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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2의 존웨슬리 (롬 1: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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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존 웨슬리회심268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우리가 잘 아시다 시피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는 1703년에 사무엘 웨슬리와 수잔나 아네슬리의 19자녀 중 15번째로 태어나 1791년에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웨슬리는 “전세계는 나의 교구이다”라고 외치며 대 전도운동을 전개하여 놀라운 복음주의적인 부흥을 가져와 영국 사회를 변화시키고 50년 동안 말을 타고 다니며 40만 킬로 이상 여행했다. 그는 141편의 설교집(42,400회 설교), 의학서적, 영문법, 논문 등의 무수한 책(200여권)을 저술했습니다.
그는 항상 자기 생명을 땅위에 주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평생을 주의 일에 힘쓰다가 1791년 3월 2일에 53년의 전도사업을 마치고 88세를 일기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란 말을 남기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1. 존 웨슬리의 생애

그는 영적이 훈련의 좋은 토양이 되는 환경에서 태어나 성장했습니다. 목사인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와 어머니 수잔나 아네슬리는 그의 영적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옥스포드의 출신 영국 성공회 목사로 40년간 엡웟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했습니다. 영국 명문목사 가문의 출신이며 교양과 지성을 겸비한 위대한 세계 현모 중의 한 분인 그의 어머니 수잔나 아네슬리도 할아버지 아버지가 다 목사님 집안이었습니다.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 목사님은 청교도파이며 헬라어 라틴어 불어 등에 능한 분이었습니다. 자녀들은 19남매 중 10명이 죽고 딸 여섯과 아들 삼 형제만 남았습니다. 딸들도 뛰어나는 교육을 받고 평범한 가정으로 출가했습니다. 아들 셋은 다 목사가 되었습니다.

어머니 수잔나의 교육철학에는 “제 마음대로” 라는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이들을 조용히 울도록 가르쳤으며 다섯 번째 생일에 알파벳을 배우고 다음날 아침부터는 창세기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읽기를 철저하게 교육시켰습니다.
런던 챠터하우스학교에 다녔으며 옥스퍼드대학교의 그리스도 쳐치 대학에서 수학했습니다. 졸업 후에 영국국교회의 신부가 되기 위해 1725년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 후 옥스퍼드 대학교의 링컨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그곳에서 학문적인 심화를 이루었습니다.

옥스퍼드에서 웨슬리는 동생 챨스와 함께 젊은이들의 작은 그룹을 만들었습니다. 그 그룹의 목적은 성서와 고전을 함께 연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웨슬리는 곧 그 그룹의 리더가 되었으며 다른 활동도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함께 모여 성서를 연구하며 예배를 드리며 일주일에 한두번씩 금식을 하였습니다. 감옥을 방문하고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을 찾아갔습니다.
이러한 영적 교제는 웨슬리의 영적 생활이 점진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포함하며 확장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그들을 ‘성경벌레’ 혹은 ‘신성클럽’ ‘규칙쟁이’라고 불렀습니다. 감리회(Methodist)란 법칙주의자 곧 규칙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란 뜻입니다.
이 모임이 점점 커진 것이 속회의 시작이요 감리교회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리교회는 신성구락부(속회)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어 감리교회의 속회는 감리교단의 생명이기도 합니다.

신성그룹 운동을 통해 경건한 생활을 몸에 익혔던 웨슬리는 자신 만만하여 1735년 10월 14일 출항하여 ‘죠지아주 사바나’ 항에 도착하기까지 57일간의 긴 항해를 했는데 그동안 큰 풍랑을 만나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자 죽음의 공포에 있을 때, 그와 동승한 독일인 ‘모라비안’ 교파의 교인들은 태연하게 찬송을 부르고 있었는데 이를 지켜본 ‘존 웨슬리’는 자기의 신앙이 그들에 비교해서 아주 미약함을 깨닫고, 그들과 깊은 사귐을 통해서 신앙의 많은 도움을 받고 미국에 도착하여 북미 선교사업에 심혈을 다하여 전도하여 처음에는 많은 청중들이 모이기까지 하였으나 그 결과는 완전히 실패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고 2년만에 강제로 귀국해야 했습니다.

