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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이 무엇입니까? (시 9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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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 교습소 강사로 춤을 가르치던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가 춤을 가르치다가 잠시 쉬는 틈에 라디오를 듣게 되었는데 라디오에서 이런 말이 흘러 나왔습니다.

  “당신은 영원을 어디에서 보내시겠습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이 젊은 댄스 교습소 강사는 충격을 받습니다. ‘내가 이렇게 춤추고 가르치다가 영원을 어디에서 보내게 될까? 지옥일까 천국일까?’하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민하다가 결심한 바가 있어서 신학교에 입학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목회를 하는데 큰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전도폭발교재를 만들어서 보급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제임스 케네디라는 목사님이십니다. 그가 만든 전도폭발의 첫걸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당신이 오늘 밤에 죽는다면 천국에 가리란 확신이 있습니까? 당신이 만약 오늘밤에 이 세상을 떠난다면 천국에 가리라는 확신이 있습니까?”

  옆에 계신 분들에게 한번 물어보십시다. “당신은 영원을 어디서 보내실 겁니까?”

  하루살이가 따스한 햇볕 아래에서 나비와 함께 놀고 있었습니다. 오후에 해질녘이 되니 하루살이가 피곤해보였습니다. 나비가 말하기를 “하루살이야, 너 피곤해 보이니 내일 만나서 놀자.”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루살이가 “내일이 뭐야? 내일이란 걸 난 몰라.”하고 대답했습니다. 나비는 설명하기를 “해가 중천에 떠 있다가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지면 깜깜한 밤이 돼. 밤이 지나서 다시 동쪽으로 해가 떠오르면 그게 바로 내일이야.”하고 열심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다음날 나비는 하루살이를 기다렸지만 끝내 만나지 못했습니다. 하루살이의 인생이 거기서 끝나버렸으니 말입니다.
 
  나비가 ‘이제 누구하고 노나’ 심심하던 차에 제비를 불렀습니다. 둘이 재미있게 잘 놀았습니다. 가을이 되었습니다. 추위가 시작될 즈음에 제비가 말합니다. “난 이제 더 이상 놀 수 없어. 나는 가야돼. 우리 내년에 만나서 또 놀자.”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나비가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내년이 뭐야?”하고 물었더니 이제 제비가 설명합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지나면 또 봄이 오는 거야. 그게 내년이야.” 그런데 한 해만 사는 나비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다음에 약속한 장소에서 나비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70년~80년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80, 90에 인생이 끝나면 그 다음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 다음에는 영원한 삶, 영생이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절에 보니, “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라고 말씀합니다.
  지상에 있는 장막 집은 우리 육체의 집을 말합니다. 우리 육체는 시간이 지나면 노쇠해 지고 병들어갑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지으신 집,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 이하에서도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 있는 곳에 있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영원한 천국의 처소를 준비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윗의 시편 23편의 마지막 절은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피곤한 인생이 천국에 들어가서 여호와의 집에 들어가서 영원히 거한다고 다윗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많은 사람들은 삶이 바쁘고 피곤하기에 마치 하루살이가 내일을 모르듯이, 나비가 내년을 모르듯이 영원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영원 뭐 그런 게 어딨어! 하루 먹고 살기도 바쁜데...’ 미래에 대한 의식이 없이 무지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건강 강의로 유명한 연세대의 황수관 박사님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분은 장로님이십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강의하시는 것을 들어보니, 할머니들을 모아 놓고 강의를 하는데 “여러분, 건강하게 삽시다. 그러나 아무리 건강해도 우리는 아무리 건강해도 우리는 때가 되면 죽습니다. 우리는 죽으면 좋은 곳에 가야합니다. 여러분,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저와 같이 좋은 곳에 가기를 바랍니다. 자기는 15년 전에 좋은 곳을 발견해 놓았다고, 여러분들도 예수님을 믿으면 저처럼 좋은 곳에 갈 수 있습니다.” 라고 강의를 마쳤습니다. 역시 장로님다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의 삶이 우리 삶의 전부가 아닙니다. 이 땅의 삶은 영원한 삶에 비교하면 아주 짧은 정점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인생입니다. 구약성경 전도서 3장 11절에 보니,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인간들은 누구나 영원을 준비하게 되어 있고, 영원을 사모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서 심령을 더럽혀놓았기 때문에 영원에 대한 관심을 자꾸 잃어버리게 됩니다. 먹고 살고 입는데 관심이 있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기 때문에 사람들이 영원을 의식하지 못하고 삽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인생은 영원을 사모하는 인생이고 영원을 준비하는 인생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영원을 사모해야 할까요?

