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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스승주일] 스승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랍입니다 (갈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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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한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발전하고 진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와 같은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배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배움을 통해 도전받고 배움을 통해 도전받은 사실을 이루는 힘까지 부여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그 배움을 가능케 하는 선생님이 있다면 아주 유익할 것입니다. 더욱이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것은 그들이 소유한 문화유산을 후손에게 전달하여 계승, 발전시킨다는 것입니다. 인류문화 유산의 계승과 전달은 언제나 교육이라는 방법을 통해 이루어져 왔습니다. 이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먼저 선생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배울 학생이 있어야 하며, 또 선생과 학생이 배우고 가르치는 도구와 과정 즉 교육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요소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선생입니다. 선생이 없다면 학생도 있을 수 없고 교육과정 역시 선생에 의하여 선택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하건 원하지 않건 우리 삶에 여러 종류의 선생님들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축복 중에 아주 중요한 축복은 만남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부모를 만나고 친구를 만나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파트너를 만나게 됩니다. 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 능력이 없이 태어난 우리는 우리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배우게 되는 선생님을 도처에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 인생의 처음의 선생님은 아마 대부분 부모님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범위를 넓혀 우리에게 학교가 되었건 사회가 되었건 교회가 되었건 어떤 삶의 장면에서도 우리는 선생님들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부모를 잘 만나는 것도 축복이고 친구를 잘 만나는 것도 축복이고 삶의 업무 장면에서 동역자를 잘 만나는 것도 역시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삶의 테두리에서 근본 구조를 형성하는 기초 단계나 아니면 삶을 풍부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발전의 단계에서 우리를 감동시키고 삶의 발전과 진보를 자극 시켜줄 선생님을 만나는 것은 더 없이 큰 축복입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이만큼 된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와 그 은혜가 부모와 친구와 주변사람들과 우리를 가르쳐준 선생님을 통하여 삶의 기준과 판단능력을 키워준 것입니다.

아마 우리 마음에 내가 선생님으로 마음에 둘 수 있는 분이 단 한분이라도 계시다면 그는 훌륭한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정말 내가 존경할 만한 선생님이고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쳤다라고 생각하는 분이 한분도 계시지 않다면 우리 삶은 좀 빈천한 것이라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교회에서 스승의 주일로 지내게 됩니다. 교회 역시 성령께서 역사하시나 성령의 역사하시는 방법자체가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믿음을 전수하고 은혜를 이루는 방법을 채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선생님들을 향한 존경의 마음과 존중의 삶의 자세를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에서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가 존중 받아야하고 그분들을 통해서 우리는 영적 양식을 공급받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가르침을 받아 믿음의 길을 가게 됩니다.

나는 나 혼자 성경읽고 분명히 파악할 수 있고 결정하고 기도하고 모든 일을 진행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그 지경까지 이르도록 누군가가 우리들에게 가르침과 깨우침을 도와주셨기 때문에 그 지경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은 어느날 하늘에서부터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역자들, 주일학교 교사, 간사 혹은 구역장, 부부구역장 등 모든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을 존중해야하고 교회의 가르침과 전승이 아름답게 이루어져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특별히 갈라디아서 6장 6절을 가지고 같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와의 관계가 이미 주어진 것이고, 또 그 관계가 서로 기쁨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좋은 관계여야 하며 그와 같은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며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선생의 중요성, 스승의 중요성입니다. 누구든지 선생이 있는 사람, 스승이 있는 사람은 매우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가운데 그들의 삶이 영인되지만, 그들의 삶 가운데서도 가장 암흑기였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고 광야의 여정을 거치고 가나안 정복 전쟁을 마치게 된 이후에 이루어진 시기입니다. 