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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옥토에는 또 가라지가 (마 13:24-30,3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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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헤스라는 사람의 고백록이란 책이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헤스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사람을 정중하게 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간호사와 온순한 첫사랑을 했습니다. 가정에서는 훌륭한 아버지였고, 착한 남편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직무에 충실했고 술, 담배를 하지 않았습니다. 교양 수준도 높았습니다. 그의 고백록을 보면 그는 정신 이상자도, 성격 파탄자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평범한 인간이 유태인 살인공장 아우슈비츠 소장이었습니다. 그가 학살한 유태인의 수는 250 만 명이 넘습니다. 그는 가스 살상법을 개발해 효과적으로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수기의 끝에 자신은 악마가 아니었다고 적었습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인간이 그 같은 대량 학살을 해치웠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무섭습니다.

지난주에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념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광주 시민을 학살한 책임자 전두환 씨는 태평스럽게 골프를 즐겼습니다. 그리고 극동방송 50 돌 기념행사에 참석해서 축사를 했습니다. 그의 화려한 외출은 세간의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그는 정권을 잡고 권력을 누렸지만, 1997 년 대법원에서 반란죄와 내란죄가 확정되어 무기징역형과 추징금 2,205억 원을 선고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사면을 받았습니다. 또 그는 수중에 29 만원 밖에 없다며 추징금을 내지 않고 버티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국가로부터 받은 훈장들을 반납하라고 통고를 했지만 역시 버티고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엄청난 죄를 짓고도 모르는 척하는 것입니다. 이런 가라지들은 어떤 형벌이 합당할까요? 이 땅에서의 어떤 형벌도 이들이 지은 죄에 비하면 너무 약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의 심판을 하나님에게 맡겨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알곡과 가라지 비유입니다. 본문의 메시지는 가라지를 뽑지 말고 그냥 두라는 것입니다. 결국 추수할 때까지 두었다가 묶어서 불사른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씨 뿌리는 비유와 같이 해석이 나와 있습니다. 24 절부터 30 절까지는 알곡과 가라지 비유입니다. 그리고 36 절부터 43 절은 그 해석입니다.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고 했습니다. 농부는 밭에 좋은 씨가 뿌리고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 때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습니다.

싹이 나고 자라는데 가라지도 보입니다. 종들이 가라지를 뽑자고 했습니다. 주인은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을 뽑을까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었습니다. 결국 추수 때가 되었습니다. 주인은 추숫군들에게 가라지를 먼저 거두어 단으로 묶으라고 했습니다.

가라지는 불에 살라 버리게 됩니다. 곡식은 모아 곳간에 둔다고 했습니다.

이 알곡과 가라지 비유는 설명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무리를 떠나 집에 들어가시자 제자들이 여쭈었습니다. 아까 말씀하신 밭의 가라지 비유를 설명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예수님은 쾌히 해석해 주셨습니다.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 즉 예수님 자신이라고 했습니다.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입니다.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입니다.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입니다. 가라지를 거두어 불사르는 것은 세상 끝에 있을 심판입니다. 풀무 불에 던져지면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들은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알레고리라고 합니다. 뭐는 뭐다 하는 식의 이런 알레고리 해석법은 영적인 의미를 분명하게 해줍니다. 그래서 중세 시대 한 때는 성경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알레고리 해석방법은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맘대로 해석할 염려가 있습니다. 내가 영감을 받은 해석이라고 하면서 멋대로 뜻을 붙여버릴 수 있습니다. 이런 해석을 하면 말씀을 쪼갠다면서 인기를 얻습니다. 그러나 엉터리 해석인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이단들이 이런 해석을 많이 합니다. 요한계시록을 그런 식으로 해석합니다. 이런 해석에 현혹되지 말고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신학적 기초가 되지 않은 알레고리 해석은 위험합니다.