  첫째로, 인생은 짧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오늘 성경 9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아멘. 
  일식이라는 것은 순식간에, 눈 깜짝할 사이 입니다. 그 사이에 우리 인생이 다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만 해도 우리의 관심은 언제 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해도 시골에 극장이 하나 있었는데 극장에는 18세 이상만 들어갑니다. 어린 저는 종종 아버지 빽으로 들어갈 때도 있었지만, 들어가고 싶은데 갈 수 없는 것이 늘 불만이었습니다. 빨리 커서 극장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세월이 너무 빨라서 좀 천천히 갔으면 좋겠습니다. 살면서 느끼는 것은 시간이 참 빠르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빠를 뿐만 아니라 참 짧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5절과, 6절을 읽겠습니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 아멘. 
  일장춘몽이란 말이 있습니다. 점심 먹고 졸려서 자기도 모르게 잠깐 잠들었다 깨고 나니 어린아이가 흰 머리 성성한 어른으로 자라있더라는 얘기입니다. 인생은 참 짧기만 합니다.  또 아침에 돋는 풀과 같습니다. 아침에 풀이 돋아서 저녁에 사그러드는 풀과 같은 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은 그처럼 짧습니다.

  언젠가 주부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를 들었는데, 어떤 통계에 의하면 20년 후에는 영국 자산의 60%를 여성들이 다 가지게 된다는 통계였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결혼해서 살다 보면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기가 쉽답니다.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8년에서 15년까지 먼저 세상을 떠나는데 부인들은 남편이 물려준 유산을 다 물려받고, 연금 받다 죽으면 그 연금도 부인들에게로 다 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부인들은 쓰고 싶은 대로 쓰고 경영도 하고 회사의 사장도 되서 여성들에게 자산의 60%가 넘어갈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 강사의 얘기가 “아니 8년이나 5년쯤 먼저 가는 사람에게 재산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오래 사는 우리가 맡아야지!”하고 얘기하더라구요. 여러분, 인생은 짧은데 남자들의 인생은 더 짧습니다. 남자분들은 더 시간을 아끼셔야 합니다. 인생은 짧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영원을 사모해야 합니다.

  두 번째, 왜 영원을 사모해야 할까요?

  인생은 빠르기 때문입니다.

  10절 말씀을 읽어 봅시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아멘.
  인생이 얼마나 빠르냐하면 날아갈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기를 “소년의 시간은 기어가는 시간이고, 젊은이의 시간은 걸어가는 시간이고, 장년의 시간은 달려가는 시간이고, 노년의 시간은 날아가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인생은 빠른데 세월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이 인간의 고민입니다.

  유행가 가사에도 괜찮은 것이 있습니다. 서유석씨가 지은 ‘가는 세월’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가는 세월 그 누구가 잡을 수가 있나요 흘러가는 시냇물을 막을 수가 있나요 아가들이 자라나서 어른이 되듯이 슬픔과 행복 속에 우리도 변했구료’라고 했습니다. 이것도 진리입니다. 가는 세월을 붙잡을 사람이 없습니다. 인생은 빠르기만 합니다. 빠르고 짧은 인생을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을 사모하고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왜 영원을 사모해야 할까요?

