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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롬 5: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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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5:8)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으로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롬 5:9)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e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
(롬 5:10)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로 있을 때에도 그분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에 와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
(롬 5:11)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지금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홍수가 나면 제일 흔한 것이 물입니다. 온 천지가 물입니다. 그런데 홍수가 나면 제일 얻기 힘든 것, 제일 귀한 것도 물입니다. 마실 물을 구하기가 정말 힘듭니다. 뿐만아니라 씻을 물을 구하기도 어렵습니다. 온 천지가 물인데 정작 내가 필요한 물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가히 사랑의 홍수시대라고 할만 합니다. TV를 틀어 보면 사랑을 주제로 한 드라마가 대부분입니다. 음악을 들어도 사랑을 소재로 한 음악천지입니다. 영화를 보아도 연극을 관람해 보아도 모두가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온 천지가 사랑을 말하고 있고 사랑을 그리고 있으며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병들어 가고, 외로워서 못 견디고, 등을 돌리고 갈라지고, 피 흘리고 싸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을 받지 못해서 입니다. 사랑의 고갈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 세상입니까? 온 세상에 사랑의 단어가 넘쳐 나는데 아직도 세상이 찾고 있는 것은 사랑입니다. 모두가 사랑에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대부분의 사람은 아직도 진정한 사랑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인줄 알고 기뻐했는데 얼마 안가서 시들고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참사랑을 얻었다고 좋아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기적인 목적이 숨어있는 가식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진짜 사랑이라고 믿고 마음을 빼앗겼는데 조건적인 사랑인지라 조건이 사라지니 사랑도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여러번 사랑에 속다보니 사람들은 사랑을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랑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진짜 사랑이 있습니다. 영원히 변질되지 않는 사랑, 조건적이거나 결코 이기적이지 않은 순수한 사랑이 있습니다. 모든 갈증을 해소시켜 줄 큰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을 만나면 외로움도, 두려움도, 불행도 다 사라집니다. 이 사랑에 눈을 뜨면 아무리 나쁜 사람도 선하게 변화됩니다. 이 사랑을 얻으면 어떤 큰 문제를 만나 절망하던 사람도 새 희망이 솟아나고 삶의 의욕을 얻게 됩니다.
그 사랑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죽음으로 증명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랑의 행동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로 인해 우리가 믿음으로 속죄함을 입게 되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 8절에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을 증명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증명하려고 많은 시간을 투자합니다. 사랑을 증명하려고 좋아할만한 선물을 하거나 값비싼 반지를 준비하여 사랑을 고백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그분의 사랑을 확실하게 믿을 수 있도록 아들을 이 땅에 보내주셨고 그분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음을 통해 사랑을 증명하셨습니다. 말을 가지고도 물질을 가지고도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데 하물며 죽음으로 사랑을 증명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랑은 얼마나 진실한 것이겠습니까?

1.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죄를 속하는 능력입니다.(8)

속죄란 죄를 용서받는 것, 죄의 대가를 면제받는 것을 뜻합니다. 속죄를 통해서 죄가 사라지고 깨끗해진 사람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죄인은 결코 거륵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죄 용서함을 받아 의롭게 된 자만이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속죄의 제사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제사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제사장이 매일 제사를 드리지만, 죄를 온전히 없애지는 못합니다(히 10:11).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드렸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 36)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 양처럼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한 희생 제물이었음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처럼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는 능력입니다. 희생제물로 자신을 드린다는 것은 목숨을 다해 사랑하지 않고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이 자신의 몸으로 드리신 속죄제물이 모든 사람의 죄를 단번에 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능력은 영원합니다(히 10:12,14).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인도인을 구원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던 터커에게 힌두교 승려가 찾아와 자꾸 논쟁을 걸어왔습니다. 그는 승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종입니다. 논쟁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가지 그대에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그대는 하루에 도대체 몇 번 정도 죄를 범합니까?"

승려는 "글쎄요."라고 한마디 말한 채 잠시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다시 물었습니다. "하루에 다섯 번 정도입니까?" 승려가 대답했습니다.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열 번 정도입니까?" "아니 그보다는 많겠지요." "그러면 50번 정도입니까?" "그렇게 많이 범한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데요." 이 말을 들은 터커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승려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10번 정도 죄를 진다고 가정합시다. 그리고 30년을 사람의 일생으로 칩시다. 그러면 사람이 일생 동안 10만 번 가까이 죄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당신은 도대체 그 죄들을 어떻게 처치하렵니까?"

승려는 침울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 방법을 잘 모르겠습니다." 터커는 마음속으로 '바로 이때다.'라고 생각하고는 "나는 그 방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죄의 결말은 죽음입니다. 구주되신 예수님께서 그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나는 그 예수님을 믿어 죄 사함받았고 이제는 죄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죄의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시킨 사건입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서 예수님은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여기서 '대속물'은 구약에서는 범죄의 보상으로 내는 돈(민 35:31-32)을 의미합니다. 또 주후 1세기 그레코-로만 시대에서 대속물은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 치루어야 할 값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많은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주는 것은 우리가 죄인으로서 받아야 할 벌에 대한 대가를 그 분이 죽으심으로써 대신 갚아주셨다는 구속의 은혜를 말합니다. 또한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우리들을 값을 치루고 자유케 했다는 해방의 은총이란 뜻이 있습니다. 그 분의 사랑은 자유케 하는 능력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였고, 죄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 또 사망은 죄 안에서 우리에게 대해 왕노룻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주고, 대신 우리들을 죄와 사탄의 권세에서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예수님의 구원 사역은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확증되었으며, 이제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원수 마귀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이 일을 계속하실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은 화해와 평화를 이루셨습니다.(10)