성경에서 알레고리 해석이 나온 곳은 바로 앞에 나온 씨 뿌리는 비유와 오늘 본문의 알곡과 가라지 비유뿐입니다. 이 두 가지 외에는 알레고리 해석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학계에서는 예수님이 직접 해석하신 이 두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되도록 알레고리 해석을 삼가고 있습니다.

자! 예수님이 풀어주신 알곡과 가라지 비유는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말씀을 믿고 따릅니다. 사람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를 시기합니다. 그래서 가짜 복음을 퍼뜨립니다. 그럴듯하게 꾸민 이 엉터리 복음은 진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아무리 믿어도 결실하지 못합니다. 추수 때가 되면 진짜와 가짜는 열매 때문에 확실히 구분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가라지가 자랄 때 좋은 곡식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입니다. 가라지는 일종의 잡초입니다. 모양이 곡식과 비슷합니다. 자랄 때 얼른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논에 벼가 자랄 때 벼와 비슷한 피도 자랍니다. 학생들이 여름 방학이 되면 농촌 봉사를 합니다. 논에 들어가 피를 뽑습니다. 그런데 구분을 잘 못하는 학생들이 벼를 뽑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걸 보는 농부는 속이 타들어 가겠지요.

가라지는 이렇게 곡식 흉내를 내면서 함께 자랍니다. 가라지는 열매를 맺을 때까지 구분이 안 됩니다. 씨의 모습도 비슷합니다. 줄기의 모습도 비슷합니다. 가라지는 발육이 좋아서 더 웃자랍니다. 곡식의 영양분을 빼앗아 먹고 자랍니다.

이것이 마귀의 모습입니다. 마귀는 곡식으로 위장합니다. 마귀는 언제나 모방입니다. 양의 가죽을 쓴 이리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천사와 같습니다. 가장 신앙적이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착한 척합니다. 순한 척합니다. 기도도 잘하고 찬양도 잘 합니다. 그러다 때가되면 사나운 이와 발톱을 드러냅니다. 마귀가 노리는 때는 방심하는 때입니다. 우리는 그럴듯한 자를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게 좋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마귀처럼 변할 때가 있습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발등을 찍힐 때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이런 가라지가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왜 진작 뽑아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요?

농부는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을 함께 뽑을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가라지는 자라면서 곡식의 뿌리와 엉켜있습니다. 그렇게 득세하면서 곡식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가라지는 올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죄의 올무입니다. 죄로 엮어서 우리를 꼼짝하지 못하게 합니다.

가라지는 우리를 못살게 괴롭힙니다. 그래서 뽑아 던지고 싶습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악을 없애고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런 권한이 없습니다.

심판은 오직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우리는 추숫군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심판자 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묵묵히 알곡을 맺는 것입니다. 가라지의 괴롭힘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디면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새신자들은 교회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모두 선하고 믿음이 좋은 줄로 압니다. 그러다가 정직하지 못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결국 단번에 실망하고 고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보고 낙심한 사람에게 쉽게 이야기 합니다. “교회 다녀도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사람을 보고 믿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믿으세요.” 이런 말은 참으로 책임 없는 말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답은 아닙니다.

믿음은 먼저 믿은 사람을 통해서 생깁니다. 먼저 믿은 사람들이 무책임하게 살면서 나를 본받지 말고 하늘만 보며 믿으라고 할 수 있습니까? 나의 부덕으로 인해 소자 한 명이 실족하면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도 분명히 가라지가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모릅니다. 겪어보면 가짜 믿음이 있습니다. 이 때 실망하지 마십시오. 가라지일 뿐입니다. 가라지에 주목하지 말고 알곡 신자를 바라보십시오. 교회에는 알곡 신자가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 가라지도 나름대로 필요합니다. 가라지가 있음으로 곡식이 오히려 강건해집니다. 긴장하기 때문입니다.