즉, 사울이 왕으로 뽑혀지기 전까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이룬 시기를 우리는 사사기라고 합니다. 사사기는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가장 어려운 암흑의 시기였습니다. 왜 사사기가 암흑의 시기였는가 하면 여호수아와 생존한 장로들이 살아있었을 때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고 정복의 역사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호수아 생존 시의 장로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체험해서 알았기에 하나님을 섬겼지만 여호수아와 장로들이 하늘나라로 다 가버리고 이 땅에는 그의 후손들만 남아 있었을 때 그 후손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왜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하나님을 알았는데 그 손자나 아들은 하나님을 몰랐을까요? 아버지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았는데 아들은 몰랐다는 것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쳐 주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교육의 부재, 교육의 단절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사사기 2장 후반부를 보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배교하고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께 대하여 방자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징계를 내리십니다. 이방민족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칩니다. 그들은 속국이 되고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너무너무 괴로우니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셔서 어려움 가운데 방치해두지 않으시고 사사를 세워 민족을 규합시키고 이방민족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어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어려울 때 하나님께 호소하여 은혜를 입었던 이들이 금방 상태가 좋아지면 또 다시 하나님께 대하여 항거하고 배교하고 죄를 저지르고 우상을 섬깁니다. 그럼 그 때 또다시 하나님이 이방민족을 들어서 그들을 치면 이들은 고통 속에서 회개하고 괴로워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사사를 세워 이방민족들로부터 해방시켜 어려움을 면케 해주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반복된 역사, 인간의 죄악의 반복된 고리의 역사가 사사기이며, 사사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중 가장 암흑한 시대였음을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즉 교육의 단절, 교육의 부재, 선생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선생으로서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았던 하나님의 말씀 교육 부재 시대가 이스라엘에게 가장 큰 암흑의 시기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우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있거나 그리고 내 마음에 그 선생님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거나 내가 감동을 받고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축복의 사람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유다의 역사 지략을 보게 되면 왕에게 선생님이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가르치고 그들이 판단할 때 도움을 주는 선생님의 역할을 제대로 하게 될 때 그 왕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주의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그런데 그를 가르치던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지 못할 때 그 나라의 강성함은 사라지고 우상을 숭배하고 결과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징계를 받는 장면이 있게 됨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역대기하 24장을 보게 되면 7살에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오르게 되는 요아스라는 인물을 보게 됩니다. 요아스는 역사 속에서 안타깝게 그의 아버지는 요아스가 아직 어린 아이였을 때 죽게 됩니다. 요아스의 조모는 자신의 아들들까지 다 죽여가면서 자신이 왕위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를 사랑하는 고모가 요아스를 숨김으로 말미암아 7살까지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7살이 되었을 때 대제사장 여호야다를 중심으로 하여 요아스를 왕위에 봉해지게 됩니다. 그런데 역대하 24장 15절을 보면 여호야다가 나이가 많아 늙어서 130세에 죽게 됩니다. 여호야다가 세상에 있었을 때는 요아스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고 합니다. 여호야다는 어린 요아스를 왕으로 세우고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나라를 치리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여호야다가 자연적으로 나이가 들어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요아스는 혼자 남게 됩니다. 요아스는 유다 왕 중에서 비교적 선정을 베푼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가르치던 선생님인 여호야다가 없어지게 될 때 그는 또 다른 선생님을 맞아들이지 못했고 마침내 17절 이하를 보면 유다 방백들이 왕에게 와서 절하고 말할 때 그는 그 말을 듣게 되고 흔들리게 되며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김으로 이 죄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아스가 여호야다의 가르침을 받아 말씀대로 진행하고 실행할 때는 하나님께서 그를 승하게 하셨으나 그가 말씀의 가르침을 잃어버리고 그가 고통 속에 죄악과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배격할 때 이와같은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을 봅니다. 선생이 있음과 없음의 현격한 차이를 보게 됩니다.

