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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행복한 가정생활의 암호(엡 5: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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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계시는 하나님 

오늘 내가 나를 슬프게 한 일들,

꽃밭을 그냥 지나쳐 왔고, 새소리에 무심히 응대하지 않았고, 밤하늘의 별들을 세어 보지 못했네. 

목욕하면서 노래는 하지 않고 미운 사람을 생각했으며 좋아 죽겠는데도 체면 때문에 환호하지 않았네. 

나오면서 친구의 신발을 챙겨 주지 못했고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잊은 시간이 있었네.  -정채봉 -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잊을 만큼 우리는 너무나 바쁜 것 같습니다. 바빠서 주변사람들에게 인격적으로 대우를 못해줄 때도 있고 가장 가까운 사람을 멀게 느끼도록 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잠시라도 묵상을 하면 어느 순간에 그분께로부터 오는 힘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내가 힘들 때 지쳤다고 생각할 때 잠시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생각하면 그분께서 그때까지 기다리셨다가 여러분의 지친 마음에 시원한 그늘이 되어주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내가 힘들 때 지쳤다고 생각할 때 가장 가까운 사람, 가장 가까운 식구에게 의지해보세요. 큰 위로와 힘이 될 수 있습니다.

눈먼 최선은 최악을 낳는다

소와 사자가 있었습니다. 둘은 죽도록 사랑합니다. 둘은 혼인해 살게 됩니다. 둘은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합니다. 소가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풀을 날마다 사자에게 대접했습니다. 사자는 싫었지만 참습니다. 사자도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살코기를 날마다 소에게 대접했습니다. 소도 괴로웠지만 참았습니다. 참을성은 한계가 있습니다. 둘은 마주 앉아 얘기 합니다. 문제를 잘못 풀어 놓으면 큰 사건이 되고 맙니다. 소와 사자는 다툽니다. 끝내 헤어지고 맙니다. 헤어지며 서로에게 한 말 “난 최선을 다 했어”였습니다. 소가 소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고 사자가 사자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면 그들의 세상은 혼자 사는 무인도입니다. 소의 세상, 사자의 세상일 뿐입니다. 나 위주로 생각하는 최선, 상대를 못 보는 최선, 그 최선은 최선일수록 최악을 낳고 맙니다. 사랑한다고 말을 하지만 자기의 입장에서만 모든 것을 시도한다면 그것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가정의 달을 맞아 부부간에, 부모와 자녀 간에 심사숙고할만한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의 가정들이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가정이 큰 상처를 입고 살아가며 그러므로 결손 가정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해 주신 이 가정이 병들어가고 있는데 어떻게 병든 가정을 건강한 가정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사회도 아니고 대학도 아니고 바로 우리 교회입니다. 교회와 가정은 이웃 사촌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병든 가정을 우리 교회가 책임지고 치유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우리의 가정은 절대로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올바른 관계성을 가진 가정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 있는데 그것은 관계성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느냐 하면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관계,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이 관계성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 오셨는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를 믿을 때에 의롭게 된다는 것은 관계성이 바로 되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관계성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요, 두 번째로는 우리 가정과의 관계입니다. 가정은 어느 무엇보다도 관계성이 가장 잘 정립되어 있는 곳입니다. 가정의 사랑의 관계, 신뢰의 관계, 행복의 관계, 우리의 삶의 성취의 관계, 기쁨의 관계 등 우리 가정은 관계성을 통해서 존재성이 달라집니다.

