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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몸의 부활(3) :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고전 15: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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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데기 무덤 이야기>
서강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는 김열규 선생이 『한국인의 자서전』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신화나 전설, 역사 등을 분석해서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을 파헤쳐 보려고 한 역작입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공감할 수 있는 한국인의 집단 자서전을 써보려고 했던 시도이지요.

그런데 이 책의 맨 마지막 장은 한국인의 '죽음 의식'을 다루고 있습니다.
죽음에 얽힌 몇 가지 이야기들을 소개하는 중에 '번데기 무덤' 전설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의 시체를 나무줄기의 윗부분 혹은 굵다란 가지에다 매단 아기 무덤 이야기이지요.
여러분, 그런데 이 아기 무덤을 왜 번데기 무덤이라고 부를까요?

아주 멀지 않은 옛날, 깊고 외딴 어느 산골에 화전민 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한 늦가을에 어렵사리 얻은 아들이 두 돌도 채 못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자식 죽으면 어미 가슴에 묻는다."는 말도 있듯이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젊은 엄마는 남편과 함께 마치 옷이라도 갈아 입히듯이
아기의 작은 몸을 거죽에다가 꽁꽁 쌌습니다.
두 사람은 아기를 등에 업고서는 깊은 산으로 가 양지 바른 마루턱의 큰 나무를 골랐습니다.
굳세게 자라난 소나무를 찾아내 그 나무 중에서도
가장 굵고 튼실한 가지 하나를 점찍었습니다.

아내에게서 아기를 건네 받은 아버지는 아이를 등에 지고 그 높은 곳으로 올라갔습니다.
남편은 바로 거기에다가 아기를 매달았습니다.
어떤 비바람도 떨어뜨리지 못하도록 칭칭 옭아맸습니다.
그런데 그 모양이 영락없이 번데기 같았기에 아기 무덤은 번데기 무덤이 된 것이지요.

남편이 나무에서 내려오자 아내는 나무 밑동, 뿌리 근처에 소금을 뿌리고서는 축수했습니다.
"잘 자거라, 아가야!
겨울 가고 봄이 오거든, 번데기 아가야!
허물 벗고 훨훨 날아 오르렴.
한 마리, 큰 나비, 아름다운 꽃나비 되어서 날개 쳐 날아올라라.
그러곤 그 옛날 네 집으로 이 어미 찾아 와다오!"

드디어 겨울 가고 봄이 왔는데 이 부부가 사는 집에 커다란 나비 한 마리가 찾아왔습니다.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주 예쁜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봄이 다가도록 그 집 뜰에 심겨진 매화나무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비 유충이 성충이 되기 위해 일시적으로 깃들어 사는 집이 번데기가 아닙니까?
아무것도 없을 것만 같은 번데기 안에는 소리 없이 숨쉬는 나비의 유충이 있습니다.
겨울 내내 나무에 매달려 있다가 번데기는 마침내 껍질을 벗어 던집니다.
성충 나비가 되어서 하늘을 훨훨 날아 오르게 되는 것이지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두 살 박이 아들을 잃은 엄마가 번데기 무덤을 만든 것도
죽은 아들이 나비가 되어서라도 돌아오기를 바라는 눈물겨운 모정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번데기 무덤은 그 모양새가 어머니 젖가슴을 꼭 빼닮았다고 알려져 왔습니다.

