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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네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눅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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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자녀를 위하여 울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I. 본문해설

예수님께서 유대에 올라가신 때는 유월절이었다. 유월절에 예수님을 죽이지 말자고 유대 지도자들은 여러 번 숙의하였다. 만약 예수님을 죽이면 추종하는 무리들이 민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어린양 예수님을 죽임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죄인을 죽이는 가장 가혹한 형벌이기 때문에, 그 사형 언도를 위해서는 재판이 필요했다. 그 누구도 예수님의 유죄를 입증하지 못했지만,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이라는 군중들의 고함소리에 압도당하였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자기의 정치적 입지에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무죄한 예수님에게 사형 언도를 내렸다.

II. 돌이키시는 예수님

A. 십자가의 길 가시며

먼저 사형 언도를 받은 예수님께서는 브라이도리온이라는 왕궁수비대의 뜰로 끌러가 생애에 다시없을 치욕스런 구타와 침 뱉음과 모욕을 당한다. 그리고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긴 다음, 홍포를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씌웠다. 그들이 예수님을 흉한 왕의 모습으로 꾸민 것은 그가 유대인의 왕으로 나셨다는 것을 조롱하기 위함이었다. 그다음 밤새 한숨도 못 주무신 예수님께서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다. 십자가형을 당하는 예수님을 구경하기 위해 수많은 인파들이 뒤따랐다. 그런데 그 무리 중에 슬피 우는 여인들이 있었다. 그녀들은 구경꾼들과는 달리, 그분을 사랑함으로 애처롭게 울고 있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그녀들을 보시기 위해 ‘돌이키셨다.’라고 전하고 있다. 따라오는 그녀들을 돌이켜서 보셨다는 것이다. 이 시점은 여느 때와 다른 극한의 고통의 상황이었다. 육신을 가진 예수님께서는 지칠 대로 지쳐서, 십자가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기에 구레네 시몬의 어깨에 십자가를 대신 지우고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언덕을 오르시던 길이었다. 자신의 몸을 가누기도 어려운 주님께서는 도대체 무슨 의도로 몸을 돌이키셨는가?

B. 말씀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밤새 사람들에게 수욕을 당하사 기진맥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에게 말씀하기 위해 돌이키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실 말씀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자신을 돌아보아도 할 말이 많은데, 우리의 안과 밖을 한 눈으로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하실 말씀이 많을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신 말씀은 많지만, 상대적으로 우리의 귀는 얼마나 둔한가? 그분은 우리를 감화하고 설복하셔서 듣게 만들려고 애쓰신다. 하나님께서는 때마다 시마다 경건서적, 설교, 교우들의 권면을 통해 자주 들려주시건만, 우리는 못 들었다고 말한다. 여러분 중에는 눈을 뜨고 자는 사람들이 있나요? 여러분이 눈을 뜨고 잔다면, 망막에 상이 맺힐까? 물론 물체의 상을 맺힌다. 그러나 대뇌의 해석의 작용이 멈춘다. 마찬가지로 예배 때 보긴 보고 듣긴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지성의 해석 작용이 멈춘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함을 치신들 들릴까!

C. 주님을 사랑하는 영혼

그러면 언제 하나님의 말씀이 잘 들리는 것일까?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가슴이 깊이, 깊이 들어와 박힌다. 찰스 해든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이 테버네클 교회에서 설교할 때, 철학자도 회심했다는 이례적인 기록이 있다. 그만큼 철학자의 회심은 어려운 것이다. 오늘 우리 교회 지체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철학과 교수였다. 이 철학자는 연신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간증을 했다. 작년 성탄절 이브날, 여느 해와 다름없이 친구들과 어울려 곤드레만드레 취할 때까지 술판을 벌이고 성탄절 아침 겨우 일어나서 예배드리러 교회에 나왔는데, 돌연 섬광처럼 이 말씀이 자기 속으로 들어왔다고 말했다.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회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다른 때 같으면 설교를 들으면서 쿨쿨 잘 시간인데, 웬일인지 정신이 말똥말똥해져서 말씀이 들리는 것이었다. 자기 안에 뭔가 일어났는데 아직도 자기 지식으로는 도무지 해명이 안되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의 수많은 사람 중에 자기를 그토록 사랑하는지 알 수는 없으나 이제는 자기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간증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꽉 차있을 때, 비로소 주님의 말씀이 해석되어 들리기 시작한다.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당신의 음성을 들려주신다. 그래서 우리의 최고의 숙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일주일동안 어떻게 살다가 왔느냐가 주일날 주님의 말씀이 들리는지, 안들리는지 여부를 결정한다. 한주 내내 세속적인 것만 생각하느라고 영혼이 더렵혀진 채 예배를 드리면, 지성의 해석 작용을 멈추어서 눈은 뜨고 있으나 자는 것과 방불하다.