남녀가 서로 결혼했을 때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는데 남편이라는 존재가 되고, 아내라는 존재가 됩니다. 자식을 낳게 되면 그 순간에 나는 새로운 존재가 되는데 아이의 아버지 또는 어머니가 되는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관계성 때문입니다. 손자를 낳으면 그 순간에 금방 머리가 하얗게 세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손자가 이 땅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나는 할아버지 또는 할머니라는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은 관계성 때문입니다. 그런데 관계성이 가장 건실하게 이루어지는 곳이 가정이요, 이 관계가 올바르게 정립되었을 때 우리의 가정은 건강한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22절에 보면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을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에 구주시니라" 그 다음에는 25절에 보면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하고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희생하신 것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사랑이라는 말은 우리가 육체적인 에로스의 사랑이 아니라 아가페의 사랑, 무조건적인 희생적인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고 그를 보호하고 양육하라 하는 책임을 우리 남편들에게 주었습니다. 혹 여자에 대해서 아내에 대해서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 단어가 거슬리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남편이 여자의 머리가 될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서 설명합니다. 모든 기관에는 머리가 있습니다. 나라에는 대통령이라는 머리가, 학교에는 교장선생님, 대학에는 총장, 회사에는 회장이 있습니다. 교회에는 담임목사라는 머리가 있습니다. 어느 조직체이든, 어느 공동체이든 그 속에 머리가 있습니다. 그 분이 우리보다 더 뛰어나고 특별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유기체 속에는 책임질만한 머리가 있어야 되는데 우리 가정에 머리가 누구냐 하면, 남편 되는 사람이 가정의 머리가 되고 가정을 인도해 갈 책임이 있다는 뜻입니다. 여자가 열등하거나 가치가 덜하거나 능력이 부족하거나 그래서가 아니라 이 가정이라는 유기체를 책임지기 위해서는 역할분담을 해야 되고 기능적인 면에서 질서가 있어야 되겠기에 남편더러 이 가정에 머리가 되고 아내의 머리가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지 이미 결혼하게 되면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됩니다. 이것이 가정입니다. 둘이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가정이고 이 신비를 바울이 여기에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조직이나 기관에 머리가 둘 있다고 하면 이것은 머리를 둘 가지고 있는 아주 괴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우리에게 이 가정의 머리 아내의 머리는 남편이 되고 그리고 모든 질서를 잡기 위해서 복종하여야 되는데 21절에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서로 복종하라고 말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서로 복종해야 되고 그리고 가정의 책임을 주인이 되는 남편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질서를 잡아야 된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아내의 머리가 되고 복종하라는 말을 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는데 아가페의 사랑이 됩니다.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자신의 목숨을 바칠 정도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보호자가 되고, 그를 양육하고 돌보는 책임이 남자에게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올바른 관계가 바로 될 때에 이 가정은 건강한 가정이 됩니다. 이 관계성이 깨지거나 잘못될 것 같으면 영적인 생활에도 상처가 오고 기도도 제대로 안되고 가정의 평화를 파괴하고 화목한 가정이 되지 못하고 때로는 결손가정이 되었을 때 바울의 얘기에 대해서 온당치 않다고 편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른 관계를 가지는 가정이 건강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협동성과 역할 분담이 잘 된 가정

가정은 협동성과 역할분담이 잘되는 공동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기체라고 말합니다. 결혼하게 되면 서로 다른 인격체가 하나가 되는 신비스러운 체험을 합니다. 이것은 둘이 아닙니다. 하나가 됩니다. 육체적으로 성적인 관계를 통해서 하나가 됩니다. 정신적으로 하나가 됩니다. 또 우리는 영적으로도 하나가 됩니다. "이 비밀이 크도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신비스러운 새로운 존재로 탄생됨을 말합니다. 한 몸이 된다는 말은 시멘트와 같이 된다는 말인데, 하나님께서 짝 지워주신 짝은 이 시멘트와 같이 딱 굳어집니다. 깰래야 깰 수 없도록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어찌 할 수 없느니라”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남편과 아내 그리고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관계

남편과 아내가 하나가 되어서 가정을 이루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임재하셔서 우리 가정을 건강한 가정, 행복한 가정으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십니다.

어느 의사부부가 문제가 생겨서 상담을 하는데 부인이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목사님, 제 남편은 언제나 분석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제가 고민합니다." 분석적으로만 본다는 것이지요, 왜 그랬을까? 그러니까 남편이 옆에서 듣다가 호소하기를 "내 아내는 언제나 저를 다른 남자와 비교해서 생각합니다." 가정에서 분석해 보고 분류해 보는 방법으로는 하나가 될 수가 없습니다. 역할분담을 잘해야 되고,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최초의 공동체가 가정입니다. 우리 예수님 이 땅에 오셔서 제일 많이 기사와 이적을 일으켜 주신 곳이 가정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갑자기 포도주가 뚝  떨어졌어요, 그때 우리 예수님께서는 물을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잘 이해해야 될 것 같습니다. 잔치 집에 온 손님들 잘 마시고 신나게 놀라고 물을 변하여 포도주 만든 것이 아닙니다. 신랑, 신부가 고통당하지 말라고, 망신당하지 말라고, 괴롭지 말라고, 즐거우라고, 행복 하라고, 멋지게 출발하라고, 포도주가 떨어진 가정에 혼인잔치 집에 물을 변하여 포도주로 만들어 주신 줄 압니다.