  인생은 수고와 슬픔뿐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하나님 없는 인생은 수고와 슬픔의 인생입니다. 오늘 성경 10절에 보니,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기쁜 일도 많지만 고통스럽고 괴롭고 아픈 일도 많습니다. 인생은 수고와 슬픔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인생을 ‘고해’라고 부릅니다. ‘고통의 바다’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47장 9절에 보니, 야곱이 바로에게 자신을 소개하기를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입니다. 내가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렇듯 우리 인생은 수고와 슬픔 뿐입니다.

  네 번째로 우리가 왜 영원을 사모해야 할까요?
 
  티끌로 돌아갈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아멘.
  우리는 결국 한줌의 흙으로 돌아갈 존재입니다. 인간의 범죄 이후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무서운 심판을 내리셨는데 그것이 흙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입니다.
  창세기 3장 19절에 보니,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흙으로 돌아갈 인생입니다. 옆의 분들에게 얘기해 주십시오. “당신도 흙으로 돌아갈 인생입니다. ” 우리는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영원히 살것처럼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우리 인생에도 종말의 때가 찾아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지만 인간은 유한합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지만 인간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시편 39편 6절 이하에 보니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짧고 빠르고 허무하고 티끌로 돌아갈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인생의 새로운 것을 열어갈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보니,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기록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운명이 바뀌고 팔자가 바뀌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점쟁이가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등록을 했는데 몇 년 지나 교회 집사가 되었답니다. 어떻게 점을 치던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이유가 간단했습니다. 사람들 점을 많이 쳐 주었고, 그 중엔 예수 믿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점괘대로 살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50세에 죽을 사람인데 70까지 살고, 30세에 사업이 망할 사람인데 안 망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유를 따져 봤더니 예수를 믿기 때문이더랍니다 복음의 능력은 믿음의 능력은 인생을 바꾸어 놓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주 받은 인생이었지만 그의 인생이 예수 안에서 바뀌는 것입니다. 축복의 생애가 되고 성공의 생애가 되고 구원의 생애가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에 이처럼 변화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우리가 영원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세 사람의 친구가 오랫동안 돈을 모아 일본 동경에 놀러갔답니다. 동경에 가니 너무 좋아서 이것저것 구경을 했습니다. 밤이 되어서 야경도 보고 호텔로 돌아왔더니, 그만 정전이 되어 엘리베이터가 가동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좋은 방으로 잡는다는 것이 지상 30층에 잡아놓았는데 이거 큰 일 났습니다. 난감해하는데 안내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 올라가기 힘드시면 로비에 간이침대를 마련해 드릴 테니 여기서 하룻밤을 주무시면 안 되겠냐고 묻더랍니다. 그러나 그들 생각엔 여기까지 와서 이런데서 잘 수는 없다 싶어 걸어서 올라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세 친구는 그냥 올라가면 지루할테니 각각 10층씩 나누어서 올라가면서 돌아가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처음 친구는 10층까지 올라가면서 동화 얘기도 하고, 귀신 얘기도 하고, 어렸을 때 들었던 얘기까지 동원해서 재미있게 들려주었습니다. 다른 친구는 11층에서 20층까지 올라가면서 인생을 살아오면서 즐거웠던 일, 행복했던 일을 주욱 이야기했습니다. 같이 가는 친구들은 ‘아.. 그런 일도 있었구나’하며 내 일처럼 기뻐하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마지막, 21층에서 30층을 올라가면서 마지막 친구는 인생의 힘들었던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병들었던 일, 사업에 실패했던 일들, 대학입시에 떨어져서 재수했던 일등을 이야기 하며 올라갔습니다. 마침내 30층에 도착했습니다. 이미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었고 몸은 얼마나 피곤한지 천근만근 이었습니다. 이제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잠이 들 요량으로 문을 어서 열라고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주머니를 뒤지는데, 아뿔싸! 뭐가 없습니까? 네. 열쇠가 없습니다. 열쇠를 안가지고 올라간 것입니다. 다시 30층을 내려가서 키 받아서 다시 올라가려면 이거 어디 할 노릇이겠습니까? 그 고생하면서 30층까지 올라갔는데 객실의 문을 열 수 없다니요. 얼마나 비참합니까?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힘들고 어렵게 70, 80의 인생을 살아오셨습니다.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서, 그들을 입히고 먹이느라고 먹을 것 입을 것 줄여가면서 자식들 위해서 헌신하셨습니다. 어려운 친척들 도와주느라고 허리띠를 졸라매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질병이 찾아와서 투병 생활도 했습니다. 참 인내하면서 살았습니다. 시부모님들 모시느라고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종말의 때에 열어야 할 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얼마나 비참한 인생이겠습니까?
  우리에게 아름답고 행복한, 영원한 인생이 준비되어 있는데 그것을 열 키가 없다면 얼마나 비참합니까?

