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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의 확신을 갖자 (요일 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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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웨슬리 회심주일입니다. 한 사람 웨슬리의 회심이 영국을 살렸고, 미국과 한국, 그리고 세계에 끼친 영향은 엄청납니다. 세계적으로 웨슬리안의 수가 3천만이 넘습니다. 그러나 그가 끼친 영향은 이 숫자적인 의미를 초월합니다. 그가 시작한 속회예배(구역예배)가 준 교회 부흥의 영향도 엄청납니다.

웨슬리는 목사의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도 목사였고, 아버지도 목사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청교도 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신학은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엘리트 목사였습니다. 선교의 열정을 가지고 미국 조지아주로 선교하러 갈 때였습니다. 폭풍을 만나 거의 죽을 고비를 넘기는 어려운 순간이 많았을 때 죽음의 두려움이 그를 엄습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동승했던 모라비안 26명은 자기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서로 손을 잡고 찬송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에는 죽음의 공포가 일절 없고 천국의 확신과 평화만이 있었습니다. 죽음을 찬송으로 맞이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웨슬리는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웨슬리는 모라비안들과 친숙해졌습니다. 그가 미국에서의 선교에 실패를 경험하고 영국에 돌아와 영적 침체를 경험하고 있을 때 찾은 곳이 바로 모라비안들의 모임이었습니다. 1738년 5월 24일 밤 올더스케이트에서 모이는 모라비안 형제단의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9시 15분전쯤에 어느 평신도가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을 일고 있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회중석에 앉아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웨슬리는 순간 가슴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했습니다. 전에 전혀 느끼지 못했던 영적 체험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자신의 구주라는 확신과 구원의 기쁨을 체험한 것입니다. 성령 세례를 체험한 것입니다. 그전에는 이런 성령 세례의 경험이 없이 목사, 교수, 선교사의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나약하고 고난에 쉽게 지고 마는 생명력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이 올더스케이트 체험을 하고 난 후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입니다. 설교에 확신이 넘쳤습니다. 은사와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큰 꿈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고 외쳤습니다. 88세까지 살면서 무려 4만 번 이상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도 이 구원의 확신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교인들이 이 구원의 확신이 없기 때문에 구원파의 유혹에 쉽게 넘어갑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해서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얼마동안은 잘 모르다가 의사가 “당신은 임신 했습니다”라고 진단을 해주면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있고, 영생의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잇고 하나님을 ale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그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한1서 5:11-12).” 영생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영생은 우리 ‘기분’에 있지 않습니다. 영생은 오직 생명의 근원이시며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는지, 직분이 무엇인지, 무슨 교파에 속해 있는지 상관치 않고 중요한 것은 지금 ‘내 안에 예수님이 있는가?’ 여부입니다. 예수님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예수님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ale지 않는 자에게는 영생이 없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에게는 구원이 있고, 거듭나지 못한 자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죄 사함과  영생은 모두 한 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믿든 안 믿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의 죄가 사함 받았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변치 않습니다. 마치 지구가 1초에 6만 6천 마일의 속도로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다는 천문학적 사실을 인정하든 안 하든 여전히 지구는 돌고 있습니다. 우리도 어린 아이들처럼 예수님을 모신 자는 영생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합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영생을 ‘주실’ 것이 아니라 이미 ‘주신’ 것입니다. 이 시제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한 선물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요즘 텔레비전 광고에서 생명보험을 들라고 야단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생명보험이 아니라 죽음보험입니다. 죽고 나서 타는 돈입니다. 중요한 것은 영생보험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영생보험에 들어있는 사람들입니다.

