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어린이주일] 사랑의 대상 (막 10:13-16)

  • 잡초 잡초
  • 166
  • 0

첨부 1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 당시에는 ‘어린아이들의 존재에 대한 인정’과 ‘인권에 관한 의식’이 오늘날처럼 이루어 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의 어린이들은 사람들의 숫자를 셀 때에 아예 제외되어진 시대,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따라서 어린이들은 힘없고 약하며, 의존적이고,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어린이들은 가진 것이 없고, 내놓을 것 없는 존재여서 어른들에 의해 늘 하찮게 여겨지고, 무시당하곤 했습니다. 당시의 이러한 어린이들을 대하는 태도나 사고와 관행은 오늘 본문에서 보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 속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모들이 어린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나아오자 그 부모들을 꾸짖었습니다. 여기서 "꾸짖는다."는 말은 그 의미가 매우 강한 말로서 <마가복음에서는 귀신을 내쫓거나 하나님의 뜻에 반대한다.>라고 할 때에 사용되어진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본문 14절에 말씀하시기를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신 것으로 보아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을 말로 꾸짖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예 어린아이들이 예수님께 접근하는 것을 막고 쫓아버리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어른들의 잘못된 태도와 생각에 정 반대 되는 입장을 표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은 하챤은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의 대상>으로 보시고 귀중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잘못된 모습이 발견된다면 오늘 어린이 주일을 통해 모범을 보여주신 주님을 통해 어린이들을 대했던 잘못된 태도를 자성하며, 어린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방법을 바꾸고, 가치관을 고쳐야 할 줄 믿습니다. 어린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1. 어린아이들을??인격적으로 높이 대해야 합니다(14절).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 기독교를 가리켜 다른 종교들과 달리 ‘어린이 종교’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읽어 보시면 신약성경 도 첫머리부터 어린이를 낳는 말씀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린이 때부터 어떻게 성장하여 큰 지도자가 되었고, 하나님께서 쓰시는 제사장과 선지자(예언자가, 선견자)와 사사가 되었는지에 대해 여러 곳에 기록하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의 가정에 아무리 좋은 금은 보화와 패물이 있다고 할지라도 '자녀'나 '손자처럼 귀한 보물'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아마 세계적으로 한국 가정의 어머니처럼 자식을 소중히 여기고 가르치고 애쓰고 희생적인 어머니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자녀와 바꿀만한 가치있는 물건이 어디 있겟습니까? 그래서 고액을 들여서라도 자녀들의 장래를 위해 투자한다고 생각하기 떼문에 공교육이 뿌리까지 흔들리고, 강남의 집값이 폭등하여, 경제가 흔들리고, '치맛바람'과 '아줌마가 무섭다.'는 말이 생긴 것 아닙니까???

어린이의 영혼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 되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나의 자녀라고 할지라도 부모의 몸을 빌려 나왔을 뿐이고,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주신 귀한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자녀 이전에 그 창조와 출생 자체가 너무나 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랑ㅇ받기 위해 태어난 구히한 어린이들을 보살피고, 사랑해야 할 의무가 마땅히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는 다르게 어린아이들의 편에 서셨고, 어린아이들을 반겨 품어 주셨으며, 어린아이들을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의 의 대상으로 만드시고, 어린아이들을 인격적으로 높여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도 본문 말씀을 자세히 살펴 봅시다. 당시 부모들이 예수님께서 어린이들을 만져주길 원해서 어린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만져주시기만 하면 각색 병든 자들이 고침받고, 귀신들이 떠나갔고,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께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것을 제자들이 볼 때에 귀찮게 생각되었고, '어린이까지 데리고 와서 예수님에게 신경을 쓰게 하느냐?'고 생각되어서 너무나 많은 사람에 지친 제자들이 거절하고, 방해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이의 접근을 제자들이 꾸짖자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 노하셨다고 했는데(13-14), 이것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아이들 편에 서실 뿐 아니라 어린이들을 깔보고 무시하는 당대의 사고와 관행을 강하게 비판하신 것이요, 어린이들을 인격적인 존재로 여기신 것으로 본 것이 틀림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14-16절을 살펴보면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 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 는 이런 자의 것 이니라. 너희도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지 아니하면 들어갈 수 없느니라." 고 말씀하시고, 심지어 아이들을 품에 안아 주시고, 머리에 안수하시며, 축복을 하셔서 보내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어린아이들을 사랑하셨는지 인격적인 존재로 여기셨는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이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과 존중과 축복의 대상이요 인격적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실 뿐 아니라 14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어린이를 더할 나위 없이 귀하게 여기시고, 인격적으로 높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이 사랑은 예수님께서 친히 모범을 보이시며, 우리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를 언급하실 때 '하나님 나라'와 연결시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린이 사랑은 하나님 나라의 법이요. 하나님의 명령이요. 천국의 속성과 성도들의 당연한 생활 근간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에 나라에서는 결코 어린아이라고 해서 무시당하거나 소홀히 여겨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어린아이를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여 인격적으로 대하지 아니하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2. 영접해야 합니다.