죄인인 우리는 본래 하나님과 원수였습니다(롬 5:10).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와 이토록 껄끄러운 관계를 참으실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 화해를 청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음으로써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곧 화해의 관계가 맺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예수님은 "화평" 그 자체입니다. 십자가로 원수된 것을 소멸하심으로 인간 및 모든 만물과 하나님 사이에, 또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화해와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가 이룬 평화와 화해는 이미 구약시대에 약속된 "화평의 언약'의 성취입니다. 또 이미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바 있는(슥 9:9-10) "메시야의 평화"의 실현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온 화해와 평화는 단순히 심리적 평안만이 아닙니다. 또한 정치와 무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Pax Romana가 아니라 사랑과 화해로 원수와도 한 몸을 이루는 Pax Christi 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로 변하면 무엇이 좋습니까? 우리 안에 불안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안이 넘칩니다. 담대함이 찾아옵니다.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므로 기도가 상달되고 응답이 넘칩니다.
1세기전 영국에서 활동했던 고아의 아버지 죠지 뮬러는 80평생 2만 5천번이나 되는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이 기도를 통해서 1만명의 고아를 돌보았고 선교지에 2백만권의 성경과 3백 만권 이상의 신앙도서를 보냈으며 10만명 이상의 주일 학생을 교육했다고 합니다. 그가 81세가 되던 해에 어느 신학교의 특강강사로 초청되어 그 비결이 무엇인지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의자에 무릎을 꿇고 기도의 자세를 취하면서 "이것이 비결이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부러운 이야기입니다. 죠지 뮬러의 생애는 기도가 얼마나 엄청난 능력이며 또 특권임을 잘 보여 준 아름다운 삶입니다. 동시에 그가 얼마나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누리며 살았는가를 보여주는 산 증거입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은 기쁨이 충만한 삶을 약속합니다.(11)

미국에 세인트 루이스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여행중이던 한 변호사가 그곳에서 하루를 머물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날이 주일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인 그는 교회를 찾아 예배를 드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디에 교회가 있는지 알 수가 없어 길에서 교통정리를 하고 있는 순경한테 물었습니다. "여행중에 예배를 드릴 교회를 찾고 있습니다. 어디에 교회가 있습니까?" 순경이 상세하게 일러주는대로 가보니 정말 교회가 있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은혜를 많이 받고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그 순경을 또 만났습니다. 변호사는 그 순경에게 또 물어 보았습니다. "당신이 일러준 교회를 찾아가면서 보니까 다른 교회가 많던데 하필 맨 끝에 있는 그 교회를 소개해 주었습니까?" "저는 참된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교통정리를 하면서 예배를 드리러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더니 그 교회로 드나드는 사람들의 얼굴이 제일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교회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교회가 처음 이 땅에 들어온지 오래지 않았을 때 어떤 사람이 한국의 여러 종교를 평한 글이 있습니다. 거기보면 재밌는 부분이 있는데 불교를 상갓집에 비유했습니다. 그저 나무아미타불이요 인생무상만을 강조하다보니 다 죽고 다 없어진다는 것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러니 상갓집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교는 마치 제사집과 같다는 것입니다. 효도를 한답시고 밤낮 제사만 지냅니다. 유교방식대로 살다보면 일년내내 정성을 다해 제사지내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잔칫집같다고 했습니다. 언제나 찬양소리가 그치지 않습니다. 예배가 감사의 축제입니다. 신자가 되면 사람들의 얼굴이 밝아집니다. 행복해집니다.

하나님과 화평하는 것이 기쁨의 뿌리입니다. 하나님과 등지고 원수가 되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죄짓고 하나님을 거스리면서 살며 기쁨이 충만해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순간적인 기쁨은 만날 수 있지만 또다시 공허해지고 근심이 그를 누룹니다.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 (잠 14:13)'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기쁨의 근본은 하나님과 화목하는데 있습니다. 눅15장에 보면 탕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다 잃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자기가 불행한 원인이 재산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친구를 다 잃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행해진 진짜 이유가 아닙니다. 후에 그는 깨닫습니다. 자신이 아버지를 떠났기 때문에 불행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버지품을 떠나서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잘되건 못되건, 가난하건, 부유하건 그것은 기쁨과 상관없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둘째 아들은 곧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버지 품으로 돌아갑니다.

아버지는 그가 재산을 다 탕진한채 거지가 되어 돌아왓으나 상관하지 않습니다. 냄새나는 모습으로 가진 것 하나도 없이 돌아왔으나 기뻐하며 그를 끌어안고 즐거워합니다. 실패한 자식의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잔치를 크게 열고 새옷과 새신 가락지를 내어주며 사람들에게 돌아온 자식을 자랑하며 즐거워합니다. 그 아버지와 함께 돌아온 아들은 참 기쁨을 회복하게 됩니다.

여기에 중요한 성경의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적으로 성공한 모습을 하나님께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채 성공하는 것은 비정상입니다. 하나님을 떠난채 세상적으로도 성공해보아야 오래지 않아 허무해집니다. 공허해집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을 모아도, 대단한 권력을 잡아도, 인기를 얻어도 별것이 아님을 깨닫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실패한 모습도 괜찮습니다. 초라한 모습도 괜찮습니다. 오직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과 함께 참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과 화평한 가운데 있는 사람, 이 사람에게만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다. 이 은혜에 들어감을 입었을때에만이 새로운 세계에서 살게 되고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열리고 밝은 미래를 바라보며 오늘을 살때 참된 즐거움이 넘쳐납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기쁨이 있습니까? 이 기쁨이 여러분안에서 인생을 풍성하게 하는 생명력으로 역사하게 있습니까? 이 기쁨이 여러분안에서 위대한 창조력으로 역사하여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고 있습니까? 아직 그 기븜이 없으시다면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점검해 보시고 즉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문기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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