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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 있는 자가 입은 은혜 (마 8: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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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체코 출신의 교육학자[존 아모스 코메니우스]라고 하는 사람이 그의 명저인<팜파디아(Pampaedia)>라고 하는 책에서 인간의 지식 형성 과정을 아주 쉽게 세 가지로 말했습니다.

먼저는 감각을 통해서 지식이 얻어진다고 했습니다. 센스가 있어야 올바른 지식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알게 되는 제 1통로가 감각입니다. 그래서 바로 보고 바로 듣고 바로 맛보고 바로 만지고 바로 느끼는 것이 정말로 중요합니다. 여러분, 똑바로 보지 못하면 지식도 빗나가게 됩니다. 남이 이야기 할 때 바로 듣지 못하면 혼자서 엉뚱한 짓을 합니다. 보는 감각, 듣는 감각, 느끼는 감각이 바로 되어야 바로 알게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감각해야만 바른 지식을 가질 수 있는 것이고 또 하나는 건강한 이성이 있어야 바른 지식을 얻게 됩니다. 이성이 병들면 안 됩니다. 이성을 통해서 우리는 이해하고 판단하고 비교하고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이해하게 되는데 이성 차체가 병들면 영 구제불능입니다. 건강한 이성으로 판단해야 되고 특별히 이성이 자유롭게 자기 기능을 다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바른 지식을 가질 수 있고 그 지식이 축적되었다가 다시 재현하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의 지식이 형성되는데 정말 중요한 것은 세 번째입니다. 그것은 바른 신앙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알아가는 데는 감각과 이성이 참으로 중요함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감각과 이성만으로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 보고 알 것도 아니고, 다 생각해서 알 것도 아닙니다. 그것 이상의 세계가 있습니다. 감각으로도 이성으로도 알아지지 않는 세계는 무엇으로 압니까? 이것은 믿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사랑을 보고 압니까? 아니면 사랑을 만진다고 압니까? 사랑을 아는 최고의 방법은 믿음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또 진리를 눈으로 봅니까? 진리를 만짐으로 압니까? 아닙니다. 진리는 믿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진리인데 이것은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창조할 때에 내가 존재했던 것도 아니고 또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계셨습니까? 안계셨습니까? 나는 만나본 일이 없지만, 사진 한 장도 없지만 믿습니다. 이것을 성경 히11장 3절에서 말합니다.“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천지를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그 진리를 우리는 믿음으로 안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바른 감각도 중요하고, 바른 이성도 중요합니다만 바른 믿음을 가져야 바른 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우리나라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소원합니다만 현실은 아직도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물론 믿음이라는 조건만 갖추어지면 언제든지 이 사람들도 천국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믿지 않는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그 하나는 무지입니다.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면 알아도 한참 잘못알고 있으면서도 도대체 깨달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 무지로 인하여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 그 두 번째는 교만입니다. 자기 능력으로도 충분히 세상은 살아지고 또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믿음의 필요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이 믿음이 없어서 올바른 지식을 가지지 못하고 진리를 깨닫지 못한 채 세상을 불행하게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보고 듣고 느끼기는 하지만 믿음이 없기에 바른 지식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한 가지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텔레비전 앞에 꼬마 형제를 앉히고 동시에 만화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형은 9살이고 동생은 5 살이었습니다. 형은 서투르나마 글을 읽을 수 있었고 동생은 글을 전혀  읽지 못했습니다. 그 만화는 외국 만화였기 때문에 형제는 둘 다 그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번역된 자막은 있었습니다. 약 20분이 흘렀습니다. 이 실험의 핵심은 두 어린이 중 누가 더 깊이 만화를 이해했는가를 측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는 물론 글을 읽을 수 있는 형이 그 내용을 더 잘 이해했으리라 예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 반대였습니다. 만화를 더 잘 이해한 사람은 다섯 살 난 동생이었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형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만화의 그림을 보랴 밑에 써 있는 자막을 읽으랴 그리고 그 둘을 연결시키랴 이 세 가지 일을 동시에 했던 관계로 만화를 단편적으로는 이해했으나 전체적인 이해는 오히려 부진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다섯 살 난 동생은 글을 읽을 줄 모르니까 자막 읽는 것을 처음부터 포기하고 오히려 만화 줄거리와 그림을 맞추어가며 그 리듬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실험에서 형이<보지만 보지 못하는>삶의 아이러니를 풍자하는 인물이라 한다면 동생은 읽지는 못해도 그 앞에 전개되는 줄거리를 관망할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지만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바로 믿음에 대해서 더 더욱이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다행히도 믿음을 가진 자들로 서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란 어떤 믿음이냐는 문제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행하시는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을 만큼의 훌륭한 믿음이라고 자신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만하며 칭찬받을 만한 믿음이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그런 믿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를 입을 만하며 칭찬을 받을 만하여 늘 기적을 볼 수 있는 믿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믿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본문의 한 사람에게서 이런 믿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자신의 하인이 병들어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주님께 간청하여 고침을 입게 하는 한 백부장의 믿음입니다. 