본문 15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

??'받들다,'는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영접하다.'는 뜻입니다.

막 9:37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하셨습니다.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하나님에 의해 영접되는 것이고, 곧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온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며, 인격적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이 어린이들을 귀하게 여기고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길은 ‘어린이들을 우리 각 가정에 위탁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기르는 가장 좋은 길은 주님의 축복을 받도록 신앙으로 지도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나아온 사람들은 그 시대의 일반적 풍조에 비추어 보면 예외적인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들은 그 아이들을 아무 생각 없이 데리고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 아이들을 만져 주시기를 바라고 온 것입니다(13).

같은 이야기를 전하는 마태복음 19:13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이들을 기뻐 맞아주시고, 그들이 소원대로 그들의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16). 그렇다면 우리의 자녀들도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께 데리고 나아와, 예수님의 품에 안기게 하고, 주님에 의해 축복을 받게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 됨의 당연한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아이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데리고 나아오지 않고, 그의 품에 안기게 하지 않고, 그에 의해 복을 받게 하지 않는 부모는 자신의 자녀에 대하여 가장 큰 실책을 범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향하여 크나큰 불충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문을 열지 않은 자녀의 장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잠시 내가 생명이 붙어 있을 때 자녀를 위해 보살피고, 돌보아 주고, 그리고 남겨주는 유산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아직도 자녀들을 교회에 보내지 않는 부모들, 자녀들이 고 3이라고 해서 주일날 교회 대신 학원이나 독서실에 가라고 하는 부모들은 자신들의 죄가 얼마나 중한 것인지를 이 시간 분명히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복 받을 기회를 자녀들에게서 강탈하는 것이기 때문에 올바른 가치관을 자녀에 심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식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식들을 위해서라고 강변할지 모르지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식 사랑과 정 반대의 되는 길을 가는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는 일이요. 앞길을 막는 행위임을 알아야 합니다.

스코틀랜드에 유명한 <성서학자 ‘윌리엄 바클레이’의 자서전>을 보니까 어렸을 때에 어느 성전에 갔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이가 성전 구경을 다하고 나갈 때 그 당시 사제요, 오늘의 목사님께서 옆에 있기에 자신의 아버지가??요청하더랍니다.

"우리 아이에게 안수 기도해 주십시오."라며 할 때 사제인 목사님께서 어린 아이였던 바클레이에게 간절히 축복하는 안수를 해 주더랍니다. 그런데 그 어린이에게 해 주었던 안수 내용이 일생동안 축복이 되어서 ‘세계의 유명한 신학자’가 되고, ‘성서 주석가’가 되는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종교교육이나 가정교육이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할 것 같지만 이 뿌리에 영양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뿌리에 거름을 주는 것은 당장 나타나지 않는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결과가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교육은 반드시 잠재되어 있다가 1년이 지나고, 수년이 동안에 영향이 나타납니다. 것은 마치 콩나물에 물주면 당시에는 표시가 없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쑥쑥 자라나는 것처럼 큰 인물이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일학교 교사의 사명이 귀하고, 가장교육과 신앙교육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교회에 달려 나올 때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의 자녀를 안으시고, 안수하시고 앞날을 책임져 주셔서 가장 위대한 인생을 사는 축복이 임하는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맡겨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귀하게 영접하는 자세로 양육하고, 신앙 안에서 성장하도록 노력하되 마치 주님을 영접하는 마음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그들 자체만으로도 어른들에게 기쁨과 행복이 되지만, 또한 어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가르치는 거울이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14-15절을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들에게서 배울 것이 있기에 겸손하게 배우겠다는 자세로 살아가는 이것이 바로 '영접하는 생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나의 자녀들을 사랑한다면 '천국에서 영접 받도록 키우라.'는 주님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먼저 14절의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해보면,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에는 온통 아이들 밖에 없을 것이라는 말씀이 물론 아닙니다. "이런 자"란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특징으로서 예수님께서 가리키고자 하신 것은 어린이들이 갖고 있는 어떤 장점들이라기보다는 '어린이들 자체를 의미합니다. 즉 어린이들처럼 아무 것도 가진 것 없고, 내어놓을 것 없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전적으로 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태'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가진 것 많고, 자랑할 것 많은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나 내놓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여기며,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밖에는 기댈 것이 없음을 아는 사람들의 것임을 가르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어른들에게 이 진리를 깨닫게 하시기 위한 도구와 거울로 어린 아이들을 허락하셨음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아이들을 사랑할 뿐 아니라 <어린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열심히 배우려고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어른들은 많은 말로 아이들을 가르치지만 아이들은 아무 말 없이도 어른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들을 통해서 우리를 가르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5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라고 했는데 "받들지 않는 자"보다는 눅 18:17절에서처럼 "받아들이지 않는 자"라 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너무 세상이 어둡다고 해서 우리의 신앙마저 때가 묻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수한 신앙을 어린아이에게서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가진 것', '내어놓을 것',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 전적으로 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태'의 어린 아이들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 그저 죄인이고, 벌거벗은 자일뿐임을 고백하며,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지하여 하나님 나라 백성 되기를 간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영접하는 그런 사람들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깨닫도록 하나님께서는 어른들에게 아이들을 선물로 주셨음을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이들을 사랑해야 하며, 아이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자세와 생활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모든 어린이를 계속하여 지속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16절).