지금은 시대 풍속이 많이 달라져 이런 일이 별로 없지만
제가 어렸을 때에는 참 많이 들어본 이야기입니다.
특히 어린 아이의 죽음에 대해서는 별의 별 이야기들이 다 있었습니다.
그만큼 죽은 아이를 잊지 못하는 부모님의 애절한 사연 때문이겠지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 우리가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될까요?
많은 사람들이 오로지 현세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현세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내세이기도 합니다. 
앞에서 번데기 무덤 이야기도 했지만
번데기에서 성충 나비가 나오는 것도 일종의 부활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따라 우리도 부활하게 된다면 도대체 어떤 모양으로 부활하게 될까요?
부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논점은 우리의 부활이 몸의 부활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몸의 부활이라는 것이 죽은 시체(CORPSE)가
다시 일어나 호흡하고 걷는, 그런 종류의 부활은 아닙니다.
또한 부활이라는 것이 몸은 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령(GHOST)같은 부활도 아닙니다.
분명히 우리의 현재적 몸의 상태와 연관성이 있기는 하지만
천사와 같이 전혀 다른 상태로 변형(TRANSFORMATION)되는 것이 기독교적 부활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
살아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대전제로부터 논증을 시작합니다.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일부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자기들의 미래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사람들을 향하여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장차 우리도 똑같은 방법으로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첫 열매라는 표현이 그렇지 않습니까?
이미 들판에 곡식이 무르익어 첫 번째 열매를 거두어들였다면
그것을 신호탄으로 해서 수많은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따라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자,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아담을 날카롭게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부활과 관련해서 이른바 대표성의 원리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요.

<대표성의 원리: 첫 사람 아담 對 둘째 사람 그리스도>
여러분, '대표성의 원리'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느 한 사람 때문에 다른 모든 사람의 운명이 결정될 뿐 아니라
어떤 결과에 대해서도 함께 연대 책임을 지게 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어떤 버스나 비행기를 탔다고 가정해봅시다.
그 버스의 운전사나 그 항공기의 기장은 모든 승객들을 대표합니다.
그 운전사와 기장의 어깨 위에 모든 승객들의 생명과 안전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운전사와 기장이 졸거나 실수라도 해서 사고가 일어나 죽게 된다면,
참으로 억울한 일이기는 하지만 바로 그 대표자들 때문에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대표성의 원리입니다.
내 뜻이나 내 자율성과는 상관없이 대표 한 사람 때문에
내 운명이 결정되어버리고 말 때가 있습니다!

인류의 운명도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첫 사람 아담과 둘째 사람 그리스도 안에서
온 인류의 운명이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롬 5: 12-21절에서 아담과 그리스도를 아주 날카롭게
비교하고 있는데 본문에서도 또다시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본문 21-22절 말씀을 보세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 온 것처럼,
이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의 부활도 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죽음을 가져다 준 그 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지요.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죄를 짓고 타락하는 바람에
온 인류가 원죄의 멍에를 메게되었고, 그 결과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온 인류의 대표자가 되어서 온 인류의 죄와 죽음을 몰고 왔다면
이제 그 해결책도 한 사람의 대표자에 달려 있습니다.

첫째 사람 아담이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죄와 죽음을 가져왔다면
둘째 사람 그리스도는 신앙과 순종으로 구원과 부활을 가져왔습니다!
그리하여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아직도 첫째 사람 아담 안에 있으면 그 결과는 언제나 죄와 죽음입니다.
그러나 둘째 사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 결과는 언제나 구원과 생명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더 이상 자연인의 상태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구원과 생명과 자유를 허락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그리스도를 따라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그 부활의 순서는 항상 정해져 있습니다.
23절을 보세요.
먼저는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 차례로 재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종말론적인 희망 속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와, 장차 그리스도처럼 부활하게 될
그리스도의 PAROUSIA, 즉 그리스도의 재림 사이의 중간 시대에 사는 존재들입니다.

<인류 최후의 적인 죽음을 극복하신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24-28절에서 바울 사도는 세상의 모든 통치(arche)와 권세(exousia)와 능력(dynamis)을
멸하시고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넘겨드린다고 했습니다!

아, 이 얼마나 위대한 말씀입니까?
이 세상의 통치와 권세와 능력이 아무리 위대하다고 해도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휴지조각처럼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만유의 주요 만왕의 왕으로서 온 우주만물을 통치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 이후와 예수님의 재림 사이에 끼여 사는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절대화해서 안 됩니다! 
그 어떤 막강한 통치도 부와 권세도 그 어떤 능력도 다 주님의 손안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제 이와 같이 이 세상의 원수들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두셔서
그리스도께서 통치하게 되실 때 마지막으로 정복해야 할 최후의 원수가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 26절을 보세요.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아, 이 말씀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바울 사도는 왜 맨 마지막으로 멸망 받을 원수가 죽음이라고 했을까요?
여러분, 죽음이 왜 인류 최후의 원수일까요?

