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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진정한 가족 (마 12:4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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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오월은 ‘가정의 달’로 부릅니다. 오월만 가정의 달이란 뜻은 아닐 것입니다. 바쁜 현대인의 삶이 가정을 소홀히 하다보니까, 한 달만이라도 좀 더 가족들을 생각하게 하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생각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진정한 가족’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46절을 보면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무리에게 아직 말씀하고 있을 때에 발생했습니다. 설명을 덧붙이면, 예수님을 배척하면서 또 다른 표적들을 구하는 자들에게 요나의 표적밖에 보이실 표적이 없다는 것, 그리고 악령이 사람에게서 나왔을 때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으면, 더 악한 일곱 영이 사로잡아서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비참하게 된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마침 그 때에, 그 분의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이 그분께 말하기를 청하며 밖에 서 있었습니다. 마태는 상세하게 밝히지 않았으나, 마가복음 3:20-21절을 보면 그들이 왜 예수님을 찾아왔는지 설명되어 있습니다.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우리는 마태복음 12장에서 안식일 논쟁과 치유 논쟁과 표적 논쟁을 통해서 메시아를 거절하는 유대인들의 반응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우리 주님께 대하여 적대적인 태도를 가졌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역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에 들렸다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을 ‘귀신 들린 사람’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족들 역시 예수님을 ‘미친 사람’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지만, 놀랍게도 주님을 증오하는 무리들과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나 ‘미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여기서 ‘인간적 친밀함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인간적인 친밀감으로 따지면 예수님의 가족보다 예수님과 친밀한 사람은 없습니다. 특히 어머니 마리아는 태중에서부터 예수님과 함께 했고, 그 분의 유아기와 아동기와 소년기와 청년기를 함께 보냈습니다.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에 대해서라면 마리아보다 더 소상히 알고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마리아보다 예수님을 더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친밀하다고 해서 예수님의 신성한 본질을 더 잘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지만,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좋아하고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을 생각만 해도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인간적인 친밀함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신성한 본질에 대한 충분히 깨달음 없이 단지 예수님이 좋을 뿐이라면, 그 사람들도 결국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무리에 속하게 됩니다. 성도들이 성경을 배우면서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려는 것은 단지 예수님이 좋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분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때로는 좋게 보이지 않는 말씀조차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순종하지 못할 때는 회개하면서, 순종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사람의 말로 여긴다면, 아무리 그를 좋아할지라도 100% 순종하지 못했다고 해서 통회하면서 회개하려는 마음을 가질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좋아서 그분께 찬양하고 예배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고 살았다가는 인생 망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성경대로 행하지 못한 것에 대해 회개하지 않는다면, 실성한 놈이나 성경 말씀을 곧이곧대로 순종하는 것이지, 제정신인 사람은 믿어도 적당히 가려가며 믿는다고 무의식적으로라도 생각하고 있다면, 그는 주님을 헛소리 하시는 분으로 여기는 셈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본질은 모른 채, 인간 예수님만 알고 있는 가족들과 같습니다. 예수님과 ‘인간적인 친밀함’은 있지만 ‘영적인 친밀함’은 결여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47절을 보면, 어떤 사람이 이를 예수님께 알립니다.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하던 사람이 무안할 대답을 하셨습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48) 그리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49) 예수님의 대답은 상당히 무례하게 보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충격적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혈육인 가족들은 그대로 밖에 두시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제자들과는 계속 함께 머무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약 30년 동안 충실하게 가족을 돌보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는 어머니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인품을 생각하면, 가족의 소중함을 무시하거나 가족을 당신의 사역에 부담되는 존재로 생각한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미친놈 취급한 것에 화가 나서 토라진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가족들이 자신을 염려해서 찾아온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귀신들렸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서,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형님을 위하는 마음으로 왔음을 모르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예수님은 이처럼 모질게 반응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통해서 주님을 대항하던 사단이 이제는 가족들을 통해서 교묘하게 대적하고 있음을 파악하셨습니다. 힘써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삶을 미친 짓으로 여기고 더 이상 하나님의 뜻대로 행치 않도록 막는 가족들을 보면서, 그 이면에 사단이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음을 간파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참으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50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우리 주님께서는 언제나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셨고, 심지어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는 죄인들조차 영접하셨습니다. 그것은 단지 ‘인류애’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지장이 생기면 예수님은 단호하게 물리치셨습니다. 수제자 베드로가 십자가의 길을 걷으려는 예수님을 만류할 때도,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16:23)고 책망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에게 있어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 최상위의 문제였고, 그 외 인간 상호간의 정과 의리 등은 문제는 이차적인 것이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참 냉정하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사람 사이에 가장 친밀한 우정은 항상 하나님과 영적 친밀의 결과로 생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우정’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다윗과 요나단’입니다. 그들의 우정은 남녀 간의 사랑보다 더 진한 것이었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삼하 1:26) 그런데, 그들은 실상 깊은 우정을 가지기 힘든 처지에 있었습니다. 한명은 차기 대권주자이고 한 명은 황태자로서 서로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치열한 암투를 벌이기 쉬운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의 아버지 사울은 다윗이 차기 왕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황태자로서의 자리를 깨끗하게 포기했습니다. 왕위를 욕심내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하나님의 뜻’에 적극 순종했습니다. 다윗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사울에게 맞대응하여 싸우지 않고, 하나님께서 높여주시기까지 끝까지 사울을 선대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둘 모두 ‘하나님의 뜻’을 최상위에 둔데서 생겼습니다.

영적 친밀감은 우정뿐만 아니라 참된 결혼의 기초가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부부싸움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친밀감 때문에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서 회개합니다. 그러고 나면 서로에게 용서를 구하며 관계를 회복합니다. 설령 서로에게 의심되는 일이 생겼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신뢰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영적 친밀감이 없는 사람은 한 번 신뢰가 깨어지면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싸움을 하고난 후에도 서로가 받은 상처를 풀지 못하고 또한 자존심을 내세우기 때문에 화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를 볼 때 영적 친밀감이 화목한 가정의 기초가 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잠언 16:7절에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영적 친밀감은 부부관계나 가족 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튼튼한 기초가 된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마음가짐과 행위가 없다면, 모든 인간관계는 삐걱거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영적 친밀감이 결여된 우정과 사랑은 그 기반이 너무 허약해서 쉽게 흔들립니다. 피를 나눈 가족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영적 친밀감이 있을 때는 사랑과 평화가 있으나, 하나님과의 영적 친밀감이 결여되면 전쟁과 상처만 남습니다. 영적 친밀감이 상실된 상태에서는 비록 인간적인 친밀감 때문에 서로 생각해주고 염려해주는 행동을 할지라도 이상하게도 상처를 주고 갈등하는 일이 허다하게 발생하게 됩니다.

‘영적 친밀감’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서 생깁니다. 바리새인들처럼 말씀을 많이 알고 있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고, 가족들처럼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많이 안다고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는 말씀에서 명확하게 확인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자기를 고집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자기 유익을 포기하지 않을 때 영적 친밀감은 깨어집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행함이 없이 예수님께 친밀감을 느끼는 것은 영적 친밀감이 아닌 인간적인 친밀감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예수님의 가족, 그분께 헌신됨의 표시는 오직 그분의 뜻에 대한 순종의 태도로 나타납니다. 하나님 나라, 하늘 가족은 인간적 친밀함이 아니라 말씀 순종을 통한 영적인 친밀함을 기초로 건설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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