역대하 26장 5절을 보게 되면 웃시야라는 왕이 있습니다. 웃시야에게도 그를 가르치는 스가랴라는 선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는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그를 형통하게 하셨다고 역대하 26장 5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웃시야가 심히 강성하여 이름이 변방까지 퍼졌습니다. 스가랴 선지자의 말에 따라서 이와 같은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스가랴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안타깝게 세상에서 없어지게 되고 웃시야는 지속적으로 강성하게 될 때 그 마음이 교만해졌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교화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마음이 교만해지니 악을 행하게 됩니다. 스가랴 선지자도 없고 다른 선생도 만나지 못하니 주 앞에 교만하여 범죄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향단에 분향하는 제사장의 권위까지 창탈하고 말았습니다. 웃시야는 자기 손의 향로를 가지고 향단에 분향하려 할 때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서 그에게 문둥병이 발하게 하셨습니다. 문둥병환자의 상태로 세상을 마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웃시야는 애굽 변방까지 이름을 떨치던 나라의 왕이었다가 그의 문둥병으로 말미암아 유다는 다 사그러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훌륭한 선생님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도 우리가 훌륭하게 되기 위하여 행하는 가장 당연한 행위입니다. 바른 교육이란 우리 삶의 윤택을 이루며 최고의 가치를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성도님들이 내시는 기도제목 중 “우리 아이가 새롭게 입학했는데 좋은 선생님을 만나게 해주십시오.”라는 문구를 보게 됩니다. 참 지혜로운 분이십니다. 우리가 학생에게 영향을 끼치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영향을 끼치고, 학교에서 선생님이, 교회에서는 주일학교 선생님이, 주변의 친구들이 영향을 끼칩니다. 학교에서 좋은 선생님을 만나게 되고 또 그 선생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로 말미암아 아이에게 영적인 좋은 영향력을 끼치고 이 아이가 삶의 규범과 올바른 준법, 바른 정의감을 가지고 자라게 된다면 얼마나 유익하겠습니까.

저도 아침에 아이들이 학교에 갈 때 제가 집에 있게 되면 꼭 신발신고 문 앞에서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매일매일 기도해줍니다. 좋아할 때도 있고 빠져나가고 싶어할 때도 있습니다. 간단하게 기도해줍니다.
“오늘 학교가면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선생님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또 학교친구들과 재미있게 잘 놀고 즐거운 학교생활이 되도록, 또 건강하고 하나님이 지켜주시도록”
간단하게 1분이면 됩니다. 이와같이 기도하며 보낼 때, ‘아, 이 아이가 학교에 가면 선생님에게 좋은 영향을 받고 마음속에 큰 교훈을 받아서 바른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부모의 마음일 것입니다. 우리 학부모님들, 성도님들도 그렇게 기도하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일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위해서 기도할 때, 그 자녀를 가르치는 선생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얼마나 당연하고 바른 일이겠습니까. 아마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성도님들은 자녀들 앞에서 교회에 대해 이야기할 때 굉장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자녀들이 있는데 교회 이야기를 하시려면 첫째, 교회의 목사님, 장로님, 집사님, 주변 분들에 대해서 얘기할 때 절대 그들을 욕해서는 안됩니다. ‘아, 목사님 오늘 설교 형편없더라, 그 장로님 인격자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이런 엉뚱한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 아이들은 ‘아, 목사님은 그런 분이구나, 장로님은 그런 분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절대 잘 배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성도들끼리 서로 욕하면 그 아이는 올바로 배울 수가 없게 됩니다. 아이들 앞에서는 절대 교회에서 어느 누구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긍정적으로 칭찬하고 좋게 이야기 하셔야만 합니다. 그래야 그 아이는 ‘아 교회 다니는 분들은 다 훌륭하구나. 내가 저런 훌륭한 분들의 가르침을 받고, 나도 예수 믿으면 저렇게 되겠지.’라는 마음을 주셔야 합니다. 만약에 마음에 속상한 일이 있으면 다 내보내고 방 안에 들어가서 혼자 이야기 하세요. 그러지 않으면 우리 자녀들은 망가집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혜로운 삶의 은혜를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내게 있어서 정말 좋은 영향을 끼치는 좋은 영적인 선생님, 혹은 내 삶에 있어서, 배움의 과정에 있어서 지금까지도 영향을 끼치는 좋은 선생님이 남아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선생을 둘 수 있는 행복한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겠습니까. 선생을 둘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내 마음에 ‘내가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이렇게 영향을 입고 지금 이러하다’라고 생각하면 하나님께 감사하셔야 합니다.