김열규 교수는 앞에서 말씀드린 『한국인의 자서전』에서 
"죽음은 내 것이 분명한데도 내가 실제로 경험할 수 없는 것,
그래서 내 것이 아닌 것!"이라고 말합니다. 

옳습니다.
다른 사람이 다 죽는다는 사실에서 죽음은 분명 언젠가
나에게도 반드시 닥치고야 말 내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좀 죽기 전에 한 번 죽어봐서 경험을 해보면 죽음이 무엇인지 알겠는데,
진짜로 딱 한 번 죽기 전에는 경험할 수 없으니 죽음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저승이 멀다더니 대문 앞이 저승일세." 라는 말도 있듯이
죽음은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 코앞에 닥친 우리 자신의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음에 대하여 별로 의식하지 못한 채 하루 하루를 살아갑니다.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의 죽음을 접하고 장례식에 참석할 때에는
아주 예민하게 느끼다가 이내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고 맙니다.
여러분, 인간은 확실히 망각의 동물입니다.

아마 수많은 사실을 망각하고 살터인데 가장 자주 망각하는
한 가지의 사실은 "나 역시 언젠가는 죽는다!"는 진리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죽음이 왜 인류 최후의 적입니까?
죽음은 너무도 무섭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누리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이 있으면 뭐합니까?
아무리 높은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리면 뭐합니까?
아무리 사랑을 많이 받았으면 또 뭐합니까?
내 죽은 다음에 그 모든 부귀영화와 자랑과 세상 사랑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 1: 2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수많은 조객들이 찾아오고 수많은 사람들이 애도의 눈물을
흘린다고 할지라도 죽은 당사자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 죽음이 왜 무섭습니까?
이 세상에서 누리던 모든 것을 NOTHINGNESS, 무(無)로 돌릴 수 있기 때문에 무섭지요.
부귀영화도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도 이 세상에 누리던 일체의 것과
떨어져야 한다는 것 때문에 두려운 것이지요.

뿐만 아닙니다.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무섭습니다.
그 어떤 영웅호걸도 천하미인도 삼대독자 아니 칠대 독자도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두렵습니다.
"나는 죽음이 하나도 무섭지 않다."는 사람은 아마 참 말이 아닐 것입니다.
가끔가다가 순간 순간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 무섭게 따라 붙는 것이 죽음에 대한 공포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몸이 아무리 아파도 병원에 안 가는데
그 이유가 혹시라도 암이라는 진단이 나올까 두려워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지 않으려고 하는데 혹시라도 죽을까봐 염려가 돼서 그런 다는 것입니다.
실로 아담 이후 인류 최대의 적은 죽음이 틀림없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이 인류 최후의 공적(公敵)인 죽음을 누가 이겼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정복하셨습니다.
고전 15: 55의 외침처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하시면서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죽음을 정복한 종교가 기독교이기에 기독교는 매력적입니다.
불교에는 죽음만 있지 부활이 없습니다.
석가모니는 큰 도(道)를 깨친 인류의 스승이었지만 버섯을 잘못 먹고 식중독으로 죽었습니다.
유교의 공자님도 죽었을 뿐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위대한 철인 소크라테스도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죽음에 대한 의문만 남긴 채 죽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한 분 그리스도께서 인류 최후의 원수인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무덤을 자랑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도 "∼∼ 왕릉"해서 위대한 분들의 무덤을 잘 조성해서 관광지가 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무덤을 자랑하지만
우리 기독교는 빈 무덤을 자랑하는 종교입니다.
생명과 부활의 종교, 이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종교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십니까?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장차 일어나게 될
우리 자신의 부활의 보증수표가 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의 소망을 품고 최후의 원수인 죽음까지도 정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기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살기 위하여 죽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모두 오늘도 부활의 신앙과 소망 속에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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