본문 1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행위인 '아이들을 안고', '안수 기도해 주셨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미래를 위한 예수님의 배려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시며, 가르치신 대로 어린아이들을 천대하거나 무시하는 세상에 맞서 싸워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보다 아이들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심지어 내 아이들만 사랑하는 이기적 사랑인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복 받습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회가 복된 사회입니다.

"개구리소년들"이라는 비극을 발생시키는 사회는 극악무도한 사회가 재현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을 학대하거나 어른들의 이익이나 탐욕을 위해 아이들을 이용하는 행위를 강력하게 제재하고 단호하게 응징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을 오염시키고, 병들게 하는 모든 환경을 제거하고 추방해야 합니다. 특히 어린이들에게 비뚤어진 '성의식을 심어주는 일체의 음란 유해 요소들을 철저히 뿌리 뽑아야 합니다.' 어린이들을 성노리개로 삼는 사회는 악마적 사회입니다. 이러한 사회풍조에 맞서 싸우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방치하거나 비호하는 당국이나 모든 악한 세력들은 질책하고,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명령인 어린이 사랑을 지속적으로 실천함으로써 밝고 건강하며, 복된 세상을 만들어가는 신앙인들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동시에 어떻게 자녀를 지속적으로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자녀를 진정으로 예수님처럼 축복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그 후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때에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신 것처럼 직접 주신 때도 있었지만 부모를 통하여서 축복하신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노아가 자녀들을 축복할 때 셈과 함과 야벳에게 한 축복과 저주가 그대로 이루어져서 지금까지 이루어졌고, 또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노아가 함에게 저주를 했습니다. 함은 이프리카에 살고 있는 인종인데 "종의 종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종만 되어도 참 답답한 일인데 <종의 종>이라니 참 끔찍한 말입니다만 그대로 이루어 지지 않았습니까?

셈에게 말했습니다. 셈은 아시아에 살고 있는 인종인데 우리 한국도 셈족에 속합니다. 노아는 셈에게 "셈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라고 축복했습니다. 셈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찬송을 받으시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신앙의 불길이 얼마나 뜨겁게 일어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지금까지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지만, 아시아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하여서 하나님이 더 크게 영광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야벳을 창대케 하리라."고 축복하셨는데 야벳의 족속은 구라파에 살았습니다. 유럽 쪽에 퍼져있는 야벳 족속을 예언대로 창대케 하셨는데 20세기까지는 이들이 창대했습니다. 그런데 셈의 장막에 거하듯이 그들이 지금 아시아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환태평양(環太平洋)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들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부모를 통하여서 자녀들을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셨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이삭을 축복하고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고 야곱은 그의 열두 아들을 축복하였는데 그 내용이 창세기 49장에 나와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열두지파가 어떻게 아버지 야곱이 예언한, 축복한 그대로 되어 가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야곱이 생명을 걸고 장자가 되려고 했던 것도 장자에게 축복권이 주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족장시대에는 주로 부모님을 통하여서 자손을 축복하셨는데 족장시대가 지나가고 난 다음 율법시대가 되면서 하나님은 제사장들에게 축복 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라. 네가 그들을 축복하면 내가 그대로 복을 주마"고 약속하셨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고 약속 하셨습니다. 즉, 주의 종이 복을 빌면 내가 너희들이 축복한 복이 그대로 이루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제사장이 축복한 그대로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신약시대에 오면서 하나님은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우리들도 자녀들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축복하는 축복의 권세가 다 있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남의 집에 들어가서 평안을 빌면 그 집안이 받을만하면 너희가 빈 모든 평안이 그 집에 임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부모를 통하여 축복하여 자녀가 복을 받고, 제사장이 세상을 축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을 통해 다시 한 번 더 우리가 가진 어린이들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봅시다. 사랑의 대상인 어린이들을 인격적으로 높이 대해며(14절), 영접하며, 모든 어린 생명을 지속적으로 사랑하는 모든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복 빌어 드립니다. <아멘> (황영복 복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