 힘만으로 되는 것 아닙니다. 연약함을 도우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분을 의지 하십시오. 세상의 그 어느 것도 그분 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보다 더 큰 도움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여러분의 영과 육을 동시에 보호하시고, 지키시고, 도우시고, 구원 하실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수 있는 소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순간순간 사는 동안 우리의 보호자가 되시고, 인도자가 되시고, 복 주시는 자가 되십니다.
그러면서 다시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그렇게 보호자가 되시고 인도자가 되시고 복을 주시는 것은 더 큰 하나님의 일 하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으면 어떤 고난에서도 승리 할 수 있습니다. 고난 중에도 소망이 있어 감사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 안에서 소망을 갖고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영기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