구약에서는 율법을 지켜야만 의인이 된다고 주로 강조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평생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을 하지만 어느 법에든 걸리게 마련입니다. 율법에서는 한 가지만 범해도 죄인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범하는 것은 하나에만 걸려도 전체에 걸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만을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도 항상 두려움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가끔 옷을 바꿔 입어 면허증 없이 차를 몰고 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엔 왜 그리 교통경찰이 많은지요? 보기만하면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그런 땐 교통경찰이 경례를 하는 것도 싫습니다. 제가 지금 강남경찰서 교경협의회 회장인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번 서초구에서 약국에 뭘 사러가느라 길에 차를 세웠는데 몇 만 원짜리  티켓을 받았습니다. 내가 강남경찰서 교경협의회 회장이라고 했더니 여기는 서초구라서 안 된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법을 어겼을 때 하나님은 두려운 하나님이 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항상 율법 아래 있었기 때문에 자유와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완전하게 의롭게 하기 위하여 그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게 하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구속의 은혜라고 합니다. ‘구속’이라는 단어는 종노릇에서 속량(贖良)했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집필하던 1세기 중반만 해도 노예제도가 성행하던 시대였습니다. 로마제국 어디서나 사람들은 노예를 사고팔 수 있었습니다. 누구든 원하기만 하면 노예의 몸값을 흥정해서 치르고 자기 소유로 삼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인은 노예를 원하는 대로 부릴 수 있었고, 심지어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주인이 자기 임의대로 자기 소유의 노예를 해방시켜 주기도 했는데 그때 사용되었던 용어가 ‘구속(Redemption)"입니다. 즉 ’구속‘은 노예의 몸값을 치르고 놓아주었다는 뜻으로 로마 시대에 흔히 사용되던 상업 용어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수속 받는다고 합니다. 즉 예수님은 죄에 종노릇하는 모든 인생을 당신의 보혈이라는 몸값을 치르고 속량해 자유케 하셨습니다. 당신의 십자가로 우리 모두를 죄와 죽음의 저주에서 해방시킨 것입니다. 죄의 심판과 정죄로부터 구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면 '칭의(Justification)'는 무엇입니까? ‘구속’이 로마 시대 노예시장에서 사용되던 상업 용어라면, ‘칭의’는 당시 로마 법정에서 사용되던 법률 용어였습니다. ‘칭의’, 즉 ‘의롭다 함을 얻다’는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현대의 정몽구 회장이 수감 중에 있습니다. 실정법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나올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권력자가, 대통령이 현대가 끼치는 경제적 영향을 참작하여 사면해주면 석방이 됩니다. 여러 가지 정상을 참작하여 판사가 ‘무죄(Not guilty)', '기각(Case dismissed)'이라고 하는 순간 석방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칭의‘의 진리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죽어 마땅한 죄인들이지만 대심판관이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무죄 판결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의 결과 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서물이라(엡 2:8).”

예수님은 철저히 은혜의 계산법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한번은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부자들은 많은 액수의 헌금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과부는 두 렙돈의 헌금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과부의 헌금을 칭찬했습니다. 제일 많은 헌금을 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안목에서 보면 예수님은 수확을 잘 못하셨던 것 같습니다. 분명히 부자가 많은 헌금을 했는데 말입니다. 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성경에 그 값이 기록되어 있는데 300데나리온이라고 했습니다. 대단한 돈입니다. 이것을 옆에서 지켜본 가롯 유다가 불평했습니다. 그 비싼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지 왜 허비하느냐? 어찌 보면 가롯 유다가 더 정의로운 것 같은데 그는 은혜의 계산법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는 아예 은혜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빈들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 많은 군중이 모였습니다. 남자만 대충 5천명이 모였습니다.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 보내려는 예수님의 말씀에 빌립이 나서서 말했습니다.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려면 최소한 200데나리온의 돈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당시 남자만 5천이면 남녀 모두 합하면 분명 만 명이 넘었을 것입니다. 당시엔 여자는 숫자 계산에 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어느 교회를 가든지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습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교회가 다 그렇습니다. 군인교회를 빼고는 다 여자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남녀가 같은 것으로 계산하면 만 명쯤 먹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한 사람에게 천원이 들었다면 만 명이 먹었으면 천 만 원이 됩니다. 200데나리온이 천 만 원이면 300데나리온이면 천 오백만원이 되는 셈입니다. 마리아는 천 오백만원이 나가는 옥합을 예수님께 드린 것입니다. 그녀는 은혜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일곱 귀신 들렸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더욱 예수님의 은혜를 알았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되었고,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선행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지만 구원의 결과로 나타나야 합니다. 구원파에 속한 사람들은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기에 앞으로도 무슨 죄를 지어도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율법 무용론과 행위 무용론을 주장합니다.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오해입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욕되게 하는 것(히6:6)이라고 분명히 성경은 말합니다. 웨슬리가 모라비안들에게 은혜를 받았지만 그들과 결별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믿음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율법 무용론이 나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웨슬리는 참으로 의롭게 살다갔습니다. 그는 거룩한 삶, 성결한 삶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교회가 좋은 건축업자를 만나 다음주부터 공사가 시작됩니다. 어느 교인이 기독교 텔레비전 방송을 듣다가 어느 목사님의 간증 속에 나오는 업자를 소개해서 연결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회사의 회장님은 신실한 교인이었습니다. 자기 회사 사원의 아들이 신장이 나빠 죽게 되었을 때 자기의 것을 하나 떼어 준분입니다. 이게 보통일이 아닙니다. 부부사이에서도 어렵습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도 힘듭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했습니다. 신문 기사에도 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함께 일하자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거저주시는 은혜입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기를 바랍니다. 구원의 기쁨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매일의 삶에서는 구원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웨슬리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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