2. 존 웨슬리의 회심

웨슬리는 그가 1738년 5월 24일 모라비안교도들의 모임인 올드스케잇의 작은 모임에서 중생의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귀국 후 오랫동안 신앙적 고민과 회의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특히 5.24일을 전후해서 그는 심각한 신앙적 고민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24일 올더스케잇의 작은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 집회에서는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우리 속에서의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를 변화시켜 새로 하나님께로 거듭나게 하며 옛 사람을 죽여 우리를 마음, 기질 , 성품과 모든 능력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성령이 오신다는 믿음은 생명적이고 창조적이며 활동적이고 능력 있는 것이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사실을 글로 또는 신학적 이론으로 웨슬리가 알고 있었던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달라졌다는 것인가?
웨슬리는 감리교인에게 중요한 것은 머리, 가슴, 손이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웨슬리는 그 진리를 머리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옥스포드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그 대학 강사로 남아 있을 정도였으니 그의 신학적 지식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는 박식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변화하게 하고 중생시키는 것은 신학적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라 성령의 뜨거운 역사입니다. 물론 이 말은 신학적 이론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학이 없을 때 잘못된 경험이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종교는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경험에 그친 것이 아니라 실천을 했습니다. 손과 발이 실천하지 않는 중생은 완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감리교회는 개인의 중생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개인은 공동체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변화에 직결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이 변화되고 가정이 변화되고, 나라가 변화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의 온전성을 추구하는 그것이 웨슬리의 최종적 목표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인류사회로써 우리가 목표하는 지상에서의 하나님나라 실현입니다.
그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9시15분쯤 되어 그가 그리스도안에서 말씀을 통하여 어떻게 우리 마음에 변화를 가져오는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을 때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내가 진정 그리스도를 믿고 있음을 느꼈고 구원을 위해 주님만을 의지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가 내 죄를 다 사해주셨다는 확신도 갖게 되었다. ”이 내용이 무슨 특별한 것이거나 독특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개신교 복음주의가 주장하는 내용 그대로입니다. 그 내용이 그 시간에 웨슬리에게 그렇게 큰 감명을 주고 중생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그 뜨거워짐은 성령이 임하신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지식으로만은 안됩니다. 결심만으로도 안됩니다. 웨슬리의 결심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지만 그것으로 되지 않았습니다. 속죄의 확신과 구원의 확신이 마음에 불타 오르면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통해서 오게 된 것입니다.

3. 웨슬리의 회심이 가져 온 결과

사람들에게 열정이나 열심은 아주 중요합니다. 일을 사랑하는 사람은 일에 대한 열정이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할 때 마음에 뜨거워집니다.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웨슬리의 뜨거워진 사건, 때문에 영국 사회를 변화시키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거점이 마련된 것입니다.
우리 감리교회는 존 웨슬레 목사님에 의해 뜨거운 성령운동이 영국에서 ‘메도디스트’란 이름으로 1744년에 시작되어 당시 부패했던 영국을 휩쓸었습니다.

18세기 당시 영국 사회는 대단히 타락했습니다. 한마디로 ‘무질서와 혼란’의 시대였습니다. 음란, 음주, 도박. . 사회 전체가 취해 비틀거리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정부가 복권 제도를 장려하여 국민들 사이에 사행심으로 가득했습니다. 모두 다 쉽게 돈 벌고 쉽게 살아갈려는 마음으로 가득했습니다. 오늘 우리나라의 사회가 그 당시와 비슷합니다.
소망이 없어 보였던 영국 사회가 웨슬리 목사님이 일으킨 감리교 운동을 통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사회변화에 대한 설교를 많이 했습니다. 야외설교를 시작으로 80세까지 4만-5만회의 설교를 하였습니다.

웨슬리의 이 운동은 1784년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미국에서 크게 부흥하여 세계에 수 많은 선교사를 파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국에는 초대 선교사로 미국인 ‘아펜셀러 선교사’(1858-1902)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아침 인천항에 상륙하여 배재학당과 이화학당과 인천 내리감리교회, 서울 정동감리교회 등을 설립하고 선교를 시작하면서 오늘의 150만이 넘는 기독교 대한 감리교회가 있게 되었습니다.
교파는 다르지만 성결교회 역시 웨슬리의 후예들입니다. 전 세계의 웨슬리 가족이 4천만은 된다고 합니다. 하나의 중생의 경험이 이렇게 엄청만 결과를 가져오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치 못했을 것입니다.

4. 감리교인의 삶

감리교인? 감리교인은 성령의 충만한 힘을 입어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마음과 정신과 영혼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웨슬레 목사님은 모든 영적 운동은 성령 운동으로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신앙의 성장이나 변화는 성령으로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24:32)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신 것을 보고 실의에 빠진 채 길을 가던 두 제자가 예수께서 그들과 동행하셨으나 그들의 눈이 어두워져 알아보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어주실 때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래서 그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예루사렘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마음이 뜨거워질 때 영의 눈이 열리고 비전과 용기가 생깁니다. 부활의 확신과 소망이 넘치게 됩니다. 그후 자기 한 목숨 살기 위하여 도망가던 제자들이 그 밤에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이 뜨거운 마음은 동력이 됩니다. 마음이 뜨거워진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은 사람들의 마음을 불태웠습니다.

1) 감리교인은 모든 세계 온 인류를 향한 사랑으로 가득한 사람들입니다. “세계는 나의 교구!!” 조그마한 것에 옹졸한 마음으로 시기와 분노, 남을 해치려는 생각을 떨치는 자들입니다.

2) 감리교인은 크고 작은 모든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입니다. 메도디스트입니다. 거룩한 신앙의 삶을 위하여 세상의 어떤 오락과 관습도 따르지 않습니다.

