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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크리스천의 문화 읽기 (롬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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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 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1. “다빈치 코드” 이야기
2. 예수님 만나지 못한 사람들
3. 예수님 만나기
4. 사탄의 전략
5. 믿음의 홀로서기
6. 예수님 이야기
7. 결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1. “다빈치 코드” 이야기

2003년 봄에 출간된 “다빈치 코드”는 댄 브라운의 소설입니다. 전 세계에서 4천만 권 이상이 팔렸습니다. 읽은 사람은 5천만 명이 넘을 것입니다. 한국은 출간 5개월 만에 100만부를 넘었고, 지금까지 260만부가 팔렸습니다. 참고로 한국에서 3만부만 팔리면 베스트셀러로 기록됩니다.

‘다빈치 코드’가 영화로 나와, 어제부터 미국과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70개국에서 개봉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교계가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이 기각되어, 영화는 상영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니코스 카잔차키스 원작 소설을 마틴 스코세지 감독이 영화화한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보다 더 심각한 영향을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크리스찬이 어떻게 문화를 읽을 것인가?”를 주제로 삼아 전하겠습니다.

다빈치 코드의 주요 내용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했으며, 자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대문서 가운데 그것을 증명할 근거가 있다는 것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막달라 마리아가 등장한다고 주장합니다.

기독교를 부정하고,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한 시도는 지난 2천년 교회역사와 궤도를 같이 합니다.  근래에 뉴스거리가 되었던 “유다복음서” 같은 경우도 그에 해당합니다.

나는 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이런 문서를 읽을 기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런 문서를 읽거나, “다빈치 코드” 같은 소설이나 영화를 보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가톨릭은 반대하지만 개신교인들 가운데 일부는 “다빈치 코드”를 소설이나 영화로 접하는 것이 유익할 수도 있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나에게 물을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말이지요.

2. 예수님 만나지 못한 사람들

예수님과 만남이 없는 사람들은 삶이 간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삶을 혼자 책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고 가는 짐이 많고 복잡합니다.

배낭을 보면 압니다. 혼자 가는 사람의 짐은 복잡합니다. 그러나 그룹을 지어 가는 사람은 간단합니다. 한 두 가지로 압축이 가능합니다.

내 생각은 이렇습니다. 이런 책이나 영화를 접하면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목회자 같이 전문가 외에는 그런데 신경 쓸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저것에 신경 쓰다 보면, 삶이 대단히 복잡해집니다.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사탄’은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부정적인 생각을 심어 넣습니다. “다빈치 코드” 같은 것은 사탄의 전략입니다.

성경은 한 번도 통독해 보지 못했으면서도, 이런 책이라면 흥미가 가고, 시작하면 끝까지 읽고 마는 성미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몇 가지로 “다빈치 코드”의 허점을 지적합니다. 댄 브라운은 “예수님은 그저 하나의 인간이었다. 그런데 그가 신적 존재로 인정된 것은 3세기, 325년의 니케아 회의 때였다.” 그렇게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1세기 때 기록된 신약성경은 이미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 자신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2세기 때 교부들의 글에도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신앙이 절대적이었습니다.

영지주의적인 가르침이 신약성경 시대에 이미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요한 1-3서, 유다서 등은 영지주의의 가르침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유다복음서는 이런 잘못된 가르침에서 나온 글입니다.

이제 이런 것이 글로 나오고 영화로 세상에 알려지고 있습니다. 좋은 현상입니까? 아니면 대단히 부정적인 현상입니까?

우리가 세상을 바로 이해하기만 하면 세상에 이런 것이 들어온다고 해서 크게 겁낼 것은 없습니다. 진리는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의 어린아이들이 자라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장해야 하는데, 새신자들이 미혹될 가능성이 언제라도 있습니다. 그래서 신경이 쓰입니다.

어떤 서점에서 일어난 대화 한 토막입니다.

A      이제부터 나는 예수를 인간으로 보기로 했습니다.
B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A      글쎄, 당신은 그렇게 주장하겠지요. 그렇지만 나는 예수를 인간으로 보는 것을 더 선호합니다.