왜 이 백부장의 믿음이 은혜를 입을 만한 믿음이었는지를 그의 사랑에서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그 당시의 하인이라고 하면 주인의 종이었습니다. 거의 노예와도 같은 신분입니다. 로마시대에 농사에 사용되는 도구가 세 가지 있었습니다. 그 하나가 말못하는 도구인 가축입니다. 그 둘은 무생물의 도구인 운반기구요, 그 세 번째가 바로 말하는 도구인 종입니다. 이렇듯 노예를 도구의 하나로 생각할 만큼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던 시대에 로마의 고급 장교인 백부장은 참으로 위대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참 사랑은 누구의 마음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의 요구에 오늘 주님은“내가 가서 고쳐주마”라고 적극적으로 응답하실 만큼 백부장의 종을 사랑하는 마음이 컸습니다. 원문을 보면“당장 가서 고쳐 주겠다.”는 뜻입니다. 사실은 예수님께서 직접가시지 않아도 될 일입니다. 데리고 오라고 하시거나 어떻게 하라고 일러도 얼마든지 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직접 가셔서 고쳐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사랑을 보시고 마음을 내 놓으셨습니다.

결국 이 백부장의 사랑은 그로 하여금 주님께 겸손한 믿음으로 서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부탁을 듣고 직접가시겠다고 하실 때에 이 백부장이 뭐라고 합니까? 8절입니다.“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라고 하면서 극구 사양을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 같았으면 얼른 오시라고 할 텐데 사양합니다. 그런데 그 동기가 너무 아름답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풍습에 의하면 이방인인 백부장의 집에 예수님이 들어가면 틀림없이 비난받을 일이었습니다. 세리의 집에 들어가신 일로 예수님이 세리의 친구라는 비난을 받았던 일이 있지 않습니까? 그 사실을 백부장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나야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입니다만 주님을 위해서는 안 그러는 것이 좋겠습니다.’하는 귀중한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의 영적 겸손이 강하게 나타나는 부분입니다. 외적으로 보자면 로마 장교인 백부장의 집이 얼마나 화려하고 훌륭한 집이었겠습니까? 결코 손님을 모시지 못할 정도의 누추한 집이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 오심을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말은 무슨 말이겠습니까? 영적으로 볼 때 형편없이 초라한 자기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고귀한 인격과 마음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세상 적으로야 많은 것을 갖추고 있지만 신앙적으로 볼 때는 자신의 부족함이 너무 크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훌륭한 인격자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가진 것으로 내 신앙까지 평가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세상은 가진 것으로 존경 받으려 하고, 가진 것으로 힘을 삼으려고 하는데 오늘 이 백부장의 모습은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겸손한 이 믿음이 은혜를 입게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에게는 말씀의 능력을 전적으로 믿는 믿음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말씀 이상의 능력은 없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심방도 필요하고, 인수기도도 필요하고, 산상기도도 필요한 것입니다만 그러나 이 보다 우선 되는 것은 말씀입니다. 간혹 보면 은사다 은혜다 하여 기도원마다 부흥회마다 좆아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바른 성도라면 오직 내 교회에서 들려지는 말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새벽예배, 수요예배, 구역예배, 주일예배만 빠짐없이 나와 들려지는 말씀을 듣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오늘 백부장이 바로 이런 믿음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순종의 다짐까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들어보고 순종하겠다는 자세가 아닙니다.“병이 나을 것이다.”라는 약속을 해달라고 떼를 쓰는 것도 아닙니다. 데려오라 하시면 업어서라도 데려오겠다는 생각입니다. 9절을 보면 자신의 힘만으로 모자라면 수하에 있는 사람까지 동원하겠다고 합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과 방법을 동원해서 순종하리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는 믿음입니까? 이제 그를 칭찬합니다.10절입니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다만 말씀대로만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이 은혜를 입을 수 있는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만약에 이 백부장에게 믿음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믿은 대로, 곧 믿는 만큼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100%의 믿음이 있으면 100%의 은혜가 있을 것이요, 50%의 믿음이면 50%의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믿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위대한 믿음, 큰 믿음으로 예수님께로부터 칭찬을 들을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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