3) 감리교인은 기도의 사람입니다. 88세의 생신을 맞은 그에게 장수의 비결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더니 60년 동안 새벽 4시에 일어나 새벽기도한 결과라고 하였습니다. 감리교인으로써 새벽기도를 하지 않는 것은 타락한 증거라고까지 하였습니다. 웨슬레 목사님은 철야기도, 새벽기도, 금식기도 등을 하였습니다.

4) 감리교인들은 전도병(病) 환자들이어야 합니다. 이 얼마나 축복된 병인가? 사도 바울도 이 병에 걸려서 죽었고, 사도 베드로도 그랬고, 성 어거스틴도, 허드슨 테일러도, 아펜셀러 선교사도 이 병에 걸려서 기뻐하다 죽었습니다.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레 목사님도 이 병에 걸려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다가 천국에 가셨습니다.
롬1: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1:8)는 말씀을 기초하여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는 슬로건을 내 걸었습니다. 감리교회는 전도하는 교회입니다. 복음주의 교단입니다.

5) 감리교회는 이웃과 사회를 사랑하는 교회입니다. 존 웨슬레 목사님은 빈민구제운동, 금주운동, 학교와 병원을 세워 불우한 사람을 가르치고 치료하였으며, 형무소를 찾아가 전도하였고, 사회로부터 소외된 계층과 노동자, 농민을 상대로 도움을 아낌없이 베풀었습니다.

웨슬리는 사회복지 기관도 많이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흑인 학교를 위한 모금 운동과 흑인 노예들의 교육에 필요한 도서 보내기 운동도 전개했습니다. 그리고 책자를 출판해 노예 제도의 폐해를 강렬하게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1807년 ‘노예 매매 폐지법’과 1833년 ‘노예 해방 법령’통과는 아프리카를 넘어 전 세계에 하나의 전환점을 이루는 세계사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흑인 노예들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백인들과 함께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게 했습니다.
프랑스의 역사가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는 “18세기 요한 웨슬리에 의해 일어난 감리교회가 영국을 변화시키고 개혁시켰으므로 불란서와 같은 유혈혁명이 영국에서는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영국사회와 국가를 구원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회 개혁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대각성 운동의 촉진제가 되기도 하였다. 한 사람의 회심이 이렇게 한 국가를 넘어 전 세계에 영향을 주는 엄청난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5. 제2의 웨슬리안

인류 역사를 변화시킨 4대 회심이 있습니다. 시대마다 중요한 회심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첫번째는, 바울의 회심으로 초대교회가 탄생했습니다. 바울의 회심으로 초대 교회라는 교회의 씨가 자라났습니다. 로마를 거쳐서 유럽으로 확산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어거스틴의 회심은 <참회록>을 비롯하여 기독교의 기초를 이루는 많은 저작
을 남겼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열매입니다.
세 번째, 루터의 회심입니다. 이것은 말씀의 회복으로 인한 개신교를 탄생시켰습니다.
네 번째, 웨슬리의 회심은 감리교라는 열매와 영국 사회의 구원, 그리고 그 영향으로 어둠으로 가득찼던 18세기의 횃불이 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웨슬리의 부흥운동이 필요합니다. 제2의 웨슬리들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뜨거움을 회복해야 합니다.
흔히 많은 크리스챤들은 구원을 체험하고 나면 마음이 느슨해집니다. 자신의 현재의 그 모습에 만족합니다. 하나님을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는 일도 느슨해 집니다. 기도하지 않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예수님께 책망을 받은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느슨함 때문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3:17)
그들은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런지 모릅니다. 착각에서 일어나십시오. 깨어나십시오. 스스로 부자요 부요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의 열정이 떨어지기 쉬운 때는 우리의 삶이 궁핍할 때가 아니고 넉넉할 때입니다. 모자람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될 때입니다. 사람들은 배부르고 등 따듯하면 하나님을 멀리합니다. 하나님을 우습게 여깁니다. 교만해집니다. 자기가 다 했다고 거드름피웁니다.
먹고 살만 하니까 주일날 빠지는것도 자기 맘대로입니다. 배부른 탓입니다.
우리나라가 살기 힘들고 어려울 때는 얼마나 열심을 품고 모이기를 열심이었은지 모릅니다. 목사님께 기도해달라고 부탁하고 자신도 매달리고 . . .
다윗이 실패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느슨할 때입니다. 죄는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합니다.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지게 합니다. 열정이 사라지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무기는 거룩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 때 두렵지 않습니다.
어떤 것도 무섭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거룩이 힘입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성령께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우리가 성결케 되고 기쁨이 회복됩니다. 찬양의 능력이 회복됩니다. 두려움과 근심과 염려가 물러갑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과 역사가 나타납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이런 그리스도인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사회를 살리는 사람, 이 나라를 살리는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
그저 교인의 수가 불어나는 것에 있지 않고 변화된 사람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필요한 때입니다. 제2의 웨슬리들이 필요한 때입니다. 제2의 요한 웨슬레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임경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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