두 번째, 스승의 자리, 선생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존중을 받아야 합니다. 선생을 존경하는 것은 우리의 인격이며 우리 스스로를 위한 아주 중요한 결정입니다. 존중하고 존경하지 못하면 배울 수 없습니다. 내가 존경하고 존중하지 못하는 데 어떻게 배울 수 있겠습니까? 존경하고 존중하는 만큼 나는 감동받고, 우리의 배움이 커지고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선생님을 욕하는 것은 우리 삶의 초석을 스스로가 붕괴시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바로 선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를 가르칠 자가 없습니다. 자신을 가르칠 자가 없으면 추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현재가 최고의 정점에 있는 것이니 추락할 일만 남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은 끊임없이, 오늘도 내일도 끊임없이, 끊임없이 발전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지금이 가장 좋은 때가 아니라 지금부터 계속 더 좋은 때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당신을 가르칠 자가 없다.”라는 말을 듣는 사람입니다. 가르칠 자가 없으니 어떻게 배우겠습니까. 배움이 없으니 어떻게 진보하겠습니까. 우리는 세상 끝 날까지, 우리의 삶이 마치는 날까지 진보할 수 있는 믿음의 역사를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승을 욕하는 것은 우리 삶에 있어서 스스로를 붕괴시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8절을 보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라”라고 사도 바울이 빌립보교회를 향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왜 이러한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빌립보 교인들이 사도 바울에 대해서 전폭적인 신뢰를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전폭적인 신뢰를 주었다면 사도 바울은 굳이 이러한 구차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를 사모한다.”, “내가 이렇게 너희를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증하신다.”라고 말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볼 때 무언가 미진한 것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선생이 열정이 생기도록, 또한 마음을 합하여서 우리는 그것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마음이 아파 이와 같은 말을 열정을 가지고 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와 같은 상태를 파악하여, ‘아, 이런 말씀을 안해도 되도록 해야겠다.’라며 선생님들을 도와주셔야 합니다. 오늘 성경 갈라디아서 6장 6절을 보면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좋은 것을 함께한다는 것은 무엇이죠? 마음의 기쁨을 나누고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상대에게 좋은 것을 준다는 가장 첫 번째는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제대로 판단되지 않습니다. 밤새도록 고민하고 다음 날 아침에 결정하는 것은 거의 다 틀립니다. 밤새도록 고민했을 때는 바로 결정하지 말고 한 잠 주무셔서 피곤이 풀린 다음에 결정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정상적인 바른 판단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몸도 피곤하고 마음도 피곤하고 갈등과 여러 가지 마음의 흔들림 속에서 이것일까 저것일까 하다가 결국 그 상태에서는 좋은 결정을 내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저 여러분의 마음이 평안하여 지고 ‘어떤 결과가 나타나더라도 나는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결과에 대해서는 후회없다. 설혹 내게 손해를 끼치는 결과가 있다 해도 나는 그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으니 그것이 내 분깃이니 나는 감사히 받아들이겠다.’라고 생각할 때 결정을 내리면 그것이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결정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이와같이 우리의 삶에 균형을 이룰 수 있게 해야 합니다.