여기서 A가 쓴 말은 “선호”(preference)였습니다. 이 시대는 선호에 대단히 민감합니다. 사람이 어떤 것을 선호하는 것은 말릴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진리는 선호 여부에 따라 변질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장’도 진리를 바꿀 수 없습니다. 진리는 ‘이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 만나기

문제는 우리 속에 있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수많은 소리가 있습니다. 이 소리 저 소리 다 들으며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전까지는 세상은 ‘혼돈’입니다. 섞여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섞여 있다고 해서 이것저것 다 괜찮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분간’해야 합니다. 어떤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어떤 것이 사탄의 유혹인지 가려낼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에 감동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속적인 것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가정 안에서 세속적 동기를 분간해 내야 합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성도는 거룩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전서의 메시지입니다. 사람이 정욕을 따라 살면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욕을 따라 시간 쓰고, 돈 쓰던 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는지 안 믿는지 분간을 하기 어렵게 살던 때가 있었습니다. 고통당하면서도, 분명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데, 그냥 절망하면서 살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나간 때가 족합니다. 다시 그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이런 인생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      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      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벧전 4:1-3

자꾸 자꾸 실수를 반복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그냥 ‘실수’가 아니라 영적인 실수, 즉 ‘죄’ 말입니다. 죄를 물마시듯 반복하는 것은 그 자체로 죽음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죽으리라!’는 선고를 받았는데, 죄에서 떠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몇 년을 더 산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이것 보십시오.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정결케 되어야 합니다. 거룩함에 속해야 합니다. ‘거룩함’은 무엇입니까?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 속함’입니다. 소속의식 문제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 이것이 거룩함입니다. 거룩함은 우리의 ‘생명’입니다. 이제 우리의 소속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사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 사랑에 거해야 합니다. 사탄의 손아귀에 있는 사람은 그 지혜와 능력과 젊음, 그리고 모든 좋은 기회가 다 사탄을 위해 사용됩니다.

아직도 세속적인 ‘관심’이 있습니까? 그 줄을 끊어내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이 단순해집니다. 행복합니다. 이것저적 복잡다단하게 얽매인 줄을 끊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 순결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회복한 순결을 지켜야 합니다.
세상에 대한 관심을 끊어내야 합니다.

‘나중에’ ‘언젠가’ 그렇게 하지!
그건 안 됩니다. 오늘, 바로 이 시간 우리는 세속의 줄을 끊어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책임 있는 생명을 살아간다면, 그것은 바로 ‘오늘’입니다. 여기입니다. 하나님의 전에서, 그 줄을 끊어야 합니다.

따라 합시다: “주여, 저를 거룩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사람 만들어 주시옵소서!”

4. 사탄의 전략

다빈치 코드가 인기가 높다는 것은, 그만큼 복잡하고 고단한 사람들이 세상에 많다는 뜻입니다.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사람들, 어디 들을만한 것이 없나, 찾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사탄의 전략에 말려든 사람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사탄에 사로잡힌 사람은 복잡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사탄은 “네 인생은 네가 책임져야 한다. 네 인생의 주인은 바로 너다!”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믿을 데가 없는 사람의 발걸음은 대단히 복잡합니다. 여기저기 우왕좌왕합니다.

우리도 그런 사람들 대열에 합류하여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은혜에 감동하고, 일생을 주님께 헌신하고 살겠다고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들과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세대를 불쌍하게 여겨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세대에 우리를 태어나게 하시고, 이런 혼돈의 와중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드려야 하겠습니다.

주중에 시내 나갔다가 버스에 붙은 광고를 보았습니다. 그 영화 소개하는 광고였습니다. 맨 위의 타이틀이 이랬습니다.: Seek the truth.

여러분은 진리를 찾으십니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는데, 여러분은 자유하십니까?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멀리 갈 것 없습니다. 오늘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아멘!