유다와 히스기야 왕 14 년에 위기가 닥쳤습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이 군사 185,000 명을 이끌고 쳐들어 온 것입니다. 산헤립은 제국을 세우려는 야망을 품고 주변 국가들을 점령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하나님을 모독하면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부수겠다고 협박을 했습니다.
히스기야는 즉시 성전에 올라가 산헤립의 편지를 펼쳤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 편지 좀 보십시오. 하나님의 명예가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유다를 구하시면 천하만국이 여호와는 한 분 하나님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히스기야 처럼 우리도 이런 위기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 그 위험을 말씀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결국 우리를 도우십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 왕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 산헤립의 진지를 치셨습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을 때 앗수르 진에서 군사 185,000 명이 다 송장이 되었습니다.

가라지의 위협은 우리의 신앙을 단련시킵니다. 그래서 가라지는 우리의 신앙을 단련시키는 하나님의 도구가 됩니다.

활어 양식업자들이 활어의 생존 기간을 늘이기 위해서 화학약품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인체에 해로워 단속을 합니다. 그래서 대신 천적을 함께 풀어 넣습니다. 그러면 물고기들이 긴장하기 때문에 운송 중에 죽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도 가라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언제나 긴장하고 있어야 합니다. 언제 가라지 씨를 뿌리고 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니 사람들이 잠잘 때 뿌리고 갔다고 했습니다. 마귀는 어둠의 시간에 활동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잠들어 있을 때 이런 해코지를 하고 갑니다.

성경은 언제나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이 닥칩니다. 여러분은 기도의 사명이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작은 시험거리에도 넘어집니다. 마음이 흔들립니다. 조금만 서운한 일이 생기면 아주 기분이 상합니다. 걷잡을 수 없이 경건의 도를 잃어버립니다. 서로 원망하게 되고 공동체의 사랑의 관계는 깨집니다.

지금 모든 것이 정상일까요? 우리 멋진교회는 평안합니까?

요즈음 나라가 어수선합니다. 특히 부동산 경기가 불투명합니다. 부동산 거품이 이제 꺼질 때가 되었다고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거품 이론은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합니다. 기름 값은 천정부지로 올라가고, 환율은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경제 위기가 닥치면 백성들은 또 얼마나 고생을 하겠습니까? 지금은 온 국민이 허리띠를 조르고 경계할 때입니다.

우리의 영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평안하다고 느낄 때 마귀는 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모릅니다. 가라지가 섞었어도 들레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마지막 때까지 차분히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알곡이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가라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진단해 보십시오. 알곡은 열매입니다. 내가 신앙생활의 열매를 맺고 있다면 나는 알곡입니다. 우리의 영적 열매는 복음입니다. 즉 다른 사람에게 영적 삶의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전도가 진행형입니까? 산삼을 캐고 있는 것입니까? 복음 전할 자를 찾고 있습니까?
열매에 무감각이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열매를 맺고자 원하는 사람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의 열매를 맺겠습니까? 그러면 당장 전도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에 민감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있다고 했습니다. 쓸모없는 나무로 여기고 찍어 불에 태운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아예 열매를 기대할 수 없는 가라지인 경우입니다. 가라지라면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가라지 때문에 방해를 받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열매가 있어도 쭉정이입니다. 이는 가라지의 훼방이 큽니다. 그래서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신앙이 자라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라지 핑계를 대고 있을 겁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쭉정이도 똑같이 불에 던져집니다.

지난번에 씨 뿌리는 비유 말씀을 보았습니다. 길가, 돌짝밭,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오직 옥토에 뿌려진 씨만 열매를 맺습니다. 100 배, 60 배, 30 배로 결실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옥토라고 언제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라지는 바로 옥토에서도 잘 자랍니다. 옥토에서는 가라지와 치열한 싸움을 벌여야 합니다. 가라지의 훼방을 이겨내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가라지 때문에 쭉정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선 옥토에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말씀을 경청해서 오래 간직합시다. 그리고 어떤 유혹과 훼방에도 꺾이지 말고 승리하십시다. (황금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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