특별히 말씀을 가르치는 자에게 가장 좋은 것을 함께하는 것은 그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흔들리는 집안에서 어떻게 바른 일을 수행해 나가겠습니까? 마음에 평안을 주고 편안함을 주고 기쁨을 주고 감사함을 주는 일들이 있어야 합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물에 두 사람이 빠졌습니다. 한 사람은 아버지이고 한 사람은 랍비 즉 선생님입니다. 누구를 구해야 한다고 하죠? 랍비를 구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는 한 사람에게 유익하지만 랍비, 선생님은 여러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니 여러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와같이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나도 가르치고 다른 사람도 가르치고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기쁨과 용기가 솟도록 해드려야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을 함께 한다는 것은 마음에 기쁨을 주고 소망과 의욕을 주고 그것을 통하여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추구할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생님뿐 아니라 주변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바른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우리를 만나면 왠지 모르게 사람들이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를 만나면 왠지 모르게 마음에 기쁨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를 만나면 왠지 모르게 그 마음속에 감격이 있어서 무엇인가 한 번 해보아야겠다는 생각과 마음의 소망을 가져야 됩니다. 특별히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에게 이와같은 것들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은 모든 것을 한 마음 한 뜻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점차적으로 이 세상의 일들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점점 없어집니다. 모두가 교호작용에 의해서 서로를 돕고 마음을 합하여 각자의 부분을 감당함으로 그것이 조합되어 하나의 완성품을 이루는 삶이 되어갑니다. 그러므로 나 혼자 어떤 일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점차적으로 시들어져가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도울 수 있어야 하고 함께 할 수 있어야 하고, 우리는 그것을 통해 함께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말씀을 가르치는 자로서도 기쁘고 말씀을 배우는 자로서도 기쁘고 마음이 하나 되어 주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은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서로를 아끼고 존귀히 여기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1절을 보면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찌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많은 서신을 보면, 사도 바울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내용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사람들이 사도 바울에 대해서 믿지 않고 공격하고 또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사도권을 방호하고 그들에게 자기 자신의 정당성을 이야기하며 그들의 정당성이 받아들여진 상태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의 가르침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와같이 서로가 협력하는 마음이 있고 세워주는 마음이 있고 서로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서로를 애틋이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9절을 보면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가르치는 사람에게 협력을 구하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기도의 협력을 해주십시오. 그 때 내가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갈라디아 교회는 그렇게 성숙한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을 보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는 유명한 구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아직 구원의 문제조차 해결되지 않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기초적인 교리를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갈라디아 교회가 연약한 교회이지만 그들과 더불어 사도바울은 은혜의 역사를 이루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가 한 마음이 되어 주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일방적인 역사는 없습니다.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라는 것은 언제나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선생이 제자에게 배우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 후배에게 많은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가르침과 배움의 위치는 언제든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아니면 언제든지 그 시간에도 가르치는 것도 있지만 배우는 것도 있고, 그것을 통해서 마음이 합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것을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를 생각할 때 참 감사하고 마음이 기쁩니다. 왜냐하면 저희 교회 교인들은 대단히 신사적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인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말씀을 듣고 그런가 하여 묵상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1, 2주 정도 밖에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아주 뿌리가 약한 교회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에서 소식이 오니 데살로니가 전, 후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보고 기뻐한다. 그리고 너희의 좋은 소문이 각처에 퍼짐을 기뻐한다”고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복음을 전하다가 괴롭힘을 당하고 쫓겨난 곳이라서 늘 걱정하고 있는데 그 데살로니가 교회가 든든히 서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 마음에 감격하여 편지를 보냅니다. 그러니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을 보면 데살로니가가 처해있는 영적인 상황은 아주 어려웠습니다. 그만큼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괴롭히고 핍박했습니다. 심지어는 다른 곳으로 찾아와서 사도 바울을 돌로 쳐서 그가 시체처럼 내다버려진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뢰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니 그들은 매우 신사적이어서 말씀을 신중히 받고 ‘이것이 정말 그런가’하고 깊이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원했습니다. 그런 것처럼 저희 교회는 매우 신사적인 것 같습니다. 저희 교회 성도들은 매너가 좋은 것 같습니다. 제가 15년동안 한결같이 이야기해온 게 있습니다. 우리교회에서는 교만한 사람은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교회에는 교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논리적으로 맞죠? 우리교회에서는 교만한 사람은 사람도 아니니, 우리 교회 사람 중에는 교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성도들이 신사적이고 겸손하고 매우 헌신적입니다.

저는 저희교회 목사로서 이 교회에 있다는 것이 매우 행복합니다.