5. 믿음의 홀로서기

여러분 중에 아직도, “목사님. 그 영화 보라는 말입니까. 말라는 말입니까?”라는 물음을 가지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내 대답은 이렇습니다: “여러분, 믿음대로 하세요!” 목사가 여러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부모님이 붙들어주지 못합니다. 여러분 믿음대로 하십시오.

이 자리에서 “이 영화는 절대로 보아선 안 됩니다. 이 영화를 보는 사람은 금문교인 자격이 없습니다.” 그렿게 말해도 볼 사람은 다 봅니다. 그걸 어떻게 막습니까? 설령 오늘 내 말을 듣고 영화를 보지 않는다고 해도, 세상 살아가는 동안 수도없이 다가오는 시험과 유혹을 일일이 다 목사에게 물어 판단하겠습니까?

자기 자신이 막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분명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오늘 ‘다빈치 코드’를 활용해서 여러분의 영적인 자주(自主)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부모님에게서 난 금문인도 있습니다. 여러분 부모님의 돌봄과 간섭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렸을 때는 부모가 전부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그분들의 영향력이 감소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냥 걱정만 할뿐 더 이상 구체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는 부모도 많을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현실입니다.

그분들이 세상을 떠나도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크리스찬으로서 당당하게 서야 합니다. 그것이 그분들이 바라는 바입니다.

다만 나는 오늘 여러분이 영적 싸움에서 분명히 승리하고, 평강에 평강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여러분 스스로가 영적 분별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씀드립니다. 이것은 누가 시킨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믿음의 홀로서기에서 성공해야 합니다. 이것은 세상과 단절된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 모든 성도들과 ‘공조체제’를 유지하면서,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차원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기독교 신앙을 흔들고 우리의 영적 평강을 파괴하는 세력이 다빈치 코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말 빙산의 일각입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면, 온 세상 가득한 시험과 유혹이 우리를 날마다 넘어뜨리려고 애를 쓰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매일 접하는 인터넷,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샌프란시스코 거리, 여기저기에서 시험과 근심과 걱정의 뿌리를 날마다 순간마다 만날 수 있습니다. 절망할 이유는 어디고 있습니다. 일터에서, 거리에서, 심지어 가정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원수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두루 찾고 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벧전 5:8

오늘도 순간순간마다 마귀는 우리를 결정적으로 파괴시키고 넘어뜨리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안전한 것은, 그래도 주님의 전에 나아와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은 온전한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가 있다 없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 이제까지 내려주신 주님의 모든 것이 다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6. 예수님 이야기

우리 자신의 믿음이 굳건하게 서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지난 주일로 12년을 지났습니다. 권면의 말씀을 주신 어떤 목사님의 말씀대로, 열 두 개의 돌을 각 지파에서 가져다가 쌓아 제단을 만든 것처럼, 이제 12년의 세월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금문제단을 이렇게 쌓아 주셨습니다. 우리 스스로 보거나 남들이 볼 때, 별로 그렇게 심각하게 좋아 보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에게 영적인 도전장을 내밉니다. 이제부터 목사를 의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은 여러분이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여러분이 길러내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받아먹으려고 할 때는 지났습니다. 스스로 일어서십시오. 잠이 오지 않으면 그 자리에 꿇어앉아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말씀을 펼쳐 읽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스스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믿고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어제보다 오늘 더 큰 믿음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영적인 성숙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시대를 뒤흔드는 악한 영의 세력을 맞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면 분명히 패배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질 싸움을 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반드시 이겨야 하고 또 이겨야 합니다. 우리 대장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7. 결론

우리는 대장되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짐은 가벼울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것저것 걱정이 많은 마르다에게 “한 두 가지면 족하다!” 하신 주님을 기억하십니까? 우리가 실제로 해야 할 일들은 가짓수가 적습니다. 그걸 아셔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충성입니다.

이런 저런 세상 길에 있는 이야기는 귀를 기울일 가치가 없습니다. 그런 자리에 가 있는 것은 대단히 불편한 일입니다. 그런 데 왜 가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갈 곳이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기도
사랑하는 주님.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더욱 큰 믿음을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영적 싸움에 승리하는 용사 되게 하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조은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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