III.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이 여인들이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있었다. 도대체 그녀들은 누구를 위하여 애곡하고 있었을까? 그녀들은 예수님 때문에 슬피 울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녀들에게 하신 말씀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은 예루살렘 입성 때로 거슬러 올라가서 살펴보아야 한다. 그때 ‘호산나, 호산나’하며 창화하던 무리들은 이 세상 임금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육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을 재건하기 위해 오셨다. 예수님께서는 백성들의 환호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까이 오사 성을 보고 우시며 이르시되”(눅 20:41),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마 23:37-38)라고 말씀하셨다. 이 예언과 같이 BC 586년에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다. AD 70년에 티투스(Titus) 황제에 의해 예루살렘 거민들은 처참하게 살육당하고 유린당하여 성전은 그 자취마저 감추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항거했다. 그 당시 상황이 얼마나 끔찍스러웠는지, 일설에 의하면 아이까지 삶아 먹었다고 한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미리 보시며, “너희와 너희 자녀들이 심판당할 때가 이를 텐데, 너희는 그것을 위해서 울어야 한단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A. 참된 예수사랑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의미이다. “너희가 나를 향해 흘리는 눈물이 참된 사랑의 눈물이라면, 그 눈물 속에 너희 자신과 너희 자녀를 향한 눈물도 들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와 자녀들의 영혼을 위해 눈물 흘릴 수밖에 없다.” 우리가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이런 생각이 가슴에 밀려온다. ‘내가 이렇게 소중한 존재구나! 나는 나에게도 귀한 존재가 아니었는데,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다니……’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된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영혼을 사랑한다. 이것이 바로 교통적 사랑이다. 예전에는 자기사랑과 주님사랑이 상반되지만, 주님을 만난 이후에는 이 두 사랑이 합치된다. 그래서 너희가 나를 위해 흘리는 눈물이 참되다면, 너희 자신 및 너희 자녀를 위해 울어야 한다는 것이다.

B. 영혼을 위한 눈물

하나님을 사랑하면 다른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게 된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자기의 영혼 및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해 눈물 흘리는 법이 없다.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의 영혼이 아닌, 바로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지금 천진난만하게 뛰노는 저 아이들이 40년 후에 끔찍하게 죽임당할 때, 예루살렘의 딸들이 흘릴 눈물을 미리 내다 보시며 말씀하셨다.

여러분의 자녀를 위해 울어본 적 있나요? 우리는 가끔 육신적인 무정함을 가진 부모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만일 여러분이 아이들이 있는데, 가둬놓고 밥을 안준다면 그게 부모인가요? 그런데 여기서 묻고 싶은 질문은 여러분들이 아이들의 영혼을 이렇게 학대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중생은 육의 일이 아니고 영의 일임을 명심하라. 중생은 성령께서 하나님을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영혼들의 감각(sense)을 다시 살려주는 것이다. 중생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해주시고, 나의 영광되시고, 나를 살려 주셨다는 감각이 살아난다. 그런데 중생하지 못한 영혼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의 아름다움을 관상할 수 없다.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이 감각이 있나요? 그들은 거듭났나요?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회심하지 않으면 명백하게 지옥에 간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여러분의 자녀가 교회 다니고 안 다니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사활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들이 거듭났느냐하는 것이다. 모니카여사처럼 어거스틴을 위해 기도해도, 자녀가 오랜 세월동안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 삼는 것은, 여러분이 자녀를 위해 울어 본 적 있느냐하는 것이다. 키더민스터(Kidderminster) 교회의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 목사님은 자신의 회심이라는 저서에서 “회심하지 못한 사람의 영혼을 위해 울지 못하는 사람은 회심하지 못한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하물며 그 영혼이 여러분의 자식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라. 더군다나 여러분의 자식이 불신자와 결혼해서 낳은 손자, 손녀에게 예수님을 가르치겠는가? 기적을 바라지 말라. 기적은 여러분 한 사람만으로도 충분하다. 여러분이 여태껏 힘든 인생을 살아오면서 흘린 눈물을 여러분의 손자, 손녀에게 물려주려 하는가?

IV. 결론과 적용

여러분이 지금 자녀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우는 여인들에게 주님께서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말씀하셨다. 유아세례문답에서 부모는 “그대는 지금 완전히 이 아이를 하나님께 바치며,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친히 경건한 본분을 이 아이에게 보이기를 진력하며, 이 아이를 위하여 기도하며, 이 아이와 함께 기도하며, 우리 거룩한 종교의 도리를 가르치며, 하나님의 지시하신 모든 기관에서 진력하여 이 아이를 주의 양육과 교훈에서 자라게 하기를 서약하느뇨?”라는 물음에 “아멘.”이라고 화답한다. 부모된 여러분, 본분을 회피하지 말고 직면해 보세요. 특별히 기간을 정해 놓고 아이의 회심을 위해 금식하고 기도해 보신 적 있나요? 그래 본적 없는 메마른 눈에는 머지않아 쓰디쓴 눈물이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지금 여기서 자녀를 위해 우세요. 눈물이 안나오는 사람들은 먼저 자신의 영혼을 위해 우세요. 지금이 아니면 때늦은 회한의 눈물을 흘리게 되리니……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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