첫째는, 제가 우리 교인들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래서 제가 어디 가지도 않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 교인들도 목사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목사가 성도를 좋아할 수 있고 성도들이 목사를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세 번째는, 성도들끼리 매우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매너가 좋습니다. 정말 이와같은 교회에서 같이 믿음 생활을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작년으로 기억합니다. 응급실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제가 난감한 상황을 목격했습니다. 119구조대가 사람을 들것에 실어왔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곳에서 나오더니 난동을 부리는 것이었습니다. 119구조대에 계신 분들이 굉장히 수고 많이 하십니다. 그분들 아주 매너도 좋고 좋은 사람들입니다. 몇 번 그분들을 뵐 기회가 있었는데 그러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에서 명절 때가 되면 분당에 119구조대에 작은 선물, 하다못해 양말이라도 인사말과 더불어 작은 선물을 꼭 보냅니다. 정말 수고를 많이 하고 본인들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같은 지역사회의 교회인데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어야겠다 생각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어떤 사람을 실어왔는데 그 분이 만취상태였습니다. 누가 연락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들것에 실려왔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자기를 실어다 준 119구조대원들에게 욕을 하고 발길질을 했습니다. 속으로 ‘아니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나?’고 생각했습니다. 119구조대원이 잡으면 꼼짝도 못할 사람 같은데 난동을 부립니다. 그랬더니 그 분을 싣고 온 119구조대원들이 “갑시다.” 하고 실망해서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그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병원에서 술이 취해서 흐트러뜨리고, 심지어는 무엇을 깨뜨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손에서도 피가 줄줄 흘렀습니다. 그랬더니 병원에서 보안요원들이 나왔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붙잡아 갔으면 좋겠는데, 금방 붙잡아 가지는 않고 아주 극한적인 상황까지 가지 않도록 보고 있었습니다. 더 극한 상황이 닥치면 제압을 하겠지요. 이러저러한 행패를 부렸지만 그 손에서 피가 나서 의료진이 치료를 해드렸습니다. 치료하면서도 계속 소리지르셨습니다. 의료진이 붕대를 감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여기는 아픈 사람들이 다 오는 곳입니다.” 그리고 저는 제 볼일이 끝나서 나왔습니다.
제가 그 때 문득 교회를 생각했습니다. 교회는 사실 세상에서 다 상처받고, 마음에 위로받아야 하고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일주일 내내 살다보면 마음에 상처받고, 하기 싫은 소리 해야 하고 듣기 싫은 소리 들어야 합니다. 하기 싫은 소리 하는 것이 듣기 싫은 소리 듣는 것보다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수동적으로 힘든 것이 능동적으로 싫은 것 해야 하는 것보다 더 낫습니다.

제 방에 남자성도들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대부분 남자성도들이 찾아올 때는 굉장히 어려울 때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눈물을 많이 흘립니다. 그래서 휴지를 뽑아서 주는 것도 목사의 일 중 하나입니다. 남자성도들이 혼자 목사에게 찾아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때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정말 사는 게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와서 위로받고 마음에 쉼을 얻고 용기를 얻고 소망을 얻고, 정말 목마른 사람이 옹달샘에 와서 시원한 물을 마시고 다시금 새 힘을 얻어서 세상을 향해서 달려가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교회에 와서 그렇게 난동을 부린다거나 교회에 와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어지럽게 만든다면 그 사람과 똑같을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는 15년 지나오면서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렇게 평안히 지낸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이렇게 귀한 은혜 가운데 이렇게 편안하게 예배드리고 교회에 와서 어떠한 갈등구조가 없고, 기뻐하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요즘 세상의 교회들을 보면 교회 와서도 피곤하고 갈등하고 어려운 경우가 많은 것을 보면 정말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교회에 오면 적군이 아니라 모두 아군입니다. 다 우군입니다. 그러니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이테크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순수한 마음 가지고 위로하고 위로받고 다른 사람 감싸주고 정말 격려하고 그러므로 말미암아 힘을 얻고 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교회에서는 이러한 아름다운 역사들이 이루어져야 겠다 생각합니다. 그런 것들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도 교회는 바른 가르침, 바른 배움 서로 협력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은혜를 나누는 것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가르치는 자들의 영적인 권위가 있어야 하고, 배우는 사람들의 진정한 아낌과 사랑이 있어야 하고, 서로가 합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귀함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귀한 성도님들에게 스승의 주일을 맞이해서 말씀을 가르치는 모든 분들에게 기쁨을 함께 나누고 위로해드리는 은혜가 함께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최종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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