  그 열쇠가 무엇입니까? 믿음의 열쇠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 예쑤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 믿음의 키가 필요합니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좋은 집에 살았느냐, 좋은 차를 탔느냐, 좋은 양복을 입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죽은 사람한테 아무리 좋은 관 쓰고 아무리 비싼 베 옷 입혀놓은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썩으면 다 똑같습니다. 아무리 일생을 수고하고 애써도, 영원을 준비하지 않은 인생이라면 가장 비참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원을 여는 키가 무엇입니까? 믿음의 키요 복음의 키입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말씀하기를,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하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이름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이 참 어리석습니다. 참 우리가 똑똑해보여도 작은 이익 때문에 의가 상하고, 형제도 왕래하지 않고, 부모 자식 간에 갈라서기도 합니다. 그 얼마의 이윤 때문 입니다. 우리 인간이 참 바보스럽습니다. 일생을 다 살고도 영원에 들어갈 수 있는 키를 준비하지 못했다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언젠가 신문을 봤더니 재미있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좀 나이가 든 어떤 도둑이 남의 빈 아파트를 털려고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밧줄을 준비해 자기 몸에 매고 밧줄을 옥상에 걸고 타고 내려왔습니다. 창문이 열린 집에 들어가 훔치려는데 창문이 열린 집은 없고, 이 도둑의 기력이 다했습니다. 더 내려갈 수도 없고 더 올라갈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밧줄에 하루종일 대롱대롱 매달려있다가 나중에는 떨어져 죽겠으니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살려달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보고 신고를 해서 소방차가 와서 구조했답니다. 어디로 갔겠습니까? 교도소로 갔겠지요. 여러분, 도둑질은 해야 하는데 힘이 부치니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어찌보면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열심히 살았지만 가야할 곳에 가지 못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인생입니까?

  어느 나라의 왕이 광대들을 좋아해서 자주 광대들을 불러 얘기도 듣고 춤과 노래를 시켰는데 한 광대가 아주 바보행세를 잘했습니다. 그래서 그 광대에게 “너는 우리나라에서 최고 바보다.” 하고서는 자기가 가진 지팡이를 주었습니다. 그리곤 “너보다 더 바보를 만나면 이 지팡이를 주어라.”하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왕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광대가 찾아왔습니다.
  “왕이시여, 이제 가실 때가 되었군요.”
  “그래. 이제 내가 병들어 죽게 되었네.”
  “그러면 갈 곳은 준비가 되셨나요?”
  “아니야. 갈 곳을 준비 못 했어. 어디로 가야할지 나도 모르겠어”
  그 때 광대가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바보군요.”하고는 그에게 지팡이를 넘겨주었다고 합니다. 열심히 살았고 땀 흘리며 살았지만 가야할 곳을 준비하지 못했다면 그것이 가장 비참한 인생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혼을 어디에서 보내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의 마지막을 어디에서 보내시겠습니까?
(이영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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