음과 양은 서로의 존립기반이다

동양철학에서는 남녀관계를 음양 관계로 표현하고 또한 부부관계를 음양 관계의 원리로 설명하는데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음과 양의 관계는 서로 정 반대로 달려가는 모순관계가 아닙니다. 음과 양의 관계는 서로의 차이를 인식하지만 서로를 배척하지는 않는 것은 음과 양은 서로의 존립기반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음양의 관계는 상대방을 자기의 주장에 따르도록 예속화시켜야 하는 모순의 관계가 아니고 서로의 위치를 인정하며 아름다운 모습으로 맞물려 있는 관계입니다. 부부가 서로를 예속화시키려고 시도하는 순간, 가정의 행복에 이상 신호가 발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내의 아픔 위에 가정의 행복이 이루어질 수 없고 남편의 아픔 위에 가정의 행복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두 마리 붕어가 한 조그마한 장소에 살고 있었는데 그 장소를 모두 혼자 독점하고 싶어 기운 센 붕어가 약한 것을 죽였습니다. 얼마 후 죽은 고기가 썩어 물이 독기로 가득 차 결국 기운 센 붕어도 죽고 말았습니다. 아내를 죽이면 남편도 죽고, 남편을 죽이면 아내도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부부들이‘상대방 비난하는 게임’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부부는 상대방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기려고 맘먹고 상대방에게 비난의 화살을 쏜다면 그 화살은 백발백중 상대방의 가슴을 아프게 만듭니다. 상대방을 아프게 할 때 순간적인 승리감은 있을지라도 결국 그것이 가정을 멍들게 하고 최후에는 자신을 멍들게 합니다. 그러므로 부부관계를 게임으로 만들지 말고 항상 무승부의 원리의 실천자가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다툼은 문제해결의 고동소리이다

결혼은 두 인격이 합쳐 무엇인가를 이루어 가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성취감과 행복감을 제공하게 됩니다. 그러나 "불행이라는 사자는 가장 행복한 순간을 노리고 스며든다" 는 말처럼 결혼을 통해 많은 사람들은 고뇌의 순간도 체험하게 됩니다. 에드윈 루이스 콜이 말한 것처럼 결혼이란 인생들로 하여금 이 지상에서 천국 혹은 지옥을 가장 가깝게 맛보게 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결혼 생활에서 사랑으로 친밀해진 순간은 천국과 같고, 다툼으로 얼룩진 순간은 지옥과 같습니다. 그러나 다툼으로 인하여 인생의 본줄기가 구부러지지 않고 화해를 통해 곧 친밀한 사랑을 회복시킨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행복한 가정생활의 암호는'함께'라는 말이라고 맥밀런이란 사람이 말했던 것처럼 무승부의 원리를 기반으로 하여 함께 동고동락하며 어려운 문제들을 헤쳐 나가는 부부들은 참으로 아름다운 부부입니다. 그러한 아름다운 부부관계를 이루어가는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늘 함께할 줄 아는 사람

성숙한 사람은 언제나‘함께’생각하고, '함께'를 빼버린 행복이란 상상하지 않는다. 함께 대화하려고 하며, 함께 고민하려고 하며, 함께 기뻐하려고 하고,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희망을 가지도록 한다.

‘함께'를 잃어버린‘나’의 행복과 성장이란 도무지 존재하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를 지으신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함께 슬픔을 느끼고 함께 행복을 느끼고. 함께 고마움을 느끼도록.

오늘도 함께하고 싶은 사람을 생각하고, 함께 기뻐할 사람을 찾고, 오늘도 함께 성공하고픈 사람을 만나고 싶다.

함께할 줄 아는 사람을 사귀고, 함께 시간을 낼 줄 아는 사람을 만나고, 함께 섬길 줄 아는 사람을 만나라.

함께 짐을 져줄 사람을 만나고, 함께 사막을 걸을 사람을 만나고, 함께 끝까지 동행할 사람을 찾고, 함께 땀을 흘리며 함께 소중한 것들을 공유할 사람을 만나라.  (서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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